소설리스트

천방 (159)화 (159/385)
  • 159화. 횡포

    정국공부의 시위들은 마구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었다.

    경관걸이 돕겠다고 나서자 기분이 좋아진 회영왕의 입이 헤벌쭉 찢어졌다.

    두 마구부에서 뽑힌 선수들은 마구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사이 지온은 맞은 편 차양막에 있는 요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요심은 이겼어도 딱히 기분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옆에 있는 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이가 돌연 소염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소염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끄덕인 소염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 웃음을 본 지온은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경소소에게 물었다.

    “소염이란 사람, 혹시 너희 오라버니와 관계는 어때?”

    경소소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소염은 평왕세손 옆에 붙어사는 주구(*走狗: 끄나풀)야. 평왕세손 졸개 노릇이나 하는 사람이라, 오라버니는 그 사람과는 잘 안 어울려.”

    말을 마친 뒤 손을 말아 입 앞에 가져간 경소소가 마구장을 향해 소리쳤다.

    “오라버니, 힘내!”

    경관걸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차양막에 있는 제 동생에게 손에 든 언월장(偃月杖)을 흔들었다.

    * * *

    이윽고 징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공격과 수비가 쉴 틈 없이 오가는 사이, 선수들은 각자 가진 기술들을 유감없이 펼치기 시작했다.

    정국공부 사람들이 선수로 들어간 후, 회영왕이 이끄는 마구부의 실력도 크게 올라간 상황이었다.

    경관걸이 공을 잡아 먼저 공문을 흔들자 회영왕이 환호하며 구장(*球杖: 마구용 타봉)을 치켜 올려 득점의 기쁨을 만끽했고, 경소소 역시 큰 소리로 환호성을 보냈다. 분위기에 같이 휩쓸린 것인지 유민도 활짝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것을 눈치챘다.

    소염 쪽 선수들이 계획을 바꾼 것인지, 공을 쫓지 않고 회영왕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회영왕의 실력은 그저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기에, 수하들은 회영왕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뛸 선수가 부족해지니 상대편에서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고, 소염은 금방 주도권을 빼앗아 회영왕의 골대를 흔들었다.

    이러한 전략이 통한다는 것을 깨달은 상대는 더욱 가열차게 회영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상대측 선수들이 말을 달리며 구장을 사방으로 휘저어대니, 회영왕의 시위들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저 회영왕 주변만 맴돌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가 난 경관걸이 무어라 고함을 쳤지만, 소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마구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소염의 구장이 회영왕 말의 다리를 때리며 회영왕이 낙마할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 벌어지자, 끝내 들끓고 있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경관걸이 냅다 구장을 휘둘러 내려치자 순간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했던 소염이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양쪽 모두 분노하고야 말았다.

    마구고 뭐고, 그렇게 서로 주먹다짐이 시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참고 있던 경소소가 마구장 옆에서 방방 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창피한 줄도 모르는 파렴치한 소 가 놈 같으니! 오라버니, 두들겨 패버려!”

    유민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소염이라는 공자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감히 군왕 전하께 이런 파렴치한 술수를 쓰다니, 그러다 군왕 전하께서 다치시기라도 하면 책임은 질 수 있대요?”

    지온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평왕세손이 버티고 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유민이 요심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가 세손네 장원이니 일이 벌어지면 그쪽에서도 나서서 해결을 봐야 할 텐데요?”

    경소소가 입을 열었다.

    “평왕부 힘만 믿고 착한 회영왕 전하를 괴롭히는 거지!”

    유민도 씩씩대며 화를 냈다.

    “다들 평왕께서는 공정한 분이시라 말하던데, 그분의 세손이란 자가 어쩜 저럴 수가 있어요?”

    그걸 누가 알겠는가? 범 아래, 개 같은 후손이 나온 사례가 즐비하지 않던가?

    싸움이 일어나자 마구 경기를 보러왔던 여러 왕족이 득달같이 선수들에게 달려들어 양쪽을 떼어내는 바람에 다행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경관걸은 소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었다.

    “어디서 이런 더러운 수작을 벌이는 것이냐!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소염은 목에 흐른 피를 닦아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경관걸, 손을 쓴 건 네가 먼저가 아니냐!”

    경관걸이 그를 두들기려 다시 달려들었지만, 다른 이들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네놈이 작심하고 회영왕 전하의 말을 때리는 걸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눈이 안 달린 줄 아는 것이냐?”

    소염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작심하고 말을 쳤다는 것이냐? 마구장에선 누구라도 쉽게 부딪힐 수 있지.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란 말이냐? 그러는 네놈은 다른 이들의 말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단 말이냐?”

    “변명 같지도 않은……!”

    양측의 다툼이 더욱 격렬해지자, 결국 마구장의 주인인 요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경 세자, 다들 자네가 먼저 사람을 친 것을 봤는데 이렇게 나오면 아니 되지 않겠나?”

    경관걸은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저놈이 악의적으로 군왕 전하의 말을 때리는 걸 보지 못하셨습니까?”

    소염이 바로 반박했다.

    “본공자가 언제 악의를 가졌다는 것이냐! 우연이었다, 우연!”

    요심이 말을 받았다.

    “소염의 말이 틀린 것이 없지 않은가. 마구장에서 이런 충돌이 없기란 힘든 일이고.”

    평왕세손의 노골적인 편 들기에 이마에 핏줄이 불룩 솟아오른 경관걸은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두 사람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다행인 것은 요심이 그나마 정도를 지키는 척하며 소염을 혼내는 시늉이라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염, 너도 어찌 이리 경솔하게 행동할 수가 있느냐? 회영 왕숙이 어떤 분이신데. 당당한 군왕으로서 귀하디귀한 분이 아니시냐! 그러다 다치시기라도 하셨으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소염이 사과하는 척을 했다.

    “모두 제 탓입니다. 마구장 안에선 다들 동등할 줄 알았습니다.”

    그의 은근히 비꼬는 듯한 대답은 절로 주먹을 불렀고, 역시나 뚜껑이 열려버린 경소소가 제 오라버니를 도와 직접 주먹을 날리겠다며 달려들려 했다.

    그나마 유민의 동작이 빨라 급히 그녀를 붙들 수 있었다.

    “언니, 참아요! 사내들밖에 없는 곳인데 이렇게 달려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지온 언니, 언니도 좀 말려 봐요!”

    도움을 요청하던 유민은 고개를 돌렸다가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했다.

    지온은 마구장으로 달려들진 않았다. 그러나 도로 차양막 아래로 들어가더니 회영왕이 장식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옥조궁을 집어 드는 것이 아닌가! 옥조궁을 집어 무게를 가늠해본 지온은 옆에 있는 화살을 꺼내 들었다.

    “지온 언니!”

    어찌나 놀랐는지, 유민은 가슴이 다 터질 것 같았다.

    ‘어째 내 지인들은 이렇게 하나 같이 성격이 포악하단 말인가? 경소소는 달려나가 주먹다짐을 하려고 들지를 않나, 여기는 또 깔끔하게 상대를 죽이려고 하고 있지를 않나!’

    지온의 모습을 본 경소소가 멈칫했다.

    ‘나도 너무 열 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지 않아?’

    두 사람이 말릴 새도 없이 지온이 당긴 활시위가 풀어지며 화살이 날아갔고 곧 소염이 풀썩, 쓰러졌다.

    머릿속이 하얘진 경소소와 유민, 두 사람은 일순 멍하게 굳어버렸다.

    ‘끝이다. 소염을 쏴 죽였어. 일이 커졌어.’

    ‘어쩌지?!’

    갑작스레 일어난 변고에 경소소와 유민 두 사람만 얼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마구장에 있던 왕후공자들 역시 굳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기마 복장의 소녀가 손에 들었던 옥조궁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어 그들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짙은 색의 기마 복장에 눈처럼 하얀 얼굴은 사람의 심장을 잡아챌 듯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린 누군가가 구장을 놓쳐버렸다.

    “아얏!”

    발등으로 떨어진 구장 때문에 지른 고통스러운 비명에, 주술처럼 내려앉았던 정적이 깨졌다.

    마구장이 다시 시끄러운 소리로 뒤덮였을 때, 모두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스쳤다.

    ‘소염을 쏴 죽인 거야? 저 소저는 대체 누구지? 너무 횡포한 게 아닌가!’

    다행인 것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소염이 팔딱대는 잉어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곤 화살을 쥔 채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공격한 것이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든 화살로 향했다. 화살에 화살촉이 없는 것을 본 모두가 내심 안도했다.

    “제가 쏘았습니다.”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네가?”

    소염은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넌 누구냐?”

    “내 사촌 동생이다.”

    경관걸이 차갑게 일갈했다. 

    “왜, 동생에게 보복이라도 하려고?”

    소염이 분을 토했다.

    “경씨 가문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뒤에서 공격을 하나 보지? 능력 있으면 직접 올라와 싸우라고!”

    경관걸이 막 대거리를 하려는 순간, 지온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소공자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 정국공부는 정정당당하게 적을 처리하지요. 마구장에서 맺은 원한이니, 마구장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일단 이대로 정리를 하시고, 다시 약속을 정해 그때 같이 승패를 가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

    “아이고.”

    신음을 토한 회영왕은 의자에서 떨어질 듯 몸을 튕겼다.

    그의 몸을 주무르던 시위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하, 좀 참으십시오. 지금 이렇게 풀어놓지 않으면 내일은 걷지도 못하실 것입니다.”

    회영왕이 울상을 지었다.

    “지금도 아프지 않으냐? 참으란 말이야 쉽지.”

    그리고 다시 신음을 뱉으며 탄식했다.

    “이제 어쩌면 좋으냐? 내일까지 몸이 풀어지지 않으면 경기에도 못 나가는 것이 아니냐? 그럼 약속한 마구 경기는…….”

    경소소가 급히 입을 열었다.

    “마구 시합은 저희가 있으니, 군왕 전하께선 푹 쉬고 계시지요! 그렇지, 오라버니?”

    남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윽고 경관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의 몸이 가장 중요하지요.”

    “그래도 어찌 그러겠느냐?”

    회영왕이 말했다.

    “다들 본왕을 위해 이리 나서준 것인데, 어찌 내가 수수방관하고 있겠느냐?”

    지온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귀하신 황족이 아닙니까. 마구장에서 마구를 하는 것은 재미로 즐기시면 되는 일입니다. 이젠 승패를 가르는 승부가 됐는데, 직접 나가시면 상대방을 그만큼 높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 테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회영왕이 대답했다.

    “그도 그렇군. 본왕은 군왕인데 소염 같은 놈과 비교할 수는 없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뒤에 편히 앉아 계시면서 저희가 저들을 쓸어버리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시면 되는 것이지요.”

    “나 때문에 다들 고생이로구먼. 내가 너무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소염 그놈에게 속고 말았어. 그 옥패는 내가 봉작을 받을 때 황제 폐하께 받은 것이라 그걸 뺏기면 분명 폐하께 크게 혼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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