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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58)화 (158/385)
  • 158화. 이유 없는 미움

    회영왕이 지온과 유민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사람은 태사부, 유씨 가문의 넷째인 유 소저시다. 들어는 봤겠지? 그리고 여기 이 아이는 대장공주마마의 양녀가 된 지온 소저니 네 사촌 동생이라 할 수 있지. 그러니 앞으로 지온 동생이라 불러라.”

    요심의 시선이 지온에게 머물며 지온을 살피길 잠깐, 곧 그가 공수하며 입을 열었다.

    “지온 동생이었군.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그 후로 지온은 인사차 세손인 요심을 한 번 불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사촌 오라비가 된 요심에게 딱히 신경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요심 역시 더는 그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전형적인 대갓집 규수로군. 얼굴 말곤 딱히 특별한 것도 없어.’

    생각을 마무리한 요심은 경소소에게 관심을 돌렸다.

    “동생은 어찌 오라비와 함께 오지 않고 회영왕숙과 함께 오셨는가?”

    경소소가 대답했다.

    “장기 언니가 더위나 피하라고 초청을 하셨거든요. 마침 군왕 전하를 뵙게 되어 이렇게 구경하러 왔습니다. 세손께서도 양해해 주시겠지요?”

    “양해하다마다! 와준다면야 도리어 우리가 영광일세!”

    요심이 호탕하게 말했다.

    “편하게 구경들 하시게! 먹고 마시고 노는 것 전부 내가 책임지겠네!”

    감사를 표한 경소소와 다른 일행은 다시 회영왕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대화를 듣고 있던 유민이 이상한 기분에 작게 물었다.

    “평왕세손이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에요? 먹고 마시고 노는 걸 전부 자기가 책임지겠다니, 저희 마구를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어요? 설마 그것도 돈을 받는 건가요?”

    경소소가 조용히 대답했다.

    “넌 몰랐겠지만, 여기 장원에선 마구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놀 거리도 매우 많아. 이를테면, 도박 같은…….”

    회영왕이 고개를 돌리더니 조용히 하란 손짓을 하며 충고했다.

    “어린 여아들은 그런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경소소가 혀를 쏙 내밀곤 나머지 두 소녀에게 말했다.

    “그런데 안 들어가기만 하면 돼. 밖에서 마구 치는 것이나 구경하자.”

    유민은 그 말에 요심에 대한 인상이 크게 나빠져서 중얼댔다.

    “왕부의 장원에 도박장이 숨어 있다니요. 참나…….”

    ‘어쩐지 우리 오라버니들은 여기에 절대 오질 않더라니……. 평왕세손이란 사람도 그렇지 할 말 못 할 말 구분도 못 하나? 뭘 다 본인이 책임을 져?! 설마 우리 같은 규방의 규수들이 그런 놀이를 할까 봐?’

    * * *

    그렇게 작게 수다를 떨며 걷다 보니 일행은 금방 마구장에 다다랐다.

    도착하자 회영왕은 곧바로 차양막 밑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들었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들이 있으면 말만 해라. 내려와 마구를 쳐도 상관없고. 그러나 다치는 것까지는 나도 책임을 못 진다.”

    경소소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덥석 잡아챘다.

    “소소야!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성큼성큼 다가온 기마 복장의 사내는 바로 정국공부의 세자인 경관걸이었다!

    숨을 수도 없는 상황에, 경소소가 알랑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달았다.

    “헤헤, 오라버니…….”

    경관걸이 대뜸 그녀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소소, 넌 서정후부에 초대됐을 텐데? 그런데 네가 왜 여기서 나타나? 그것도 군왕 전하와 같이!”

    회영왕이 손을 마주 비비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도리가 없었네. 본왕이 저들에게 어탕을 빚지는 바람에 이곳에 데려오는 것으로 갚기로 했네.”

    경소소가 제 오라비에게 매달렸다.

    “오라버니 나 내쫓지 마! 여기 지온 언니도 같이 왔단 말이야! 내 체면도 생각을 좀 해줘야지.”

    경관걸은 그제야 기마 복장을 한 다른 두 소녀 중 하나가 지온이란 것을 깨달았다. 지온은 이미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큰오라버니를 뵙습니다.”

    대장공주는 지온을 정국공부로 데려가, 그곳 사람들과 얼굴을 익힐 겸 이미 인사를 시켰었다. 경관걸 역시 지온을 보자마자 경소소를 잡았던 손을 놓곤 곧장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제 보니 지온 동생이었구먼.”

    그제야 변명할 기회가 왔다고 여긴 경소소가 냉큼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우리 가문의 별장도 바로 옆이잖아. 그래서 지온 언니랑 밖으로 놀러 갔다가 언니가 마구장에 안 와봤다고 해서 군왕 전하를 뵌 김에 보러 가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던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서 괜히 이르지 말아 줘.”

    새로 생긴 사촌 동생도 함께 있으니 제 동생을 계속 붙잡고 있긴 어려웠던 경관걸이 경소소의 이마에 콩, 꿀밤을 때렸다.

    “네가 부리는 잔꾀를 내가 모를 줄 알고? 네가 오고 싶었던 거면서 지온 동생 핑계를 대는 게 아니냐?”

    경소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관걸이 회영왕에게 손을 모아 감사를 표했다.

    “제 여동생들을 챙기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군왕 전하.”

    회영왕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찰나, 바람처럼 나타난 기수 하나가 마구장 근처에서 회영왕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을 걸었다.

    “군왕 전하! 막 재미있어 지려 했는데, 어딜 가셨던 것입니까? 설마 지는 게 무서워 도망치셨던 건 아니시겠죠?”

    그 말에 회영왕이 당장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라는 것이냐! 잠깐 나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려 했던 것이다!”

    “그렇습니까? 전 또 계속 지는 게 두려우신가 했습니다!”

    “흥! 넌 그 입이 늘 문제로구나! 누가 두렵다는 게야!”

    “그럼 어서 와서 한 판 하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대가 커다랗게 웃으며 돌아가자, 성이 난 회영왕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경소소가 지온과 유민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전에 말을 건 못된 놈은 소염(蕭廉)이라고, 금군통령 소달(蕭達)의 아들인데 평왕세손이랑 아주 친해. 마구부(馬球部)를 거느리고 다니면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 성질을 건드리는 게 취미야. 회영왕 전하는 화를 참지 못해서 맨날 당하시는 거고…….”

    “경소소, 지금 누구 이야길 하는 게냐?”

    안 그래도 조금 전에 소염이 성질을 긁지 않았던가! 거기에 경소소로부터 맨날 당한다는 말까지 들은 회영왕은 제 체면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화를 참지 못한다니? 어차피 마구하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니냐? 경기를 해보지도 않고 그대로 졌다고 인정하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그러자 경소소가 기괴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맞습니다!”

    경소소의 무성의한 태도에 회영왕은 더욱 기가 차 발을 구를 정도였다.

    이를 보다 못한 경관걸이 끼어들었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조금 전에도 벌써 몇 번이나 지셨잖습니까. 사기도 다 떨어진 지금 또 가서 붙더라도, 다시 이기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 이대로 본 왕이 졌단 걸 인정이라도 하란 것이냐? 창피하게!”

    “창피하고, 돈도 잃으시겠지요!”

    경소소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자 유민이 작게 물었다.

    “돈은 왜 잃어요?”

    “내기도 같이하니까!”

    경소소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이에 유민이 화들짝 놀랐다.

    “그건 도박이 아닌가요?”

    “그거랑 이건 다르지! 마구 내기가 얼마나 고상한 일인데.”

    “…….”

    유민은 경소소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온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정말 경소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무애해각도 학생들의 도박을 엄하게 금지하였으나, 축국이나 마구를 할 땐 거의 내기판이 벌어지곤 했다. 내기에서 이긴 이들에겐 좋은 벼루나, 좋은 서책이 상으로 내려졌다.

    물론 무애해각에 있는 서생들끼리 하는 내기였으니, 상이라고 해도 그리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 이들은 대단하신 왕손공자들이 아니던가? 진귀하지 않은 것들로는 제 고귀한 신분을 드러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창피당하기도 싫고, 돈도 잃기 싫었던 회영왕은 계속 마구를 하러 가겠다며 금방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회영왕도 마구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회영왕은 다시 마구부를 이끌고 소염의 마구부와 함께 마구장의 연무대에 올랐다.

    시원한 차양막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지온과 경소소, 유민 세 사람은, 왕손공자들의 시위들이 강한 햇볕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마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염이란 자는 입이 걸긴 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종횡무진 마구장을 휩쓸고 다니며 공을 굴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문에 공을 넣었다.

    그 광경을 보며 지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회영왕은 그냥 취미 수준이네, 취미. 마구 실력이 어쩜 저러냐.’

    회영왕이 이끄는 마구부는 상대보다 실력이 부족하여 금방 밀리기 시작했다.

    “또 지게 생겼네.”

    경소소가 작은 탄식을 흘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징이 울렸고, 회영왕은 역시나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다.

    소염은 승자에게 돌아가는 금잔을 거머쥔 채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군왕 전하께서 주신 상은 잘 받겠습니다!”

    회영왕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은, 우는 사람 뺨 때리는 꼴이 아닌가!

    그러나 이것이 패자의 설움! 진 것은 진 것이기 때문에 상대의 그런 오만방자한 모습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군왕 전하, 계속하시겠습니까?”

    빙글빙글 웃으며 물은 소염이 제 딴에는 생각해주는 척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군왕 전하께서 너무 지기만 하신 것 같습니다. 돌아가셔서 댁에 할 말이 없으실 것 같으니, 그만하시지요.”

    그 말 한마디에 회영왕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왜 할 말이 없어? 놀러 왔으면 본왕처럼 제대로 놀아야지!”

    “그럼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오냐!”

    “그럼 이번엔 내기에 무엇을 거실 생각입니까?”

    회영왕은 제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지만, 이미 집을 나온 지 며칠이나 지난 터라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잃은 뒤였다. 돈을 가져오려고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 왕비에게 물어봐야 했다.

    결국, 이를 앙다문 그가 용무늬가 들어간 옥패를 꺼냈다.

    “이걸로 하지!”

    소염의 눈이 반짝 빛을 냈다.

    “이리 귀중한 것을 어찌 받겠습니까!”

    “그럼 이것의 가치만큼, 네가 가진 것들을 내놓거라!”

    소염은 뒤를 슬쩍 돌아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리하시지요. 이번에 전하께서 이기시면 전에 경기에 지셔서 가져가지 못했던 물건들을 전부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장원에서 쓰신 비용 역시 제가 모두 내겠습니다. 계시고 싶으신 만큼 계시고, 비용은 제가 모두 부담하는 것이지요. 어떠십니까, 전하?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옥패 하나에 상대가 이리도 후하게 나올 줄이야!

    회영왕의 눈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이번에 경기에서 져서 잃은 것들이 모두 얼마이던가?

    ‘이대로 돌아가면 왕비에게 뭐라 할 말도 없었는데, 만약 이번 판을 이기면…….’

    “좋네!”

    소염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저희는 먼저 가서 쉬고 있겠습니다. 잠시 다른 이들더러 즐기고 있으라 하고 다음 경기에 다시 오르는 것으로 하시지요.”

    소염이 제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자, 회영왕 역시 차양막 아래로 돌아왔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지온의 음성이 들렸다.

    “군왕 전하, 당하셨습니다.”

    회영왕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당하다니? 어디에?”

    “격장지계(*激將之計: 상대 장수의 감정을 자극시켜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계책)가 아닙니까!”

    경관걸이 대답했다.

    “여기 오신 며칠 내내 지기만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다음 경기에서 이기리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저것들이 운이 좋았던 게지!”

    지온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는 것이냐?”

    “조금 전 소공자께서 전하께 내기 물건을 약조하실 때, 뒤에 있는 평왕세손과 눈빛을 교환하셨어요. 그것만 보아도 이미 전부터 계획된 일이란 걸 알 수 있지요. 군왕 전하, 전하께선 평왕세손과 오랜 원한이라도 있으십니까?”

    “원한 같은 것은 없는데?”

    회영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경관걸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입가를 비틀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회영왕이 경기를 두고 시위들과 상의하기 위해 옆으로 사라지자 경소소가 급히 물었다.

    “오라버니, 회영왕 전하가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

    경관걸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자 지온이 물었다.

    “회영왕 숙부께서 평왕세손께 뭔가 밉보인 게 있는지요?”

    경관걸이 대답했다.

    “밉보일 게 뭐가 있겠느냐. 평왕세손 생각에 전하께서 바보 같으니 시도 때도 없이 놀려대는 게지.”

    유민은 이런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도 숙부와 조카 사이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그러나 지온은 이유 없는 미움도 있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꼴 보기 싫으니까 괴롭히려 드는 거지.’

    완 소저도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이 언제 완 소저에게 밉보인 일이 있었던가?

    “오라버니, 군왕 전하를 좀 도와드리자.”

    경소소가 애걸복걸 경관걸에게 매달렸다.

    “조금 전에 우리가 군왕 전하랑 같이 여기 들어올 때 평왕세손이 대뜸 기루에 다녀왔냐면서 마치 우리를 홍등가 여인처럼 취급했다니까! 진짜 재수 없어!”

    경관걸이 미간을 좁혔다.

    “전하께서 반드시 경기를 하셔야 한다니, 나도 방법이 없다. 아니면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진짜 잘하는 선수들을 좀 모아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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