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7)화 (157/385)
  • 157화. 평왕부

    난택산방.

    소식을 전해 받은 대장공주는 한참 말이 없었다.

    “마마?”

    매고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대장공주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그런 게지! 힘을 잃으니 이젠 친우조차 내 편에 서주질 않는 게야.”

    “서교에서 있었던 일만 보면, 수안군주께서 꼭 저쪽 편에 서신 거라 보기는…….”

    매고고가 말을 이었다.

    “잠깐 저들을 도와 상황을 알아보려던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대장공주가 매고고의 말을 받았다.

    “매, 더 말할 것 없네. 본궁도 다 이해해.”

    대장공주를 위로하려 입을 열었던 매고고는 다시 생각하니 또 할 말이 없는지라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그 일에 대해선 마음을 비운 대장공주가, 매고고에게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온이 곁에 암중호위 둘을 보내 밤낮으로 따라다니면서 그 아이의 안전을 지키게끔 하게.”

    그리고 대장공주는 구시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사고를 얼마나 치는 게야. 어린 소저들끼리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어찌 목숨이 위태로운 일을 당해.”

    대장공주의 말 속에 담긴 마음을 눈치챈 매고고가 위로할 말을 찾았다 싶어 얼른 입을 열었다.

    “아가씨 성정이 마마의 성정과 어찌 그리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집안사람도 아니고, 같이 살았던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비슷하다니, 역시 하늘이 내린 연이겠지요?”

    * * *

    완씨 집안이 지금 어떨지, 지온은 관심조차 없었다.

    이미 대장공주를 뒷배로 두고 있는 자신이 아니던가? 자신을 두고 수작을 벌인 나쁜 인간 하나 처리한 일에 계속 전전긍긍하며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약속한 대로 경소소, 유민과 함께 말을 타러 나섰다.

    완 소저의 일이 이미 별장 전체에 퍼진 뒤라, 각 집안 소저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쑥덕거리기 바빴다.

    “완 언니가 그렇게 됐는데, 본인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어떻게 아침부터 말을 타지?”

    “그게 지온 소저 탓은 아니지. 완 소저가 먼저 수작을 부렸다가 본인이 도로 당한 것뿐이야.”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완 언니는 지금 그 일 때문에 혼삿길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잖아. 앞으로 어떤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됐는데,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저러는 게 무서워.”

    “어차피 서로 모르던 사이였잖아. 넌 지온 소저한테 일이 생기면 마음이 쓰일 것 같아?”

    “지금 그 말 무슨 뜻이야? 그리고 왜 자꾸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는 건데?”

    “지온 소저 편에서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거야. 이 먼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수작을 벌였잖아. 그럼 완 소저가 어떻게 되든 원수에게 동정심이 생기겠어? 아무리 마음이 좋은 사람도 그렇게는 못 해.”

    * * *

    지온은 자신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 열띤 토론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른 아침부터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반나절 간 정신없이 신나게 말을 타고나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그러나 지온의 머리는 무척 맑아졌다.

    정오쯤 되자, 시녀들이 깨끗한 장소를 찾아 담요를 깔고 각양각색의 찬합을 꺼냈다.

    “아가씨, 이 수정만두 한 번 드셔보세요. 저희 집안 시녀가 이른 아침부터 만든 건데, 맛이 어떠세요?”

    “이건 안에 깨가 든 찹쌀경단인데, 먹어봐. 진짜 맛있어.”

    “탕이 없으니까 꼭 뭐 하나 빠진 것 같고, 너무 아쉽다.”

    그러자 지온이 말했다.

    “그게 뭐라고. 없으면 만들면 되지.”

    시녀들에게 이리저리 일을 시켜 간단한 부뚜막을 만들어 낸 지온이 냄비 대용으로 사용할 다호(*茶壺: 차를 담아두는 단지)를 꺼내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낮선 광경에 경소소와 유민은 그저 신기해하며 보고만 있었다.

    작은 칼로 등나무 줄기 몇 가닥을 잘라낸 지온은 금방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간단한 통발을 만들어 냇물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발에 물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잡힌 물고기를 손질한 의운은 고기전병의 기름을 가지고 작은 어탕을 만들어냈다.

    경소소와 유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연신 손뼉을 쳐댔다.

    “진짜 재밌어! 지온 언니, 언니는 할 줄 아는 게 왜 이렇게 많아? 나도 통발 만드는 거 알려주면 안 돼?”

    “그래, 알려줄게.”

    지온이 시녀가 건네는 찻잔을 받으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알려줄게. 그 전에 먼저 탕부터 먹어.”

    시녀들이 함께 재잘거리며 어탕을 덜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때, 미처 탕을 그릇에 덜기도 전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져 바로 다호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고 말았다.

    다호 안을 확인하고자 살펴본 시녀들이 하나같이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냄새나는 신발이 탕에 빠진 것이다.

    “누구야!”

    경소소가 벌컥 화를 냈다.

    “사람 비위 다 상하게 만들고! 빨리 나와, 죽여 버리기 전에!”

    그녀의 고함에 사람 하나가 숲속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급하게 뛰쳐나온 그가 말했다.

    “그 신발은 내 것이다, 내 것! 어서 신발을 이리 주거라!”

    고개를 돌린 지온은 놀란 마음에 그만 웃음이 나왔다.

    ‘저 사람 회영왕이잖아?’

    회영왕은 신발을 한쪽만 신은 채 깨금발을 하며 다가왔다.

    “아니, 어린 여아가 어찌 그리 폭력적인 것이냐? 죽인다니, 말이 너무 심하구나.”

    당연히 회영왕을 알고 있던 경소소가 급히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군왕 전하를 뵙습니다.”

    군왕이란 말에 유민 역시 달리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함께 예를 갖췄다.

    깨금발로 그들 앞까지 온 회영왕이 세 사람을 보곤 활짝 웃음을 지었다.

    “내 생질녀가 여기 있었군! 여긴 어쩐 일이냐?”

    지온이 웃으며 인사를 올리곤 대답했다.

    “군왕 전하. 여기서 뵙다니, 이런 우연이 있는지요.”

    회영왕이 인사를 받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탕을 못 먹게 하여 미안하구나. 먼저 내 신발부터 다오.”

    지온이 따로 지시를 내릴 것도 없이 시녀들이 금방 신을 다호에서 건졌다.

    다호 입구가 작아 신발의 앞코만 빠지기도 했거니와, 회영왕의 신발은 가죽으로 된 것이라 신발 안은 전혀 젖지 않았다.

    시녀들은 신에 묻은 국물을 냇가에서 깨끗하게 씻어내고 물기를 닦아 회영왕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회영왕이 기다렸다는 듯 신을 받아들었다.

    “고맙다!”

    신을 신은 회영왕이 곧바로 떠나려는 듯 몸을 돌리자 경소소가 그를 불러 세웠다.

    “군왕 전하, 그냥 가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회영왕이 다호 안에 든 탕을 보곤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배상이라도 해줄까?”

    그러고는 주섬주섬, 회영왕이 제 허리춤에 걸린 옥패를 푸는 것이 아닌가!

    용무늬가 조각된 옥패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소소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것을 저희가 감히 어떻게 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지요! 군왕 전하, 지금 저희를 놀리시는 것이지요?”

    그러자 회영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것이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구나.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냐?”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리던 경소소가 물었다.

    “군왕 전하. 전하께서 여기 오신 것은, 혹시 평왕가(平王家)에서 열리는 마구 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신지요?”

    회영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그럼 혹시 저희도 같이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신지요?”

    회영왕이 경소소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경씨 집안의 어린 것이 머리를 굴리는구나! 네 오라비가 데려가 주지 않는 것이냐?”

    경소소가 입술을 삐죽였다.

    “제가 햇볕에 타는 게 걱정된다고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귀찮은 게 분명합니다.”

    “네 오라비가 귀찮아하는 줄 아는데, 본왕도 너희 셋을 데려가는 걸 귀찮게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냐?”

    “이것은 전하께서 먹을 수 없게 만든 어탕에 대한 배상이지 않습니까.”

    경소소는 제가 공명정대한 대인이라도 된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다호 속에 있는 탕은 지온언니의 모진 고생 끝에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진감래의 순간, 저희가 한 입도 먹을 수 없게끔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군왕 전하가 아니십니까.”

    어탕 근처를 서성대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회영왕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그래, 알겠다. 단, 내 너희를 데려가 주겠지만, 반드시 조용히 있어야 한다. 사고를 쳐선 안 돼.”

    경소소가 제 가슴을 탕탕 쳤다.

    “군왕 전하 안심하세요! 반드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을게요. 절대 곤란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회영왕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경소소의 얼굴에는 으쓱한 표정이 걸려있었다.

    “이제 우리도 옆집에 가서 놀 수 있겠다.”

    유민은 늘 집안의 규율을 잘 지키던 사람이라 조용히 물었다.

    “그래도 되나요? 평왕부에는 사람도 정말 많을 텐데…….”

    “괜찮아, 난 전에 오라버니 따라 자주 놀러 갔었어. 무장가 소저들이 대부분 많이 오고, 어떤 이는 직접 마구를 할 때도 있어.”

    그제야 안심한 듯한 유민이 말했다.

    “저는 한 번도 안 가봐서…….”

    “걱정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면 돼!”

    지온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그녀에겐 어디든 다 똑같았다.

    이윽고 회영왕의 시위들이 그를 찾으러 나타났다.

    조금 전 회영왕의 말이 놀라 회영왕을 태운 채 달려 나가 버리는 바람에, 시위들이 그를 놓쳤던 것이다. 회영왕이 마구에서 계속 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속에서 천불이 났던 회영왕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발길질을 했다. 그렇게 화를 내며 발길질을 하다가 신발이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튼, 좀 바보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그러니까 칠월칠석 그날도 그렇게 쉽게 속아 옥루전 사랑채에 들어갔겠지.’

    * * *

    “워!

    말을 세운 회영왕이 뒤따라온 소저 셋에게 말했다.

    “도착했으니 본왕과 함께 들어가자.”

    “네!”

    흥분한 경소소가 당장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 장원은 평왕가(平王家)의 것이었는데, 평왕이 바로 현재 종정 어른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황족 중 배분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대장공주조차 그를 향해 황숙이라 불러야 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덕과 명성이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든 평왕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어, 지금 평왕부를 이끄는 이는 그의 아들인 평왕세자였다.

    마구장은 평왕의 세손인 요심(姚諶)이 고생 끝에 완성한 놀이터였다. 지난 몇 년간 도성의 내로라하는 귀공자들이, 여름과 가을이 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보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었다.

    회영왕은 수려한 외모의 소녀 셋과 함께 한껏 허세를 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장원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이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다.

    “회영왕숙, 어딜 갔다 오신 것입니까? 설마하니 그새를 못 참고 기방이라도 들리신 것은 아니겠지요?”

    유들거리는 음성에 지온과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말채찍을 흔들며 나타난 기마복의 젊은 공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방탕하기 그지없었다.

    회영왕이 버럭 고함을 쳤다.

    “헛소리! 경관걸(耿冠杰)의 여동생도 못 알아보는 것이냐!”

    피식 웃음을 지은 경소소가 입을 열었다.

    “세손. 귀하신 분들께선 일이 많아 잊는 것도 많으시다더니, 제가 걸음을 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절 잊으신 것입니까?”

    그녀를 본 요심의 태도가 금방 수그러들었다.

    “아, 경관걸의 여동생이었구먼. 내가 정신을 이리 빼놓고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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