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6)화 (156/385)
  • 156화. 봤어요

    입구에 서 있던 공자들 역시 고의로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수각이 있는 장원을 지키고 있던 이가 하필 잠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공자들도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수각에 막 도착했을 때, 누군가 물에 빠졌다는 고함소리를 듣게 되었고, 곧이어 규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 역시 이 때문에 매우 놀란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이대로 돌아가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혹시라도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남녀가 유별하다 하여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자리를 뜨지 않고 있던 공자들은 결국 본의 아니게 그 이후에 일어난 일까지 모두 보고 만 것이다.

    자신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걸리고 말았으니, 그들을 이끌고 왔던 서정후부의 둘째 공자가 급히 양해를 구했다.

    “상황이 이리되어 내가 미안하네. 그만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군.”

    그렇게 공자들이 옆에 있는 화원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장기의 시녀가 서정후부의 둘째 공자를 찾아왔다.

    작은 화정(*花庭: 화원에 지어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기는 오라버니가 다가오는 것을 보곤 벌컥 화부터 냈다.

    “오라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다른 집안 규수들을 불러다 놀 거라고 말했잖아! 그럼 자리를 피해줬어야지!”

    서정후부의 둘째 공자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각에 있을 줄 내가 알았겠어? 아까 들어올 때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고! 그래서 들어갔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오라비의 사정이야 들어보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기는 화를 삭일 수 없었다.

    자신이 이 모임을 주최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고라도 나면 집안마다 찾아가 읍소를 해가며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은 자신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 다들 어디까지 본 거야?”

    장기가 화를 꾹 참고 물었다.

    “뭘 어디까지 봐?”

    둘째 공자가 이해하지 못했는지 되물어오자, 장기가 다소 껄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완 소저의…….”

    다른 이들이라고 해봐야 신을 신지 않고 있었을 뿐이라, 거리가 있으니 뭐가 보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완 소저였다. 하필이면 지온 때문에 앞섶까지 찢어진 상황에, 거기에 싸움부터 하겠다고 달려들었으니, 속곳이 다 드러날 정도였던 것이다.

    둘째 공자가 뭐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자, 그 얼굴을 본 장기가 대번에 소리를 질렀다.

    “다들 본 거야?!”

    둘째 공자가 무마하려는 듯이 급히 대꾸했다.

    “나도 막 계속 쳐다본 건 아니야. 이상하다 싶어 바로 고개를 돌렸다고! 비례무시(非禮勿視)라고, 예가 아닌 건 보지도 말아야 한단 건, 나도 알지!”

    “그럼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확실히 안 봤대?”

    “…….”

    장기는 곧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미치겠네, 그러다 걔가 수치심에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둘째 공자가 말했다.

    “거리도 꽤 멀었잖아, 우리가 또 밖에서 떠들고 다닐 것도 아니고.”

    “이게 밖에다 떠들고 다닐 일이야?”

    장기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도 제 오라버니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니 그게 더 화를 돋웠다.

    “이 일, 오라버니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 완씨 가문에서 이대로 못 넘어가겠다고, 무조건 우리더러 책임지라고 하면, 그 책임은 오라버니가 져야 할 테니까!”

    그 말에 둘째 공자가 펄쩍 뛰었다.

    “설마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려고! 이제 나랑 무슨 상관인데! 완 소저가 사람 괴롭히려다가 본인이 당한 거구만!”

    “그 집안에서 오라버니한테 걜 책임지라고 할 때, 그런 것까지 다 따질 것 같아?”

    장기가 대답했다.

    “몇 다리 건너긴 해도 그 집안이랑 우리 집안은 친척이야. 아버지께서 도저히 체면을 차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안 돼! 안된다고!”

    둘째 공자가 황급히 말했다.

    “사람을 물로 밀었던 건 그렇다 치더라고, 거짓말까지 해서 죄를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부인으로 데려와! 그런 사람을 집안에 들이면 바람 잘 날이 있을 것 같아?”

    “그럼 오라버니, 빨리 가서 어머니 좀 모셔와. 절대로 완씨 가문이 먼저 우리 가문에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처리하게 만들면 안 돼.”

    오라버니가 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꼴을 보자 뒷목이 뻣뻣해진 장기가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라고! 그리고 오라버니랑 같이 왔던 멍청이들부터 빨리 보내!”

    “알았다, 알았어! 바로 간다!”

    오라버니가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장기는 지끈대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모였던 규수들 전부가 귀한 집안의 천금 같은 소저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고가 나기도 너무 쉬웠다.

    ‘어머니는 왜 굳이 지온 소저를 부르라고 하신 거야.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그래도 제 집안은 꽤 세가 있는 후부가 아니던가? 더구나 아직 가세가 기울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벌써 뒷배를 만들어둘 이유가 뭐란 말인가?

    * * *

    난데없이 벌어진 소동으로 규수들은 더 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짐을 챙겨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규수들은 식사 역시 각자의 거처에서 따로 했다.

    장기가 나중에 지온을 찾아와 다시 사과하자, 지온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에 관련되신 것도 아니니, 그리 마음 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완 소저가 저를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것을 보니, 아마 지난번에 제가 너무 과했었던 거겠죠. 어머니께서도 이러한 제 성정에 대해 말씀하시곤 하시는데, 이번 일을 교훈 삼아서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다음번엔 좀 참아야겠어요.”

    ‘제대로 혼쭐이 나서 교훈을 얻은 사람은 완 소저일텐데…….’

    이런 생각을 뒤로한 장기는, 듣기 좋은 이야기들만 한참 하고는 떠났다.

    그렇게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자, 그 틈에 유민이 작게 물었다.

    “지온 언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일부러요?”

    유민이 옷가지를 붙들어 찢는 듯한 동작을 보이자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어떨 것 같은데요?”

    유민은 몸이 달았다.

    “아니, 그래서 고의냐고요, 아니냐고요!”

    경소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일부러 그럴 수가 있어? 지온 언니가 사내들이 그렇게 들어올 줄 어떻게 알고?”

    지온이 느긋하게 생강탕 한 모금을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봤어요.”

    두 소녀의 시선이 지온에게 꽂히자 지온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연꽃을 따려고 선 각도에서 입구가 바로 보이거든요.”

    “…….”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끝에 유민이 말했다.

    “그럼 설마 계속 물에 건져진 그 자세로 있었던 것도…….”

    유민은 뒷말을 삼켰다. 일부러 시간을 끌어 완 소저를 창피하게 만들려던 것이 아닌가!

    “정말 독하다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온의 대답은, 저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지 완 소저에게 하는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심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경소소만이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수안군주는 금방 서교의 별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바로 완 소저를 찾아가 그녀를 달랜 후에 완씨 집안에서 온 사람에게 상황을 전하고 먼저 사과했다.

    어찌 됐건, 군주인 그녀가 그리 자신을 낮춰 사과도 했고, 상황 역시 제 집안의 여식에게 문제가 있었던지라 완씨 집안에선 더는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완씨 가문은 곧장 완 소저를 데리고 떠났다.

    “어머니!”

    그리고 장기가 수안군주를 찾아왔다.

    “일은 잘 처리된 건가요?”

    피곤함에 지친 얼굴로 수안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려보냈다.”

    장기가 수안군주의 어깨를 주무르며 죄송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겨우 이런 일에 어머니까지 나서게 하고…….”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어미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완씨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된 집안이 벌써 삼대가 이어지고 있는데 여전히 이리…….”

    수안군주는 말을 삼켰지만, 장기는 제 어미가 하려던 뒷말을 알 것 같았다.

    ‘체면치레도 못 하는 것인지…….’

    장기가 입을 열었다.

    “완 소저도 평소에 볼 땐 그래도 귀한 집안의 아가씨처럼 보여요.”

    잠시 말을 멈춘 장기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만 터지만 저렇게 본인이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바로 드러내서 문제지만요.”

    수안군주는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응접실에 제 딸과 둘만 남게 되자 그제야 입을 열어 물었다.

    “네가 볼 땐 이 일이 지온 소저가 계획한 일 같으냐?”

    멈칫한 장기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둘째 오라버니도 순간 마음이 동해 일행을 이끌고 나타난 건데, 그 아이가 어떻게 그걸 계산할 수 있었겠어요.”

    “완 소저의 옷은 그 아이가 찢은 것이었지. 그건 사실이지 않아?”

    장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지온을 변호했다.

    “하지만 이 일은 완 소저가 먼저 일으킨 거였어요. 연꽃을 꺾으려다 누군가에게 밀려 호수에 빠지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수안군주는 제 딸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장기는 제 어미의 웃음에 다시 멈칫하고 말았다.

    “그 아이를 좋게 보고 있는 게야?”

    수안군주가 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온을 계속 변호하는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기가 대답했다.

    “좋게 보는 것까진 아니에요. 제 고충을 잘 이해해준다 생각했거든요. 완 소저, 그 바보 같은 것에 비하면 당연히 지온 소저를 더 좋아하긴 하겠네요.”

    수안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장기는 제 어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 무슨 의미인지…….”

    “그 아이 말이다, 참으로 신통한 아이야. 보기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모든 일이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니 말이다.”

    장기가 물었다.

    “어머니는 지온 소저가 고의로 그랬다고 여기세요?”

    “나도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지.”

    수안군주가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능운진인이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도문에서 보는 점들은 운의 방향을 알아내어 이루어질 운의 기세를 따라가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지온 소저는, 이 어미가 느끼기에 매번 그 기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이 느껴진다. 설마, 능운진인에게 진짜 뭔가 배운 게야?”

    장기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점점 더 말씀이 현묘해지네요.”

    그 말에 수안군주 자신도 피식, 웃음을 짓고는 제 딸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의 지온 소저는 처음 퍼졌던 소문 속의 규수와는 전혀 다른 이가 됐으니, 너도 앞으로 지온 소저와 관계를 맺을 때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장기가 말을 덧붙였다.

    “제가 지온 소저를 향해 나쁜 마음을 먹을 것도 아니니, 어찌 됐건 오늘처럼 운이 나쁘진 않을 거예요.”

    수안군주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내심 장기의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딸의 대답이, 지온 소저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불운한 일이 없으리란 말로 들린 것이다.

    수안군주는 별장에서 묵지 않고 완 소저의 일을 처리한 후 다시 도성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탄 마차가 장안대가에 들어서 시댁인 서정후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순간 수안군주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마부에게 말했다.

    “강왕부로 가자.”

    “네, 부인.”

    마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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