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4)화 (154/385)
  • 154화. 물에 빠진 두 사람

    지온이 성 밖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경소소뿐 아니라 태사부의 넷째 소저, 유민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지온 소저, 오랜만에 봬요.”

    유민이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지온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셨지요?”

    “잘 지냈어요.”

    잠시 수다를 떨던 유민이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지온 소저, 둘째 오라버니의 소설 말이에요. 그게 지온 소저가 인쇄를 했다던데 맞아요?”

    “네, 맞아요!”

    지온이 대담하게 인정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둘째 공자님이 그러시던가요?”

    “둘째 오라버니가 감히 그 사실을 어떻게 입 밖에 꺼내겠어요? 제가 발견했지요. 오라버니께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백모님께 다 일러바치겠다고 협박해서 알아낸 거예요.”

    유민의 말에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둘째 공자님이 집안에서 서열이 어떠실지 눈에 훤하네요!”

    유민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런데 둘째 오라버니 돈 많이 벌었죠?”

    “네, 뭐…….”

    지온이 얼버무렸다.

    “몇십 냥쯤 되죠?”

    지온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고민하던 유민이 넉넉한 소매 속에서 원고 한 편을 쓱, 꺼냈다.

    “이것도 혹시 서책으로 낼 수 있을지 한 번 봐줘요.”

    지온이 매우 놀라 물었다.

    “이건……?”

    “내가 쓴 거예요.”

    유민이 더욱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에겐 비밀이에요.”

    * * *

    그렇게 서교 별장으로 가는 내내 지온은 소설 원고를 읽었다.

    무척 긴장한 얼굴로 유민이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지온의 복잡한 시선이 유민의 얼굴을 한 바퀴 훑었다.

    “아니, 어떻냐니까요!”

    조바심이 난 유민을 향해 지온이 원고를 흔들며 물었다.

    “원고를 전부 팔 건가요, 아니면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하실 건가요?”

    유민의 얼굴에 함지박만 한 미소가 걸렸다.

    “된단 거죠?”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촌 남매 둘 다 평범한 내용을 안 쓰는 게 참 재밌네요. 요즘 시장엔 미남과 가인이 등장하거나, 신선이나 요괴들이 나오는 것들이 유행이에요. 내용이야 다른 듯 보이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쓰는 문장부터 구성들이 천편일률적이죠. 그런데 두 사람은 쓰는 방법부터 내용까지 전부 새로워요.”

    유민의 눈이 수정처럼 반짝거렸다.

    “칭찬인가요?”

    “그럼요.”

    지온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원고를 전부 팔 건가요, 아니면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하실 건가요?”

    유민은 그제야 물어볼 마음이 생긴 듯했다.

    “원고를 전부 파는 건 뭐고, 이익 분배는 뭔데요?”

    “전자는 유민소저가 한 편을 쓰면 내가 한 편 값을 내는 거예요. 이익 분배는 판매금에서 이익을 나눠 가지는 것이고요. 만일 손실이 나면 난 투자금을 손해 보고, 유민소저는 원고를 손해 보는 거죠.”

    “둘째 오라버니는…….”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이 할을 가져가세요.”

    유민이 바로 대답했다.

    “그럼 이익 분배로 할게요!”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손해 볼지도 모르는 데, 걱정 안 돼요?”

    유민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차피 이걸로 생계를 이으려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심심풀이로 쓰는 건데, 손해 보면 보는 거죠.”

    “그런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지는 왜 물어봐요?”

    유민이 주변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그제야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용돈이 너무 적어서 그렇죠! 사고 싶은 소설책이 많은데, 그거 사 나르는 것만 해도 부족하다니까요. 그것 말고도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 인맥 관리도 해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얼마나 관리가 빈틈이 없으신지, 어린애는 손이 크면 안 된다는 소리만 하시면서…….”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돌아오면 계약서부터 쓰죠.”

    유민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주먹을 쥐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뱉었다.

    “야호!”

    “아, 주의해야 할 게 있어요.”

    지온이 원고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도성에 온 지 반년 밖에 안 된 나도, 이 원고가 조씨 가문의 비사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다음에는 내용을 바꿔서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어요. 괜히 문제 일으키면 귀찮아지거든요.”

    “네네, 그럴게요.”

    흥분으로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오른 유민은 지온이 무슨 소릴 하건 모두 받아들일 태세였다.

    * * *

    서교에 도착하자 초대한 주인이 나와 지온 일행을 맞았다.

    서정후의 셋째 자식인 장기(章琦)는 지온과 비슷한 또래로 수안군주를 닮은 얼굴을 지닌 규수였다. 부드럽게 빠진 동그란 얼굴형에 피부가 하얗게 깨끗한 것이, 딱 귀부인들이 좋아할 만한 복 있는 얼굴이었다.

    장기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칠월칠석엔 사람들이 많아서 지온 동생과 대화도 많이 못 했네. 그래서 염치없지만 내가 실례를 무릅쓰고 이번에 지온 동생을 초대했어. 규수들끼리 작은 모임이나 가지면서 더위나 피할 겸 해서.”

    장기가 어찌나 세밀하게 신경을 썼던지, 그녀는 지온의 특별한 신분까지 생각해서 사람들을 초대한 모양이었다.

    작은 모임이라기엔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경소소와 유민을 제외하고도, 지온은 완(阮)씨 집안의 여섯째까지 보지 않았던가!

    문벌세가는 대다수가 친인척끼리 이어져 있다 보니, 규수들의 모임이라고 할지라도 그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온을 본 완씨 가문의 여섯째는 금방 표정을 굳히더니 눈을 희번덕였다.

    그 모습에 경소소가 조용히 구시렁거렸다.

    “쟨 또 왜 불렀대, 재수 없게.”

    유민이 말했다.

    “완씨 가문과 서정후부는 서로 친척이잖아요. 저 둘의 관계가 우리보다 더 가깝겠죠.”

    경소소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싸했다.

    어차피 귀한 집 소저들이라고 해도 겨우 몇이나 되겠는가? 그 사이에서 사람 하나를 완전히 피하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우리 셋이 같이 있어요. 그리고 쟤는 무시하면 되죠.”

    유민이 웃으며 물었다.

    “소소 언니, 제가 싫으신 건 아니시죠?”

    경소소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우리도 장기 언니에게 이야기하고 같이 앉자.”

    “좋아요.”

    * * *

    규수들의 짐 정리가 끝나자 장기가 직접 그들을 찾아와 안내했다.

    그렇게 무리를 지은 규수들은 수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장씨 집안 별장에 지어진 수각은 꽤 좋았다.

    호수 위에 지어진 것뿐만 아니라 수각 안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도 무척이나 커서 백여 명이 들어가도 될 정도의 규모였다. 연못의 깊이는 그리 깊지 않아, 가슴께쯤 왔다.

    경소소가 지온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쪽에 있는 공문 두 개 보여? 공놀이에 쓰는 거야. 축국이랑 비슷해.”

    “오…….”

    지온이 속으로 읊조렸다.

    ‘수상축국이구나. 무애해각에서 만든 놀이 방법이었지.’

    무애해각은 해안가에 지어져, 이곳에서 공부하는 혈기 왕성한 소년들은 서원 밖으로 나가지 못하다 보니 온갖 새로운 놀이 방법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학생들이 축국에 말 타고 하는 공놀이인 마구(馬球)까지 질릴 무렵, 누군가 물에서 하는 축국을 생각해냈고, 금방 수상축국은 서원 전체에서 즐기는 놀이가 되었었다.

    그러나 지온이 직접 수상축국을 하며 놀아본 일은 없었다. 물에 들어가야만 하는 놀이였거니와,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유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축국을 하는 것을 보기는 무척 많이 보았다.

    ‘별일이 없으면 바닷가에 있는 서각에 앉아 청춘소년들을 훔쳐보는 게…… 훗, 적잖이 중독적이어야 말이지.’

    서정후부에 초대된 명문가 규수들 대부분은 물놀이까진 하지 않았다. 그저 신과 버선만 벗어 연못가에 앉아 물장구나 쳤고, 몇몇 대범하고 활발한 소저들만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규수들에게는 물놀이할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당연히 다들 물과 친하지 않아서 제대로 된 수영도 못하고 그저 재미나 보는 정도였다.

    장기가 지온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얼굴에 물을 뿌렸다. 장기가 돌아보니, 소녀 하나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기 언니, 내려와서 같이 놀자! 초대한 주인이 그렇게 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거야?”

    장기는 소녀를 향해 삿대질까지 해가며 욕을 했다.

    “지난번 시합에서 나더러 반칙했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왜, 그때 당한 거로 아직 모자라?”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데 아직 그 생각을 하고 있어! 삼일만 못 보면 다른 사람이라 생각해야 한다잖아? 이번엔 언니한테 절대 안 져!”

    “그래, 그래. 두고 보자!”

    장기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내가 널 어떻게 요리하는지 보여주지.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그때 누군가 이곳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지온 소저가 어려서부터 능운진인과 함께 다니며 배우셨으면, 공놀이 정돈 어렵지 않게 하실 것 같은데, 왜 같이하자 안 하세요? 장기 언니, 손님을 그리 홀대하면 되나요.”

    잠시 난감한 얼굴로 고민하던 장기가 지온을 바라보았다.

    본래 장기는 여인네들 대다수가 수영을 못해서 함께 수상축국을 하자고 권하면 지온이 곤란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 말을 듣고 나니, 어쩌면 지온이 수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온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물과 친하지 않아서요, 다들 웃으실 겁니다.”

    그 말에 장기가 내심 안도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쪽에 있는 아낙들을 불러. 다들 수영을 하실 수 있거든.”

    “그럴게요.”

    유민이 물장구를 치며 말했다.

    “이런 연못이 있으면 여름에 덥지도 않고 정말 좋을 텐데.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이런 수각은 안 짓겠다고 하셨대요.”

    경소소가 나른하게 대답했다.

    “난 그래도 마구가 더 재밌는데, 다들 햇볕에 탈 걸 걱정하더라고. 얼굴 까맣게 된다고…….”

    유민이 말했다.

    “바로 옆이 평왕가죠? 그 집에 엄청나게 큰 마구장이 있잖아요.”

    “맞아, 요 며칠 마구로 열기가 아주 뜨거웠어. 우리 오라버니도 어제 초대받았더라고.”

    “사실 우리도 가서 말 탈 수 있지 않아요?”

    “그럼 내일 말 타러 갈까? 근처 풍경도 엄청 좋아.”

    “좋아요, 일찍 나서면 볕에 타지도 않을 거예요.”

    그렇게 수다를 좀 떨고 나니 목이 말랐던 유민은 과실차를 가지러 갔고 경소소는 친한 지인이 불러 그곳으로 수다를 떨러 갔다.

    지온은 주변 풍경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구경하며 주변을 걷고 있었다.

    여름이 절정인지라, 호수엔 연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본 지온이 연꽃을 꺾으려고 손을 뻗었다.

    막 연꽃에 지온의 손이 닿았을 때, 갑자기 지온은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미는 것을 느꼈다.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할 새도 없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뒤로 손을 뻗은 지온은, 호수로 떨어지기 직전에 자신을 밀었던 이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아악!”

    그러자 수각 전체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풍덩!

    풍덩!

    그리고 두 사람이 물에 빠졌다.

    비명은 시녀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뛰쳐나온 시녀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물에 사람이 빠졌어요!”

    수각에서 일하는 여종들은 모두 이럴 때를 대비해 훈련받은 몸들이라, 곧바로 그들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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