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3)화 (153/385)
  • 153화.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것이야

    한편, 유신지를 보며 루안 역시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곳에 몰래 들어오면서, 혹시 잡히면 어떻게 될지 생각은 안 해봤나? 만약 진짜 내게 무슨 비밀이 있는 거라면, 과연 내가 자넬 그냥 보내줄까?”

    유신지는 순간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

    “대공자 성격에 이렇게 신중하지 않은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 설마 둘째 공자가 빙의라도 된 건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은 유신지는, 밤새 골머리를 앓느라 뜨거웠던 머릿속이, 드디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곰곰이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자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난 이미 예전에 떠났을 거다. 담을 넘는 짓 같은 것도 절대 안 했겠지.”

    “그럼 역시 나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깊단 의민가?”

    “퉤! 헛소리 좀 작작 해!”

    유신지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전에는 자네가 이런 사람일 줄 정말 못 알아봤단 말이지.”

    처음엔 제 말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신에게 전혀 곁을 전혀 주지 않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이젠 스스럼없이 농담까지 하고 있었다.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때문에 내가 아주 곤란해. 사실 이런 일은 죽음으로 입막음을 하는 게 가장 깔끔한 법인데, 유씨 가문의 대공자가 실종이라도 되면 다른 이들의 추적을 피할 수가 없거든.”

    “그렇지, 추적을 피할 수가 없지!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절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자, 우리!”

    “그렇다고 풀어줄 수도 없잖아? 자네가 나가서 함부로 떠들고 다닐 수도 있는데.”

    “절대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않겠다! 맹세해, 맹세!”

    손이 묶여있지만 않았다면, 유신지는 선서를 위해 손이라도 들어 올렸을 게 분명했다.

    “그럼 나가선 뭐라고 하려고?”

    “나가서…….”

    그때 유신지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아니지? 루안의 집 구조가 좀 수상한 것 말고 무슨 문제가 있나?’

    예상되는 것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대체 나가서 무슨 소릴 떠들 수 있단 말인가?

    “아니, 내가 여기서 찾아낸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가서 할 말이 뭐가 있어! 자네 집 구조가 병영 구조와 똑같긴 한데, 그거야 자네가 북양 사람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는 거고, 안 그래?”

    웃음을 지은 루안은 그제야 다소 마음을 놓은 듯 입을 열었다.

    “괜찮군. 한등!”

    “네!”

    “대공자님의 오라를 풀어드려라.”

    “네, 공자님.”

    그제야 유신지는 상황파악이 되었다.

    “루안! 이 자식, 자네 일부러 날 놀린 건가?”

    “똑똑하신 대공자께서 언제 또 이런 바보짓을 할 줄 알고? 제대로 기념해두지 않으면 너무 아쉽지.”

    “…….”

    “기왕 왔으니 술이나 마시고 가. 날 손님 대접도 못 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게 하지 말고.”

    루안은 한등에게 지시를 내렸다.

    “가서 술상을 내오거라. 죽 한 그릇도 잊지 말고.”

    이것저것 먹은 것들이 워낙 많았던 유신지가 아니었던가? 거기에 또 술까지 들어가면 루안이 굳이 괴롭히지 않아도 분명 배앓이로 고생을 할 터였다.

    자신을 배려하듯이 죽 한 그릇을 준비해주는 루안의 모습이, 유신지는 믿기지 않았다.

    “자네…….”

    “내가 너무 잘 해주는 것 같다고?”

    “어, 음…….”

    루안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발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게.”

    유신지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자신이 루안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오늘밤 자신은 절대 이런 충동적인 일 따윈 벌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에게 귀찮게 들러붙어 지낸 지난 몇 달간, 그가 언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준 적이 있었던가?

    ‘인제 보니 바보 같은 짓 한 번이 오히려 루안의 마음을 움직였군.’

    유신지의 상념을 비집고 루안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다음번엔 지금처럼 호기심 같은 것은 갖지 않는 게 좋겠네. 진짜 자네가 봐서는 안 될 거라도 찾아내면, 내가 입막음을 못 할 리가 없잖아?”

    * * *

    유신지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자택으로 돌아갔다.

    평소 이런 일이 거의 없었던 유신지인지라, 덩달아 늦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유 대부인은 대공자가 돌아왔단 소식에 급히 규방을 나왔다.

    유 대부인은 돌아온 제 큰아들을 보자마자 매우 놀라고 말았다.

    “어찌 이리될 때까지 마신게야?”

    부주가 울상이 되었다.

    “공자님 속이 말이 아니실 것입니다.”

    “관아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야?”

    “그것이 아니오라…….”

    “그럼 무슨 일인 것이야?”

    본래 유 대부인 사람인 부주가 대공자의 ‘못난 사정’을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 이야길 들은 유 대부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지금 저 녀석이 루 낭중에게 거절을 당해 속상한 마음에 이리될 때까지 술을 마셨단 말이냐?”

    부주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공자께서 정확하게 그리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오늘 벌이신 일만 보아도 이성적이지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잠시 말이 없던 유 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알겠다. 오늘 부주, 네가 고생이 많았으니 밤 근무는 다른 사람을 시키도록 하거라.”

    부주가 인사불성이 되어 침상에 누운 유신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부인.”

    * * *

    부주가 방을 나가자 유 대부인의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더위가 느껴지는 모양인지 유신지가 저도 몰래 옷깃을 잡아 늘이자,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유 대부인이 그에게 살랑살랑 부채를 부쳐 바람을 불어주었다.

    이에 유신지의 얼굴이 편안해지며 잠잠해지는 것이, 열기가 금방 진정이 된 듯 보였다.

    밤 근무를 하는 시종이 들어오고, 그만 일어나려는 유 대부인의 귀로 유신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돌아보니 유신지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깬 게야?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유 대부인이 곰살맞게 물었다.

    멍한 얼굴을 한 유신지를 보고 있으니 그의 어렸을 적 모습이 떠오르는 유 대부인이었다.

    ‘어찌나 머리가 빨리 컸는지, 일고여덟 살 때부터 벌써 이 어미와 수 싸움을 했었지.’

    문득, 유 대부인은 유신지를 원하는 대로 안고 쓰다듬을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지금 약한 제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느낄 수 없었던 모성애란 것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유 대부인의 물음에 제 가슴을 부여잡은 그가 여전히 멍한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여기가……여기가 불편합니다, 어머니.” 

    유 대부인이 그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거기가 왜?”

    말이 없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 모든 사람이 절 좋아하게 만들 수는 없더라고요.”

    온기 어린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유 대부인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지만, 하지만…….”

    침상에 누운 유신지의 시선은 벌레를 막는 휘장 끝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 사람도 절 좋아하지 않아요…….”

    듣고 있던 유 대부인은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누구를 말하는 게야?”

    “또 누가 있겠습니까?”

    불퉁하게 한 마디를 뱉은 유신지가 얇은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 덮자, 유 대부인이 당장 이불을 잡아 내렸다.

    “이마에 땀이 이리 흥건한데, 뭘 덮으려는 게야. 그보다 어서 네가 누구에게 차인 건지부터 말해 보렴. 그래야 이 어미가 웃을 거리가 생길 게 아니냐?”

    “어머니!”

    빽, 소리를 지른 유신지가 옆으로 돌아누워 제 표정을 감췄다.

    그가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단 것을 눈치챈 유 대부인이 물었다.

    “지온 소저인게야?”

    유신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폭, 내쉰 유 대부인이 입을 열었다.

    “내 너희 두 사람은 안 될 줄 알고 있었다.”

    죽은 듯이 말도 없던 유신지는 그 소릴 듣자마자 기분이 팍 상했는지 다시 휘릭 돌아눕더니, 이글이글 불같은 눈빛을 쏴대며 유 대부인을 향해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요! 왜 안 되는 것입니까? 제가 루안, 그 녀석보다 뭐가 부족해서요!”

    이에 유 대부인은 상황을 눈치챘다.

    “지온 소저가 루 낭중을 좋아했던 게야? 전엔 정말 그런 줄 몰랐구나.”

    어미에게 제 속을 들켜버린 것 같아 유신지는 속이 상했다.

    “그 자식 이름은 꺼내지도 마십시오!”

    아들의 반응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유 대부인이었다.

    ‘저가 먼저 말을 꺼내놓고는!’

    “그래, 그래. 안 꺼내면 되는 게지.”

    그제야 유신지는 만족한 듯 다시 원래의 화재로 돌아왔다.

    “저는 왜 안 되는 겁니까, 어머니? 제 어디가 부족한 겁니까?”

    유 대부인이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말했다.

    “네가 부족한 게 아니야. 그저 너무 늦은 것이지.”

    “제가 늦었다고요?”

    “그러니 다음번에 좋아하는 여인이 생기거든, 다시는 주저하지 말아라.”

    “…….”

    “그만 자거라. 아직 젊을 때니,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것이야.”

    유 대부인은 부들부채를 시종에게 넘기고 방을 나섰다.

    멍하니 침상에 누워있던 유신지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잠이나 자자!’

    * * *

    칠월칠석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온은 초청장 하나를 받았다.

    “수안군주의 여식이 보낸 것이로구나.”

    대장공주가 말했다.

    “이리 빨리 초청장을 보내는 것을 보니, 그래도 네 체면을 차려 주는 게로구나.”

    지온이 그런 대장공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어디 제 체면을 차려 주는 것이겠습니까? 어머니의 체면을 세워드리는 것이겠지요.”

    그러자 대장공주가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그것도 다 온이 네가 찾게 도와준 체면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온에게 대장공주가 부채질을 하며 설명을 해주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이야 나진 않았지만, 강왕비가 갑자기 장원으로 보내지고 폐하께선 네게 상을 내리시지 않았느냐? 그러니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을 게야.”

    “아!”

    지온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절 불러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하는 것이로군요?”

    대장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은 지난 삼 년간 조방궁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조방궁을 나서 황궁에 간 바로 그날에 강왕비가 장원으로 보내졌으니, 다들 매우 놀랐겠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상황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니 말이다.”

    “어머니, 그럼 제가 이 초대에 응해도 되겠는지요?”

    “가봐! 온이 너도 또래들과 자주 어울리고 지낼 때가 되었지. 그렇게 고인(高人)처럼 지내는 것도 얼마나 피곤하누?”

    지온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일부러 꾸며내는 것도 아닌데요.”

    “그래그래, 아주 신선으로 태어나셨어.”

    대장공주의 말에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수안군주의 시댁은 서정후부(西亭侯府)로, 초청장을 보낸 이는 그녀의 둘째 딸이자 후부의 셋째 아가씨, 장기(章琦)였다.

    장기는 서교에 있는 별장에서 가질 작은 모임에 지온을 초대했다.

    떠나기 전, 대장공주가 지온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고관대작 종친들 사이에서 서교에 장원을 세우는 것이 유행이었어. 그곳은 영산과 가까워 여름에도 시원하고, 좌측으론 사냥터가 있어 놀기가 좋거든. 이맘때면 아마 할 일 없는 방탕한 놈들은 모두 그곳에 있을 게야. 수안과 본궁의 관계가 나쁘지 않으니 더위 피하러 간다 생각하고 다녀오거라. 널 초대했으니 소소도 초대받았을 게야. 때맞춰 소소와 같이 가면 되겠구나.”

    “네, 어머니.”

    지온은 그 후로도 대장공주가 일러주는 것을 들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한편, 매고고는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느라 고생을 할 텐데도 매고고는 기분이 좋은 듯 입을 열었다.

    “몇 년 만에 제가 이리 쓸모가 있게 되었군요.”

    지온은 매고고의 진심 어린 말에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고고님, 제가 별장에 머무르는 건 고작 삼일인데요.”

    그러자 매고고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한 틈도 소홀할 수 없지요. 다른 이들이 짐을 적게 가지고 갈 것 같으십니까?”

    결국 지온은 어쩔 수 없이 몇 개나 되는 짐 상자를 모두 챙겨 조방궁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하로가 지온의 처소를 지키고, 서아와 의운이 지온을 따라나섰다.

    첫째 숙모인 위씨 부인으로부터 지온이 가산을 돌려받은 이후로, 하로는 장부를 보는 일에 완전히 몰입하여, 놀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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