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2)화 (152/385)
  • 152화. 이 야심한 시각에 인사도 없이 찾아온 건가?

    답이 없는 상황에, 부주는 마부를 통해 유씨 가문에 연락을 보내고 골목 입구에서 녹두묵 두 그릇을 사 왔다. 그리고 그것을 주인과 단둘이 마차에서 몽글거리는 땀을 닦으며 먹었다.

    “넌 바보인 것이냐?”

    유신지는 녹두묵을 먹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매운 걸 먹으면 더 땀이 나지 않느냐?”

    “그럼 제가 가서 탕면이나 고기전병 두 개를 사올까요?”

    “됐다.”

    사실 유신지는 녹두묵을 아주 맛있게 먹은 참이었다.

    “조금 있다 시원한 음료나 마시자.”

    “네!”

    두 사람은 녹두묵을 뚝딱 해치웠다.

    부주는 빈 그릇을 가게에 가져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감초탕을 사고 과일가게를 지나며 수박 두 조각을 샀다. 심지어 거마행(*車馬行: 말과 마차를 관리하던 곳)에 들러 말을 먹일 건초까지 사서 말까지 밥을 먹였다.

    유신지는 감초탕을 마시고 수박까지 먹은 후에야 느껴지는 편안한 포만감에 두둑한 배를 두드렸다.

    후식으로 부주가 물에 끓여 익힌 땅콩을 꺼내자, 두 사람은 또다시 마차에 앉아 주거니 받거니 익힌 땅콩을 주섬주섬 까먹었다.

    그 사이 땅거미가 내려앉더니 하늘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담 위에 올라갔던 한등은 그 상황을 잠시 지켜보다가 내려와서는 서재에 있는 루안에게 보고를 올렸다.

    루안은 서책을 읽으며 보고를 듣더니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게 먹고 마시기 위해서다?”

    “으음…….”

    한등은 잠시 숫자를 세어보았다.

    ‘맞는데?’

    얼마 지켜보진 않았지만, 그동안 그들이 먹은 것만 해도 총 네 가지나 되지 않던가! 본 건 유 추승의 시종이 왔다 갔다 움직이며 먹을 것을 사는 것뿐이었다.

    * * *

    마차 안.

    “공자님, 날이 다 저물었어요.”

    한편, 루안의 저택 밖에선 부주가 다시 유신지를 설득하고 있었다.

    “응.”

    유신지는 부채를 부치며, 이제 좀 시원해졌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더 지켜보실 생각이신데요?”

    “조금만 더 기다리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부주는 제 주인 옆에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밤은 더욱 깊어갔다.

    부주가 졸기 시작했을 때, 루안의 저택에 있는 시위들도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뭔 상황이냐, 이게? 가는 거야, 안 가는 거야? 있으면서 하는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이거 우리 시간만 잡아먹는 거 아냐?”

    그렇게 깊고 깊은 밤이 되어 거리에서 인적도 사라졌을 때, 부주는 문득 옆에 있던 사람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는 눈을 번쩍 떴다.

    유신지는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공자님!”

    유신지가 조용히 하란 손짓과 함께 몸을 돌렸다.

    부주는 마차에서 내리며 조용히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루안의 집을 한 바퀴 빙글 돌아본 유신지는 다른 이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을 곳을 한 곳 찾아냈다.

    “…공자님!”

    부주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도둑으로 잡히고 싶은 건 아니시죠?”

    “도둑으로 잡히다니, 말 한 번 재수 좋게도 하는구나!”

    유신지가 부주의 이마를 검지로 톡 때리며 핀잔을 주고는 말했다.

    “이 집이 수상해서 살펴보려는 게다.”

    부주가 눈을 끔벅이더니 물었다.

    “어디가 수상하단 말씀이세요?”

    “수상하다마다!”

    유신지는 생각했다. 자신들이 그렇게 오래 밖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오가는 사람 하나를 보지 못했다. 또 저택의 사방에는 높은 누각이 세워져 있는데 그것이 꼭 망루처럼 보였다. 더구나 한 바퀴 돌아보니, 사람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담벼락도 높게 세운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군사작전을 수행 중인 병영처럼 배치가 돼 있단 말이지!’

    사실 유신지는 호기심에 루안의 저택을 찾아왔던 것이었는데, 보다 보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루 낭중은 무슨 짓을 하려고 집을 이리 세웠단 말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부주에게 설명하기는 너무 귀찮았다.

    “여기 올라가기 힘드니까 네가 밑에서 날 받쳐야겠다.”

    “공자님!”

    부주는 매우 놀라며 물었다.

    “이런 일을 직접 하시려고요? 그냥 소인이…….”

    “조용히 못 하냐!”

    유신지가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럼 공자인 나더러 널 받치라는 거냐? 네가 날 밟고 올라가려고?”

    부주가 입을 닫았다.

    “빨리 안 엎드리냐?”

    “네…….”

    울상을 한 부주가 아래에 웅크리고 앉자 유신지가 그의 어깨를 밟았다.

    “너무 낮다. 조금 일어서봐!”

    “으, 네…….”

    “조금 더!”

    끝내 유신지가 담벼락의 끝을 잡았다. 유신지는 기마와 활쏘기 모두 그럭저럭 잘 배워 신체도 건강했던지라, 단숨에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그는 곧 저택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무슨 행운인가. 마침 자신이 올라온 담벼락 근처에 사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유신지는 들뜬 기분으로 사다리를 타고 담을 내려갔다.

    루안의 저택 안은 아주 조용해서 말 투레질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처마 아래 달린 풍등이 밤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유신지는 살금살금, 어두운 곳을 찾아 발소릴 죽여 가며 루안의 방을 찾아다녔다. 만지는 것도 최대한 평범한 것만 만졌다.

    ‘부인도 없고, 첩도 없어. 그리고 피할만한 사람도 없는 놈이니까 서재는 아마 이쪽에 있겠지.’

    그때 갑자기 방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본 유신지는 급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곧이어 불이 꺼진 방에서 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유신지는 루안이 저택을 가로질러 정방(正房)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신지는 신이 났다.

    ‘잘 됐어! 루안이 방으로 돌아갔으니, 나 혼자 녀석이 숨긴 비밀이 뭔지 알아볼 수 있겠어!’

    유신지는 조심스럽게, 숨마저 조심스레 쉬며 천천히 이동했다.

    이때, 야간 순찰을 하는 이가 근처를 지나갔다. 다행스럽게도 유신지는 워낙 기민한 사람인지라 잘 숨을 수 있었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지자 그는 서재의 문을 찾아 슬쩍 밀어보았다.

    ‘아니? 안 잠겨 있단 말이야?!’

    그는 최대한 조용히 문을 열고는 안으로 낑낑거리며 들어갔다.

    경계가 삼엄해 보이는 저택이어서 당연히 등을 켤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외부에서 들어오는 약한 불빛에 의지한 채 조금씩 서탁을 더듬으며 물건을 확인해가는 수밖에.’

    마침내 그가 서탁 위에 있는 문서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 누군가의 손이 그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유신지가 놀라 심장이 놀라 콩알만 해진 사이, 등불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루안은 서탁 바로 옆에 서서 그를 향해 웃는 듯 아닌 듯한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자, 이 야심한 시각에 인사도 없이 찾아온 건가?”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유신지는 한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장 달아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한등이 얼른 문을 닫고 그 앞을 막아섰고, 유신지를 덮치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야우가 다가왔다.

    유신지의 고민은 짧았다.

    ‘내가 몸을 잘 쓰긴 해도 무공을 익힌 몸은 아니지.’

    다시 몸을 돌린 유신지가 허리춤에 걸린 접선을 꺼내 들더니 방긋, 웃음을 지었다.

    “좋은 밤일세, 루 형!”

    루안은 대답은 하지 않고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한등이 손목을 푸는 듯 주물거리며 유신지를 향해 방긋, 웃음을 짓는 게 아닌가!

    “대공자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런 한등의 행동에 유신지의 간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아, 아니 자네들 왜 이러는가?”

    루안의 두 시종은 모두 루안이 북양에서 데려온 이들이 아니던가! 지금이야 저들이 물이나 끓이고 차 시중이나 드는 시종이라지만, 진짜 일이라도 벌어지면 그땐, 그대로 말 위에 올라 전쟁터로 달려갈 수 있는 이들이었다. 한낱, 유신지 따위의 유약한 서생 나부랭이가 당해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신지는 포박을 당한 채 서재에 있는 의자에 끌어 앉혀졌다.

    “루 형? 루 형! 루 낭중!”

    유신지가 있는 힘껏 루안을 불렀다.

    “자네가 영전했다기에 축하라도 해야겠다 싶어 찾아온 것뿐이지, 다른 뜻은 절대 없었다고!”

    루안은 별다른 말없이 다시 야우에게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눈치 빠른 야우가 바로 대답했다.

    “밖에 있는 자는 제가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유신지가 야우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 부주는 풀어주시게! 그게 안 되면 때려죽이진 않겠다고 약속이라도 하고 가던지……!”

    한등이 잔뜩 경계하며 불을 밝힌 촛대를 들고 유신지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그 사이, 루안은 유신지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이제 말하게.”

    “뭘 말해?”

    유신지가 놀란 마음을 달래며 되물었다.

    “여기에 왜 왔는지 말하라고.”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나?”

    유신지의 대답에 루안이 다시 한등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공자께서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러자 한등이 곧바로 대답했다.

    “소인이 사실대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러더니 한등이 대체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병을 하나 꺼냈는데, 꺼내자마자 유신지의 코로 옅은 쉰내가 쑥 들어왔다.

    ‘식초! 이건 식초다!’

    슬프게도, 워낙 아는 것이 많았던 유신지의 머릿속엔 금방 심문할 때 사용하는 고문 방법의 하나가 떠오르고 말았다.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고 있던 한등이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 공자님께선 신분도 높으시고 능력도 출중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 공자님께 소인이 어찌 거칠고 폭력적인 방법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건 얌전한 편이니 조금만 참으시지요. 후후.”

    한등이 그의 턱을 잡으려는 듯 가까이 다가오자, 유신지의 심장은 혼이라도 잡힌 듯이 매우 놀라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코로 식초를 들이붓는 고문을 책에서 보기만 했지, 실제로 당하게 될 줄이야! 당하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고!’

    “건들지 마! 루안! 우리 대화로 하자, 대화로!”

    살려달라는 유신지의 눈빛에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께서 대화로 풀어보자시는구나. 냄새 안 좋은 그것들은 그만 가지고 나가 보거라.”

    “네, 공자님.”

    당장에 손을 멈춘 한등이 공손하게 식초를 가지고 나가자 그제야 유신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서 저런 고문까지 당하면 내가 억울해서 못 살지!’

    마음을 진정시킨 유신지가 우물쭈물 변명하듯이 말했다.

    “아까 했던 말 중에 그래도 반은 사실이었다네.”

    “반이라니?”

    “영전했다고 해서 보러 왔다고 했던 말.”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그런데 왜 문을 두드리진 않았지?”

    유신지가 대답했다.

    “계속 보다 보니 수상하단 생각이 들더라고.”

    “수상? 어디가?”

    “저택이 담이 너무 높잖아. 입구는 안으로 너무 깊이 들어와 있고. 거기에 사방에 망루까지…….”

    루안은 유신지의 설명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북양에서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자비로운 내 큰형님께서 그사이 몇 번이나 자객들을 보내 날 암살하려 하셨다.”

    고개를 끄덕인 유신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저택 주변에 있는 인가에도 들락거리는 사람이 하나 없던데, 그건 왜지?”

    루안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자, 유신지가 미소와 함께 제 잘난 얼굴을 루안에게 쓱, 들이밀었다.

    “자네가 놓치고 있던 것을 내가 알려 준 것 같구먼. 그 공을 봐서라도 이 오라는 풀어주는 게 어때?”

    그러나 루안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랬다가 밖에 나가면 아무 데서나 떠벌리려고?”

    유신지의 마음이 다시 조급해졌다.

    “아니, 루안, 이 사람아! 내가 진짜 악의를 품었으면 수상하다고 느끼자마자 바로 고발하러 갔겠지, 여기 있다가 자네 손에 잡혔겠나?”

    루안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유신지를 쳐다보았다.

    “아, 그래서 유씨 집안의 대공자께서 이 늦은 시간에 내 집 담장을 넘은 건가? 게다가 서재까지 몰래 들어와 문서를 훔치려 했다? 그게 다 날 위한 것이었군!”

    “아니, 그걸 또 자네를 위해서 그랬단 건 아니지. 허풍이 그리 심해서야, 사람 참…….”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숨길 수 없게 된 유신지가 솔직하게 말했다.

    “난 그냥 호기심이었어. 루안, 자네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많은 것으로 보여서…….”

    “대공자,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

    “무슨 말?”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가만히 생각하던 유신지가 화들짝, 입을 열었다.

    “그거 다른 나라에서 물 건너온 말이잖아! 그럼 본국의 미풍양속이랑은 안 맞지, 안 맞고말고!”

    루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도 참 아는 게 많아.”

    “그건 당연한 거고!”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유신지는 루안에게 칭찬을 들었다며 저 자신을 꽤 자랑스러워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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