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1)화 (151/385)
  • 151화. 실연의 두 번째 단계, 부정

    얼마 뒤.

    지온은 서아가 건네는 상자를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내 생각보다 결단력들이 있으시네.”

    그래도 차남가가 어느 정도 고민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배시시 웃으며 다가온 서아가 계약서와 장부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말했다.

    “아가씨는 모르시죠? 요즘 차남가는 되는 일이 없었어요. 이부인이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떻게 아씨께 말이라도 넣어 평안부 좀 얻을 수 없는지 물어봐달라고 한다더라고요. 체면 깎여 창피한 것도 한두 번이죠, 아무리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죠!”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하로를 불렀다.

    “이 장부들을 우선 정리해줘. 나중에 셋째 숙모님께 말씀을 드려서, 점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내보낼 사람들을 내보내고, 남길 사람들은 남기게.”

    자신에게 믿음을 보이는 지온의 모습에 하로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네, 아가씨.”

    뒤이어 지온은 의운을 불렀다.

    “넌 본가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안부 인사를 드리고, 요즘 우리 상황을 말씀드리고 와.”

    “네, 아가씨.”

    시녀들에게 할 일을 정해준 지온이 몸을 일으켰다.

    “서아야, 난택산방에 가자.”

    차남가에서 이리 눈치 있게 나와 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신이 가진 이 뒷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럼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꽉 붙들고 있어야지.’

    * * *

    칠월칠석이 지났지만, 날은 시원해지기는커녕 더욱 더워졌다.

    유신지는 공문서를 펴놓고 부들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주변엔 얼음 담긴 대야가 놓여 있었지만, 더운 기운을 물리치진 못하고 있었다.

    “수박 드세요! 수박이요!”

    밖에서 관졸이 소리쳤다.

    “공자님,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튀어 오르듯 일어난 부주가 알아서 밖으로 나갔다.

    유신지는 제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즘 참 빠릿빠릿해. 입도 방정맞지 않고. 전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곧이어 수박이 올라왔다.

    문서를 옆으로 치운 유신지와 부주는 문가에 앉아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관졸들이 수박을 안고 수다를 떨며 지나갔다.

    “어쩌다 갑자기 영전을 했다냐?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영전하는 건 규정에도 안 맞잖여!”

    “향시 보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었지, 뭐! 폐하께서 선례를 깨시면서까지 봐주신 게 아니면, 가문에서 쫓겨난 사람이 어디 도성에 와서 과거를 봐, 보길?”

    “그러게나 말이여!”

    본래 아무 생각이 없었던 유신지는 우연히 들은 ‘가문에서 쫓겨난 사람’이란 말에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 이야기를 하는 겐가?”

    흠칫한 평사(評事) 두 사람이 큰 수박을 안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어이쿠, 유 추승 나리를 뵙습니다!”

    유신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주에게 작은 걸상을 가져오라 시켰다.

    “앉게, 같이 먹자고.”

    그의 방엔 얼음이 들어간 얼음 대야가 몇 개 더 있었기 때문에 평사들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까 이야기하던 사람이 누군가?”

    평사 중 하나가 금방 대답했다.

    “형부에 있던 루 낭중입죠!”

    유신지가 수박을 한 입 먹고는 다시 물었다.

    “그가 영전했단 말인가? 어디로 갔나?”

    ‘설마 지난번에 미운털이 박혀서 이름만 영전이고 유배 간 건 아니겠지?’

    “통정사(*通政司: 공문서의 처리를 담당하는 기관)입죠.”

    “풉……!”

    유신지의 입속에 있던 수박이 앞에 앉은 평사 둘에게 분수처럼 뿜어졌다.

    “아이고, 미안하네! 미안해!”

    부주가 급히 수건을 꺼내 유신지 대신 평사들의 몸을 닦아주며 내심 속으로 한탄했다.

    ‘아니, 공자님도 정말 왜 이러시는 거야? 차이셨으면 그만 마음을 접으셔야지. 아직도 루 대인 소식만 들으면 이렇게 안절부절못하시니…….’

    유신지가 입을 쓱 닦고는 다시 물었다.

    “통정사? 통정사 어느 자리인가?”

    “당연히 통정(通政)아니겠습니까?”

    평사 중 하나가 대답했다.

    ‘그 자식이 벌써 사품이라고? 영전하는 속도 보소?’

    더구나 통전사는 안팎으로 올라오는 각종 장주(*章奏: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던 글)들을 처리하는 곳이기 때문에 황제와 아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야말로 친신(親臣)이나 오르는 자리였다.

    혹여 그가 황제에게 밉보일까 걱정을 했더니, 도리어 황제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된 게 아닌가!

    “어떻게 영전을 한 거지?”

    유신지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평사 두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중 하나가 슬쩍 입을 열었다.

    “유 추승 나리. 루 대인과 친하셨던 것 같은데 어찌 모르고 계셨습니까?”

    “내가 그자와 친하긴 뭐가 친하다고 그러나!”

    유신지는 손을 내저으며 연신 부정했다.

    “거 그자가 만날 정색하고 돌아다니기에 장난이나 쳐봤던 게지.”

    “그런 것이었습니까?”

    평사 두 사람이 의심의 눈빛으로 유신지를 바라보는 동안, 부주는 동정 어린 눈으로 제 주인을 보고 있었다.

    ‘왔네, 왔어. 역시 그거네. 확실하네.’

    유씨 가문의 친한 시녀 누님이 부주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실연한 사람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말이다.

    첫 번째, 분노단계다.

    자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임에도 변심한 상대방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단계 말이다.

    두 번째가 부정단계였다.

    현실을 인정할 용기가 없어, 상대방과의 관계를 부정하며, 자신이 상대방을 좋아하는 것을 부정하는 단계였다.

    그날 공자님이 돌아오는 내내 화를 내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분명 첫 번째 단계인 분노단계를 거친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금 루 대인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을 보니, 누님이 말하던 두 번째 단계인 부정단계로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어휴, 공자님! 별별 친우분들이 다 있으신데 하필이면 루 대인 같은 분을 좋아하셔서는……. 장난은 무슨, 장난입니까!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쇼!’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들 하는가?”

    유신지가 다른 수박을 먹으며 다시 물었다.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있겠습니까? 루 대인은 폐하께 늘 총애받으셨으니…….”

    “그렇쥬.”

    다른 평사가 은근히 비꼬며 말했다.

    “폐하께선 전부터도 루 대인을 아주 중히 봤잖습니까. 뭐든 중한 사건만 있으면, 루 대인께 모두 밀어주고…….”

    그게 아니었다면 다들 그를 멀리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지난 몇 년간 그가 황제를 도와 얼마나 많은 부끄러운 일을 했을지 알 수 없었다. 본래 대리시로 왔어야 할 많은 사건이 모두 그에게 갔던 것이다. 황제의 권력이 나날이 커지는 지금, 그도 큰 공로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그의 빠른 영전도 꽤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처음엔 루안의 경력과 경험이 너무 없으니, 황제는 우선 그를 형부에 두었겠지만,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은 지금은 당연히 데리고 올라가지 않겠는가?

    “벌써 통정사에 들어갔으니, 몇 년 안에 루 재상이라 불리는 날이 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유신지가 허허, 웃었다.

    “그게 그리 쉽겠나. 외임도 나가지 않았는데…….”

    평사가 말했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매번 규정을 이리 다 깨고 가는 분인 것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수박을 다 먹은 평사들이 돌아간 뒤에도 유신지는 계속 앉아 생각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칠월칠석 밤에 루안 그 자식은 대체 어떤 말로 폐하의 심기를 달랜 거지?’

    아무리 그래도 강왕비는 황제의 친어미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불구덩이로 밀어 넣어버렸는데…….’

    유신지는 진짜 아첨꾼이 되려면 그것도 실력이 필요하단 생각을 하며, 자신은 도저히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퇴근할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그 생각으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때, 부주가 따뜻한 목소리로 그를 챙겼다.

    “공자님, 조방궁에 가서 좀 앉으시겠어요?”

    전엔 제 주인이 지온 소저와 루 대인 중 누구를 좋아하는 것인지 부주는 헷갈렸었다. 그러나 이젠 확실하지 않은가? 공자님은 루 대인을 좋아했고, 지온 소저는 그저…… 친우였을 뿐이었다. 최고로 친한 친우!

    시녀 누님이 알려주시길, 이럴 땐 자주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친우와 수다를 떠는 것보다 더 마음이 풀리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잠시 부주의 말에 고민하던 유신지가 고개를 저었다.

    “됐다.”

    그는 어떻게 다시 지온을 봐야 좋을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 댁으로 돌아갈까요?”

    “응.”

    유신지를 태운 마차가 어느 정도 길을 달렸을 때쯤, 유신지가 갑자기 소리쳤다.

    “먼저 루 대인 집으로 가자!”

    깜짝 놀란 부주가 소리쳤다.

    “공자님, 무슨 짓을 하려고요!”

    유신지가 왜 그리 놀라냐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 짓도 안 해. 가라면 가!”

    “……네.”

    * * *

    마차가 루안의 저택이 있는 골목길 앞에 도착하자, 유신지가 마부에게 마차를 세우게 했다.

    유신지는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창문만 연 채 루안의 집만 뚫어질 듯이 쳐다보았다.

    부주는 그 모습에 울상이 되었다.

    ‘끝났네, 끝났어.’

    시녀 누님이 두 번째 단계만 잘 지나가면 천천히 좋아질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공자님은 루 낭중의 집을 지나가기는커녕 몰래 찾아와 훔쳐보고 있었다. 이건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시 잘해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를 어쩌면 좋아! 루 대인은 아무 마음 없는 것 같던데, 이대로 공자님이 집착의 길로 빠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 * *

    시간이 조금 지나자 루안이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본 유신지가 다급하게 말했다.

    “숨어, 숨어!”

    주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던 부주는 마부를 시켜 마차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다.

    루안은 그들이 있는 방향으론 시선조차 보내지 않고, 제 사람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루안의 시위들이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공자. 외부에 마차 한 대가 서 있어 제가 지켜보니, 저희를 감시하는 듯 보였습니다.”

    루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런데 그걸 쫓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건가?”

    시위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공자께서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일부러 공자를 기다리고 계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누구지?”

    “유 추승이었습니다.”

    “뭐, 뭐라고?”

    야우가 끼어들며 펄쩍 뛰었다.

    “공자님이 오셨는데 나타나서 인사도 안 하다니! 도둑고양이도 아니고, 몰래 찾아온 게 뭔가 의도가 있는 거 아닐까요?”

    한등이 야우를 향해 눈을 홉떴다.

    “뭔 의도가 있어요? 그냥 공자님이 보고 싶어 왔나 보죠!”

    “그럼 찾아와서 보던지! 왜 숨어? 왜 숨어?”

    “부끄러웠나 보죠, 뭐.”

    한등이 얼버무리자, 야우가 폭발했다.

    “다 큰 사내가 뭐가 부끄럽다고……! 공자님, 제가 나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가만히 생각하던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됐다. 숨고 싶으면, 숨어 있으라지.”

    한등이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네! 공자님 말만 따릅니다!”

    그리고 한등은 크게 소리치며 물었다.

    “밥 먹읍시다, 밥! 오늘은 뭐 먹죠?”

    * * *

    한편, 집 밖에 있는 유신지의 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온종일 정신을 딴 곳에 팔고 있던 탓에 점심도 적게 먹지 않았던가.

    부주가 권했다.

    “공자님, 그만 돌아갑시다. 배고프시잖아요.”

    손을 내저은 유신지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는 접선을 펴 흔들었다.

    그리 더워하면서도 마차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부주는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저도 배가 고픈데요.”

    부주의 말에 짜증이 난 유신지가 왈칵, 역정을 냈다.

    “굶어! 공자인 나도 안 먹는데, 네 배 곪는 걸 생각한단 말이냐!”

    부주가 울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죠. 오래 굶으시면 몸에 안 좋단 말입니다.”

    “그럼 가서 배 채울 수 있는 먹거리나 사오거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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