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50)화 (150/385)

150화. 불길한 사람이야

웃음을 거둔 강왕세자가 차갑게 말했다.

“쓰러지신 것이 아니면 되었습니다, 어머니. 짐을 챙겨두세요. 내일 바로 떠나시게끔 모시겠습니다.”

다급해진 강왕비가 그의 소매를 붙들고 늘어지며 애걸복걸 애원하기 시작했다.

“담아, 그래도 내가 어미가 아니냐! 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가 있는 게야!”

강왕세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덟째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기회가 왔는데, 소중하게 생각하셔야지요.”

강왕비는 이 상황에 미칠 노릇이었다. 요의를 보고 싶다, 안달복달 외쳐댄 것은 요의를 이곳으로 데려오려는 뜻이었지, 자신이 장원으로 가겠다는 소리가 절대 아니지 않은가! 장원을 아무리 잘 꾸며도 어디 왕부보다 좋을 리가 있겠는가?

그곳에서 누가 자신이 입는 옷들이며 걸치는 보석들을 알아 봐주며, 누가 자길 받들어 모시겠는가?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결국 강왕비는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어쩜 그리 잔인할 수가 있느냐! 내가 네 어미다! 말을 안 듣는 건 몰라도, 이리 날 모질게 대하다니, 네 아비가 이런 것을 알기라도 하면…….”

“그럼 어머니, 아버지를 뵈러 가시겠습니까?”

강왕세자가 그녀의 말을 중간에 잘라 먹고는, 음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봉지에 있는 제 남편을 떠올린 강왕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번 일은 그냥 지나갈 수 없게 됐습니다. 대장공주가 일을 크게 벌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머니께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넘어가시면 대장공주가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태후가 그저 넘어가겠습니까? 정국공부는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보호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장원으로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시다면 봉지로 가십시오. 돌아가시면 여전히 고고하신 왕비마마로서 괴롭히고 싶은 사람들, 마음껏 괴롭히시고 아무것도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으시지요?”

당연히 싫었다.

그 시골 촌구석이 도성과 비교가 되겠는가?

더구나 부군인 강왕 역시 언젠가는 도성으로 돌아올 사람이 아닌가? 그럼 자신 혼자 봉지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럼 버려진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강왕비는 혼인 당시 그런 식으로 혼사가 이루어진 것 때문에 남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 봉지에 홀로 버려진다면, 왕비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안 된다! 담아, 어미는 돌아갈 수 없…….”

“그럼 장원으로 가세요!”

강왕세자가 차갑게 말했다.

“일 년 반쯤 지나, 이 일이 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흐려지면 어머니도 다시 도성으로 돌아오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강왕비가 애걸했다.

“안가면 아니 되느냐? 앞으로 장원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 절대 나가지 않을 테니, 제발……! 그렇다면 내가 도성에 없는 것과 같지 않으냐?”

“안됩니다.”

강왕세자는 그녀의 마지막 희망을 불살랐다.

“어머니, 더 기운 빼지 마세요. 내일 움직이셔야 합니다.”

“담아, 담아!”

강왕세자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 * *

강왕세자비 오씨가 심복에게 장원을 잘 살피라며 단단히 이르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여보…….”

강왕세자비가 불안한 얼굴로 강왕세자의 뒤를 쫓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괜히 사람들에게 말이라도 나오는 게 아닌지…….”

강왕세자가 덤덤하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 말하든 상관없소. 이번 일은 분명 좋지 않은 일이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소. 이번에 어머니를 도성 밖으로 보내고 나면 더는 어머니 때문에 우리가 발목을 잡히는 일도 없을 거요!”

* * *

세자비는 드디어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있게 되었다.

멍청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편하면서도 힘든 일이었다.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는 강왕비의 성격 덕택에 편하기도 했지만,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명분에 얽매여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단 것을 알면서도 참아야 했기에 힘들기도 했다.

남편도 오랜 시간을 버틴 끝에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마음이 편해져 그대로 잠에 빠졌던 강왕세자비가 눈을 뜬 것은 깊은 밤중이었다. 그런데 옆에 누워있어야 할 강왕세자가 보이질 않았다.

순간 그녀의 가슴이 싸늘하게 쓰려 왔다.

‘갑자기 그때 그 시녀 생각이 나신 건가?’

미처 쓰라린 느낌이 가시기도 전에 창가 곁에서 강왕세자가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긴 채로 의자에 앉아 비연호(*鼻烟壺: 코담배 통)를 쓰다듬는 것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여보?”

세자비는 몸을 일으켜 침상 아래로 내려섰다.

“아직 어두운데, 왜 일어나셨어요? 제가 깨운 것이에요?”

고개를 든 강왕세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지씨 가문의 큰소저라는 지온 소저라는 사람 말이오. 어떤 사람이오?”

멈칫한 그녀가, 지온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주…… 훌륭한 규수예요. 외모도 출중하고요.”

“듣자니 여덟째가 그 아일 좋아했다던데?”

고개를 끄덕인 세자비는 요의가 정국공부에서 보였던 모습을 이야기해주었다.

“사실 전 도련님께서 그 후로 지온 소저에게 매달릴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럴 시간도 없이 태후와 충돌하고 도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던 거죠.”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요의에게 생긴 일이 그 소저와 관련이 있단 아첨꾼의 말을 믿으셨던 거로군.”

“네, 그렇게 된 거예요.”

“조씨 가문의 외숙모 쪽도 그 소저와 관련이 있다고?”

강왕세자비가 대답했다.

“그 일도 여쭤봤는데, 조방궁 내 알력다툼에 조카분이 끼었던 모양이에요.”

“아무튼, 그 소저가 연관되어있던 것이고?”

“네.”

강왕세자비가 말했다.

“외모가 너무 출중한 것이 문제겠지요. 아름다운 꽃엔 나비며 벌이 많이 꼬이는 법이니까요.”

강왕세자는 비연호를 열어 향을 맡았다. 연초의 강한 향이 코를 타고 오르자 그의 머리가 더욱 맑아졌다.

“그 소저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으신가요?”

강왕세자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듣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소. 그런데 그 소저와 만나기만 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군.”

세자비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앞으로 당신이 그 소저를 좀 눈여겨보는 게 좋겠소.”

강왕세자가 차갑게 말했다.

“불길한 사람이야.”

* * *

입궁 한 번에 지온의 마차는 갖가지 진귀한 것들을 잔뜩 싣고 돌아왔다.

첫 대면 인사에 받은 선물은 말할 것도 없고, 황궁에서 하룻밤 묵고 떠나는 날에 태후가 궁에 공주가 없어 놔둬 봐야 낭비라며 이것저것 많이 챙겨 준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놀란 지온을 위로한다며 큰 상까지 내렸다.

시녀들은 세상밖에 더 큰 세상이 있다며 한 상자 가득 담긴 진귀한 노리개들을 보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지온은 귀한 보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궁에서 챙겨 온 꽃등만 조심조심, 세심하게 닦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겹겹으로 된 꽃잎이 꼭 과거 그날 서원에 띄웠었던 연등 같았다.

활짝 웃는 얼굴로 서아가 말했다.

“아가씨. 나중에 아가씨가 시집가실 때 패물들로 이것들을 챙겨 가면 체면도 살고 정말 좋겠어요.”

하로는 걱정이 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걸 어디 두지? 방도 겨우 이게 다고, 지키는 사람도 없는데…….”

“걱정하지 마!”

나선 이는 의운이었다.

“물건 놔두는 방이 앞으로 내 침방이야. 아가씨, 제가 아침마다 선고님 두 분이랑 같이 권법 수련을 하고 있어요! 아주 힘이 강해졌다고요!”

지온은 의운에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주었다.

“그래! 앞으로 집 지키는 일은 네게 맡기마.”

의기양양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이던 의운이, 돌연 멈칫하며 지온에게로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가씨, 전 멍멍이가 아니라고요!”

지온이 빙긋, 웃었다.

“난 그렇게 말 안 했는데?”

“그래도 그런 뜻이었잖아요…….”

다 같이 까르르 웃고 있을 때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 사저, 지 사저!”

서아가 나가보자 어린 선고였다.

“무슨 일이죠?”

“사저의 가문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 * *

사방전에는 지씨 가문의 위씨 부인이 와있었다.

위씨는, 황궁에서 열린 연회가 끝나고 지온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 태후가 그녀를 황궁에서 하루 머무르게 한 것도 모자라 온갖 진귀한 선물까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제는 한술 더 떠 태후보다 더 많은 선물을 하사했다는데, 내시들이 마차에 옮겨 실은 물건들의 무게가 어찌나 무겁던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며 모두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다.

소문이 퍼지자 지형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출근도 하지 않고 방안을 서성거리던 그는 부인인 위씨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겠소? 다른 이들에겐 주지 않고, 왜 그 아이에게만 선물을 내린단 말이오?”

간밤에 황궁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비밀에 부쳐진 상황이었다.

설령 비밀에 부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은 회영왕이 연회 중에 추태를 부렸다는 정도가 다였다.

그나마 머리 좀 쓴다는 이들이라고 해봐야, 강왕비가 별원으로 요양을 떠났다는 사실에서 무언가를 추측하는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결론적으로, 지온과 조금의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지온이 황제로부터 큰 상을 받게 된 지금, 이것은 모두에게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상황이 된 것이다.

거기에 대장공주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황제에게 했던 그럴듯한 말들까지 더해지자 모두의 상상은 한곳으로 향해갔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은 위씨가 조용히 대꾸했다.

“삼 년째 후사 소식이 없어 폐하께서 후궁을 들이신단 소문이 있어요.”

긴 침묵 끝에 지형의 입이 열렸다.

“그 아이 외양이야 집안에서 가장 출중하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위씨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딸 지서가 예쁘다고 말하곤 했지만, 정말 외적인 아름다움을 놓고 비교를 하면 지온과 차이가 큰 것은 사실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지형은 끝내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 점포들 다 돌려줍시다!”

“노야!”

위씨는 죽어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소문일 뿐인데,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 사실이면 어쩔 거요!”

지형이 말했다.

“그러다 정말 그 아이가 궁으로 들어가면 진짜 늦소!”

위씨는 가진 것을 놓기가 싫었다.

“설사 그게 그저 소문이라 하더라도, 이미 지온이 대장공주와 엮인 것은 사실 아니오? 그걸로 끝난 거요. 가서 고개 한 번 숙이고 오시오. 자존심이 밥 먹여주오? 우리 지서도 혹시 그 덕을 봐서 좋은 가문과 혼사를 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 않소.”

결국, 그렇게 위씨는 조방궁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사방전의 두 선고는 위씨에게 아주 공손했지만, 지온만 생각하면 위씨는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 것 같았다.

‘고 계집이 절대 그냥 넘어갈 깍쟁이가 아닌데. 이제 본인이 더 잘나간다고 가문을 핍박이라도 하는 거 아냐?’

이윽고 서아가 들어왔다.

“이부인.”

위씨가 서아의 뒤를 흘끔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희 아가씨는 어디 있느냐?”

서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가씨께선 궁에 다녀오셔서 피곤하신지 쉬고 계십니다. 제가 감히 깨울 수가 없었어요. 무슨 일이신지 저희에게 말씀해주세요. 반드시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해드리겠습니다.”

위씨는 상자를 만지작거리는 제 손이 어쩐지 뜨겁게 느껴졌다.

“내가 지온이에게 줄 것이 있어 가지고 왔으니, 직접 얼굴을 보고 전해주도록 하마.”

그러자 서아가 예의바르지만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게 입을 열었다.

“저희 아가씨 습관을 생각하면, 밤이 되어야 일어나실지도 모릅니다. 부인, 아가씨께서 전권을 제게 맡기시고 해결하라 하셨으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더는 방법이 없어진 위씨는 상자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것들은 점포의 주인장들과 맺은 계약서들이다. 어제 막 정리한 것들이고 혹시 지온이가 급할까 싶어 바로 가지고 왔다.”

서아의 눈에 놀란 빛이 어리자 민망해진 위씨가 예의상 몇 마디 말을 던졌다.

“큰아이를 오래 못 보지 않았느냐? 집에서 다들 보고 싶어 하니 시간이 있으면 자주 놀러 오라고 해라. 그 아이 방은 여전히 깨끗하게 정리해둔 상태다!”

이에 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아는 자신이 문을 나서기 전, 자신과 아가씨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 * *

“숙모가 선물을 주려고 찾아왔다면, 믿을래?”

“설마요!”

서아가 믿을 수 없단 듯 말했다.

“이부인이 얼마나 속이 좁은 사람인데요!”

지온이 웃더니 말했다.

“가서 우리가 폐하께 받은 상자에서 목걸이 두 줄이랑, 평안부를 챙겨 가. 만약에 숙모가 아무것도 없이 인사만 하시면 너도 답례품을 드리지 않아도 돼. 숙모가 혹시 귀한 물건을 선물로 주시면 목걸이를 답례로 드리고, 혹시 집안 재산을 돌려주시면 평안부를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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