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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49)화 (149/385)
  • 149화. 이간질이라 생각하십시오

    이미 상황에 심상찮은 구석이 있단 것을 느끼고 있었던 태후가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회영왕은 정말 저들이 혼절시킨 것인가?”

    서로 마주 본 지온과 대장공주는 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옆에 있던 매고고가 슬쩍 무릎을 굽히더니 입을 열었다.

    “마마, 노비가 그리한 것이옵니다.”

    그제야 눈앞이 트이는 듯, 태후는 일련의 상황들이 구슬 꿰어지듯 줄줄이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먼저 눈치를 채고 준비했던 게로구먼.”

    매고고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아가씨께서 노비를 부르셨습니다. 강왕비가 하는 일이 어찌나 허술하고 구멍이 많은지, 조마조마하여 저희가 도움을 준 것이지요.”

    태후가 감탄했다.

    “어찌 이리 담이 큰 것이야. 그러다 큰일이라도 벌어지면 어쩌려고?”

    대답은 지온에게서 나왔다.

    “만무일실(萬無一失), 세상에 빈틈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금의 위험부담조차 질 수 없다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도 없을 것입니다.”

    지온의 말을 곱씹던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어요.”

    대장공주가 말을 받았다.

    “일리뿐인 줄 아십니까? 어디서 배운 겐지, 이 도리, 저 도리가 툭툭 나오는데, 저도 이 아이를 이길 수가 없어요.”

    웃음이 절로 나오는 광경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하구먼! 전에 자네가 날 두고 그렇게 도리를 따지지 않았나? 이젠 자네가 들을 때가 된 게지!”

    * * *

    유신지가 느끼기에, 지금 황제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유신지는 가슴이 답답했다. 다들 루안이 황제 옆에서 딸랑이를 잘 흔들어 폐하의 심복이 되었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 일은 황제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 분명한데, 어찌 그런 일을 하고 왔단 말인가?

    ‘물론, 사전에 지온 소저가 연루된 일이란 걸 알았다면 나도 분명 궁녀를 찾아냈겠지.’

    하지만 자신과 루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은 뒤에 유씨 가문이라는 뒷배가 있기에 황제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고, 심지어 제 의견을 고수하는 것이 청렴한 명성을 얻기에 더 좋을 지경이 아니던가?

    그러나 루안은 이미 루씨 가문과 척을 지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황제에게까지 밉보이면, 그가 기댈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지온 소저를 돕는 것이 그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유 추승, 가시지요.”

    귓가에 들리는 재촉하는 소리에 루안에게서 시선을 거둔 유신지가 미소를 지으며 내시에게 공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어서방으로 불러 대충 격려하는 말 몇 마디를 던지곤 유신지를 먼저 돌려보낸 상황이었다.

    유신지도 황제가 진짜 남기고 싶었던 이는 루안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루안이 황제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한 것 때문에 그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지 않을지, 유신지로선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들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출궁한 유신지는, 유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마차에 앉아 루안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마음에 있는 의문을 풀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 * *

    그리고 그때, 어서방에선 유신지의 걱정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황제는 내시들마저 모두 물리고 당장 루안에게 달려들 듯이 물었다.

    “왜 그리 한 건가! 당장은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짐이 일단은 뒤로 미뤄둘 수 있었던 일이었어! 그때 다시 방법을 동원해 숙모님께 빠져나갈 길을 열어드리면 되는 것이었는데, 굳이 지금……!”

    “폐하!”

    루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 신하 된 자로서 다소 무례한 행동이라 할 수 있었지만, 루안이 그리하니 오로지 진중함만이 느껴졌다.

    “더는 그리 하시면 아니됩니다.”

    이에 황제가 멍하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소리 없는 탄식을 뱉은 루안이 물었다.

    “강왕비께 길을 열어드린 후에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다음번에 더 큰 일을 벌이시면, 그 후에 또 폐하께선 다시 그 난장판을 수습하실 것입니까? 폐하, 조방궁을 무속과 엮어 모함하려던 사건이 지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지난번엔 증거가 없으니 대장공주께서 강왕비께 살길을 내드렸지만, 이번엔 단서가 이리 명확한데 놓아 주시겠습니까?”

    황제가 입을 뻐금거렸다.

    “폐하께선 이미 강왕비마마로 인하여 여러 번 체면을 구기셨습니다.”

    루안이 매몰차게 입을 열었다.

    “거기다 강왕부의 요의 공자께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강왕비마마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있는지요? 마마께서 그리 방임하여 요의 공자를 키우지 않으셨다면, 그분이 잘못을 두 번 세 번 저지르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그렇게 가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매번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떨구는 것은 결국 폐하의 체면 아닙니까!”

    황제는 말이 없었다.

    그저 루안에게 정곡을 찔려 부끄러운 마음뿐이었다.

    “지난 삼 년간 폐하께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삼 년 전, 강왕부의 사람들은 폐하를 황궁에 홀로 두고 가볍게 일어나 가버리셨지만, 황궁에 남아 계셨던 폐하께서 마주해야 했던 이들은 노회한 신하들이었습니다. 노신들은 조금만 성에 차지 않아도, 폐하가 선제 폐하나 죽은 선대 태자 전하보다 못하단 눈길로 폐하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괴로웠던 폐하를, 떠나있던 그분들이 이해하고 통감할 수 있답니까?

    그분들이 분명 남겨 놓는다고 했던 쓸 만한 수족들은, 폐하의 지휘에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도성으로 다시 돌아온 강왕부 분들은 도움도 안 될 뿐 아니라, 도리어 폐하의 발목만 잡고 있습니다. 폐하, 정말 이대로 계속 가실 것입니까?”

    “무엄하다!”

    황제가 눈을 번득이며 낮게 소리쳤다.

    “네가 지금 짐과 강왕부를 이간질하려는 것이냐?”

    “신은 폐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루안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강왕부가 어떠한지, 신은 관심이 없습니다. 신은 그저 그들이 폐하의 발목을 잡고 있어 해가 될 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뿐입니다. 이번 기회에 강왕비마마를 제대로 해결해두시면 앞으로 폐하의 체면이 매번 깎여 나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들을 위해 뒷수습을 하셔야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이 이간질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네, 폐하. 그리 여기시지요.”

    * * *

    루안이 궁을 나와 막,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옆쪽에 서 있던 마차의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머리를 반쯤 내민 유신지가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다.

    “루형, 이리 오시오!”

    루안은 고삐를 다시 한등에게 건네고는 유신지의 마차에 올랐다.

    “뭐 하는 거요? 날이 너무 늦었소. 나도 집에 가봐야 하오.”

    “내가 데려다주겠소.”

    유신지가 마부에게 말했다.

    “루 대인 댁으로 가자.”

    마차는 천천히 움직여 궁문을 나섰다.

    평안대로를 다 지날 때까지 유신지가 입을 열지 않자, 루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말할 생각이 없으면 마차 세우시오.”

    그러고는 루안은 마차에서 내리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에이!”

    그를 붙잡은 유신지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루 형, 지온 소저와 대체 무슨 관계요?”

    다시 마차에 앉은 루안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 질문은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유신지가 질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못할 게 뭐가 있어서?”

    루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에게 질 것이 두려워서지.”

    루안이 이리 말하니 유신지는 당연히 기분이 상했다.

    “어이, 루 낭중. 너무 자신만만하네? 내가 언제 자네에게 져본 적이 있었나? 자네는 과거에서 네 번째, 난 세 번째인 탐화였지. 자네보다 한 등수가 높아. 그리고 자네는 낭중, 난 추승으로 관직은 비슷하지만, 형부는 대리시의 지휘를 받잖아. 승자 그 자체인 내가 뭐가 두렵다는 거지?”

    “두려운 게 없는데 뭘 그리 고민하지?”

    루안이 마차 벽에 등을 기대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유신지가 대꾸했다. 

    “그런 질문이, 여인에겐 영 실례가 될 수 있어서 말이지.”

    이유를 참 잘도 가져다 붙이는 유신지였지만,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에겐 소문이란 것이 워낙 치명적이니, 남녀 관계를 묻는 유신지의 질문이 실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유신지가 루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은?”

    얼굴에 미소를 거둔 루안은 빙빙 돌리지 않고 진지하게 대답해주었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네.”

    “…….”

    “자넨 아닌가?”

    “…….”

    유신지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하게 헝클어져, 그의 표정 역시 비뚤어졌다.

    그는 루안의 마음을 확인하여 조금 괴로웠으며, 제 마음이 들켜 부끄럽고 어색하기까지 했다.

    루안이 다시 웃음을 보였다.

    그가 유신지 앞에서 이리 웃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다른 부분에선 유신지, 자네가 날 모두 이겨도 돼.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자네는 날 이길 수 없네. 요즘 우리가 가깝게 지낸 시간도 있으니, 한 마디 해주지. 일찍 마음을 접는 게 좋을 거다.”

    유신지가 강하게 항변했다.

    “접기는 뭘 접어! 난 뭘 할 생각도 없었거든!”

    “없었으면 가장 좋고.”

    무의식중에 서로 말도 놓은 두 사람이었다.

    집에 도착한 것을 본 루안은 마차의 문을 두드려 마부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루안이 말했다.

    “몇 개월이나 다른 말도 없이 내게 들러붙더니…… 대공자,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나인가?”

    유신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 자택으로 들어가는 루안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유신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루안의 뒤통수에 대고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루안! 자아도취도 병이다! 본 공자는 남색이 아니라고!”

    유신지의 시종인 부주가 마차에 올라 조용히 유신지를 쳐다보았다.

    약이 바짝 오른 유신지가 역정을 냈다.

    “그 눈빛은 뭐지?”

    “아닙니다.”

    언제나 유신지와 말장난하길 좋아하던 부주가 이번엔 공손하게 대답했다.

    “공자님, 그만 돌아갈까요?”

    유신지는 화를 삭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돌아가자.”

    얌전히 자리에 앉은 부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자님이 방금 루 대인에게 거절을 당했으니 분명 마음이 크게 상하셨을 거야. 안 그래도 아프신 분, 더 건드리지 말자.’

    * * *

    강왕부.

    황궁에서 데려온 강왕비를 보는 강왕세자의 얼굴은, 그늘이 지다 못해 고드름이라도 열릴 듯 차가웠다.

    시비들을 물린 강왕세자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제대로 살피지 못해 어머니께서 그런 모함을…….”

    혼절한 상태여야 하는 강왕비는 제 큰아들의 안색을 살피고 싶어 몰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강왕세자가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세자비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 편에서 말할 거 없소. 누가 어머니를 모함했겠소? 어머니가 능력도 없이 다른 이를 모함하려 하셨던 게지!”

    그 말을 들은 강왕비는 분노했다.

    ‘저게 내 아들이란 말인가? 제 부인만 아낄 줄 알지, 감히 제 어미를 향해 어찌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단 말인가! 세상에 부모 없이 태어난 이가 어디 있다던가?’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강왕비를 바라보며, 강왕세자가 더욱 조롱하듯 말했다.

    “지난번 외숙모의 일도 어머니껜 그다지 큰 깨달음이 되지 않았나 보오. 굳이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뜨거운 맛을 보셔야 아시겠다니,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어머니 소원을 들어드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가 세자비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 내일 장원에 들리시오. 어머니께서 지내시기 편하시려면 정리를 해둬야 할 테니 말이오.”

    그 말에 더는 쓰러진 연기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강왕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욕을 쏟아냈다.

    “이 불효자식! 감히 이 어미를 장원으로 보내려 해!”

    강왕세자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어머니, 혼절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그의 말투엔 조롱과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비수가 잔뜩 숨겨진 강왕세자의 미소 앞에 강왕비는 움츠러들었다.

    “네, 네 녀석이…….”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자신과 달라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매번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를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와 질책했던 이는 남편인 강왕이 아니라 큰아들이었다.

    그러나 강왕은 언제나 큰아들 편이었다. 강왕비가 큰아들에 대해 강왕에게 고자질을 하면, 부자가 함께 자신을 질책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며, 강왕비의 마음엔 큰아들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이 남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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