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홀대
불안과 근심 가득한 태후의 눈으로 온갖 감정들이 스쳤다. 슬픔과 비통, 수치와 굴욕의 눈빛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태후가, 끝내 마음을 정한 듯이 이를 악물며 나섰다.
“폐하, 이 일로 대장공주에게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겁니다!”
태후의 발언에 매우 놀란 황제가 태후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짐이 황위에 오른 후로 태후는 줄곧 바깥일엔 그다지 관여하지 않던 이가 아닌가?’
그런데 이번만큼은 태후의 태도가 무척이나 고집스러웠다.
“대장공주는 작금 황실의 유일한 공주입니다. 더구나 황상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내린 모든 상마저 모두 물린 분이 아닙니까. 그런 공주가 어렵게 온 황궁에서 다른 이에게 이런 모욕을 당했으니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장공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말씀을 굳이 왜 하세요. 제가 부귀영화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까? 영화로운 삶을 안 살아본 것도 아니고, 폐하께선 이미 이 고모에게 할 수 있는 만큼 다 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이보다 더 바라는 것도 없어요.”
“그리 말을 하면 되는가. 황상의 마음이 그렇다 해도, 주변에 있는 이들은 폐하의 마음을 모르잖는가.”
태후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황상께서 보위에 오르자마자 자네가 조방궁으로 떠나면서 안 그래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황상께서 옛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 않겠는가?”
대장공주가 웃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겠습니까? 너무 멀리 가셨어요.”
그러나 태후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사람의 입은 두려운 법이네. 여럿의 입은 쇠도 녹이는 법이야.”
두 사람의 대화는 언뜻 듣기엔 황제를 위하는 듯 보여도 실은 그의 약점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말이었다.
황제는 제 의견을 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후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모님은 짐이 내린 모든 것을 사양하신 분이신데 이런 수모까지 당하시면 안 되지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이 사건은 조사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황숙도 혼절하여 본 이가 없고, 지온 동생 역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저쪽에서 호 공공이 나타났다.
“폐하.”
고개를 조아린 그가 보고를 올렸다.
“길잡이를 했던 궁녀를 찾았사옵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황제는 어물쩍 넘어가려 했으나 이젠 무마할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황제는 그저 흠칫했을 뿐이었지만, 강왕비는 급기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어찌 찾은 것이냐?”
호은이 대답했다.
“루 대인과 대리시의 유 추승께서 찾으셨사옵니다. 두 분께서는 두 궁 사이에 난 길을 한 번 걸으시곤, 아주 작은 흔적으로부터 해당 궁녀의 특징을 특정해내셨습니다. 그리고 금위군의 도움을…….”
황제는 루안의 일처리가 치밀하단 것쯤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매번 황제가 시키기도 전에 이미 일을 처리하곤 했던 루안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번만큼은 루안의 치밀하고 빠른 일 처리가 황제는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너무 딱 맞춰 치고 들어왔잖은가.’
태후와 대장공주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터라 황제는 눈물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데려와라!”
“네.”
이윽고 내시가 몸이 묶인 궁녀 하나를 끌고 왔다.
그들 뒤로 루안과 유신지가 따라왔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두 사람을 본 지온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
그녀는 사실 황제를 압박해 강왕비에게 창피나 주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해올 줄이야. 루안과 서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은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루안이 자신을 대신해 사건의 핵심 인물을 잡아내다니!
이젠 아무리 황제라도 강왕비를 두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속에 불같은 분노가 치민 황제가 고함을 질렀다.
“고개를 들라!”
내시가 앞으로 달려들어 능숙한 솜씨로 궁녀의 턱을 잡아 위로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태후와 대장공주는 더는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길잡이를 했던 궁녀라더니, 저건 분명 강왕비의 시녀가 아니던가!
“아!”
귓가에 갑작스러운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현비의 음성이 들렸다.
“강왕비께서 혼절하셨습니다!”
대장공주가 조소를 흘렸다.
‘이제 와 어찌할 줄 모르겠으니, 혼절로 마무리를 해보시겠다? 어찌 사람이 어릴 때부터 빛 좋은 개살구야, 실속이 없어. 지금까지도 전혀 발전한 게 없구나, 조여화! 하필 저런 인간이 삼십 년을 그리 멀쩡하게 친왕비로 산 것도 모자라, 이젠 황제의 생모까지 되었으니……!’
태후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리 증명할 사람도 나왔으니 사건에 더는 의문이 없겠지요? 이 일을 어찌 처리할지 본궁은 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궁은 한번 단속해야겠군요. 본래 이곳에서 일하던 궁녀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회영왕이 오는 내내 본 이가 아무도 없다니요? 본궁은, 본궁이 손을 뗀 삼 년간 후궁이 이리 엉망이 되었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이제 손을 보고,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입이 백 개, 천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황제는, 더욱 제 친어미에게 화만 쌓였다.
이미 지난번 친 사고로 대장공주를 조방궁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그보다 더 심각했다. 무려 태후가 궁무(宮務)에 손을 댈 이유를 만들어 주고 만 것이다.
‘사고만 치는구먼, 사고만!’
황제는 태후에게 그저 변명을 늘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황후가 잠시 소홀하였나 봅니다.”
미소를 지은 태후가 입을 열었다.
“황후의 능력이면 본궁 역시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제 신분을 이용해 일을 만드니 황후도 난감할 수밖에요. 어쩔 수 없지요, 본궁이 늙은 것을 핑계 삼아 황후의 힘이 되어주겠습니다.”
“……이해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모후.”
모든 것이 드러났으니, 강왕비의 시녀는 다시 끌려나갔고 강왕비는 나중에 도착한 강왕세자비의 손에 맡겨졌다.
강왕세자비는 상황을 듣고 반쯤 혼이 나갔다. 정말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사고를 칠 수 있단 말인가!
황제가 강왕세자비를 향해 경고했다.
“오씨, 이번엔 제대로 지켜봐야 할 걸세. 돌아가면 더는 문제를 일으켜선 안 되네.”
화를 참아가며 강왕세자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온이의 의심도 모두 해결이 되었으니 본궁도 그만 돌아가야겠습니다. 궁이 저와 상성이 안 맞는 건지, 앞으로 웬만하면 적게 오는 것이 좋겠어요.”
궁에서 자란 사람이 이제 와 궁과 상성이 안 맞는다니, 황제는 그저 낯부끄럽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고모님,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이 조카가 부족하여 고모님과 지온 동생을 그리 놀라게 하였습니다.”
대장공주가 그저 입매만 비틀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황제는 태후만 바라보며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태후가 원만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를 돕고 나섰다.
“여양, 온이를 좀 보게. 이런 모습으로 어찌 궁 밖을 나가겠나? 놀란 조카를 외숙모가 그냥 보내면 섭섭하지. 두 사람, 모두 우리 궁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것은 어떤가? 같이 이야기도 하고 말일세.”
“그것이…….”
대장공주의 마음이 흔들렸다.
“고모님 묵고 가십시오.”
황제가 활짝 웃으며 강권했다.
“지온 동생의 일은 마음 푹 놓으시지요. 짐이 반드시 섭섭지 않게 보상할 것입니다.”
대장공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본궁도 더는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지온의 손을 잡은 그녀가 시비를 불러 태후의 뒤를 따라 청녕궁으로 향했다.
그들을 고개 숙여 배웅하고 나자 잠시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졌던 회영왕이 나타났다.
“폐하, 신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보상은 없는 것입니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황제는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황숙은 왜 황숙이 그런 계략에 말려들었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술이 과해 그런 게 아닙니까!”
그리곤 한쪽에 조용히 기립해 있던 루안과 유신지를 지목했다.
“둘, 짐을 따라오도록!”
성큼성큼 멀어지는 세 사람을 바라보던 회영왕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난 뒤통수 맞고 쓰러졌단 말이야!”
* * *
청녕궁의 침방에 등불이 밝혀졌다.
봉관과 예복을 벗은 태후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이 무척이나 기쁜 날이라는 듯, 대장공주의 손을 붙들고 감격에 겨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봉아, 자네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대장공주가 웃음을 지었다.
“잔소리할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영종의 황후는 일찍 세상을 뜬 데다, 대장공주는 영종의 유일한 공주였던지라, 대장공주는 태어나자마자 영종황제의 사랑을 크게 받고 자랐다.
그래서 몰래 궁 밖을 나가 배워온 시정에서 쓰는 속어들도 감히 입에 올리곤 했었다.
그 후, 명문가인 위씨 집안의 규수였던 지금의 태후가 태자비로 들어오게 되었다.
태후가 허허롭게 웃었다.
“전엔 잔소리하고 싶었네만 지금은 아니네. 오히려 자네가 그러길 얼마나 바라는지 몰라. 얼마나 활력이 넘치는가? 기쁘면 웃고, 화나면 욕하고 말이네.”
그녀의 말에 오히려 대장공주의 표정은 다소 시무룩해졌다.
기쁘면 웃고, 화가 나면 욕하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그러나 지금의 그들에겐 그 평범하고 간단한 일마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늙은 유모가 차를 건네며 위로했다.
“어렵게 만나신 공주마마의 마음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마마. 오늘은 기쁜 날이 아니옵니까?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립다는 말은 왜 해서는, 내 입이 방정이야. 그래도 오늘이 지난 삼 년 중에 가장 즐거웠던 날이 아닌가 싶네.”
그 말에 대장공주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조여화, 그 늙은 요물이 이번엔 혼쭐이 좀 났겠지요! 고것이 이리 나서서 도와주는 바람에 마마께도 청녕궁을 나설 기회가 생겼습니다.”
태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오래전에 마음을 비우고 있었네만, 오늘 밤 일로 깨달았네. 감히 조씨 가문 따위가 뭐라고 자네에게 덤빈단 말인가! 내 지금처럼 청녕궁에서 시간만 보내다가는 그것들에게 바보처럼 당하기만 할 뿐인 게야!”
대장공주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옳다 마다지요! 저도 바로 얼마 전에 그것을 깨달은 참입니다. 오라버니와 부마 모두 떠나 안 계시니 저라도 더욱 통쾌하게 즐기며 살아야지요! 안 그러면 멀리 계신 두 분이 불안하시지 않겠습니까? 마마도 저와 같습니다. 오라버니와 근이도 마마께서 이리 상심하고 계신 것을 하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맞네!”
태후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찌 두 사람을 불안하게 하겠는가?”
이때, 깨끗하게 씻은 지온이 매고고와 함께 태후의 침전으로 들어왔다.
“온아.”
대장공주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서 오거라.”
지온이 무릎을 굽혀 예를 올리자마자 대장공주가 금방 그녀를 당겨와 제 옆에 앉혔다.
“괜찮은 게냐? 정말 놀라지는 않았고?”
대장공주의 물음에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불 따위에 놀랐을 리가 있으려고요.”
대장공주가 장하다는 듯 그녀를 토닥였다.
“역시, 내 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