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이 사람은 누굽니까?
입을 열긴 열었지만 할 말이 없는 강왕비였다.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녀가 일부러 증인으로 삼겠다며 부른 이가 당시 태자비였던 태후와 대장공주가 아니었던가!
조(曹)씨 가문은 명문가였다. 그런 조씨 집안의 소저가 강왕에게 희롱을 당했으니 어찌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당시 조여화는 순조롭게 강왕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삼십 년을 강왕비로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며 그녀 자신도 잊고 지낸 과거였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강왕비가 몸을 돌려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폐하, 이것을 좀 보십시오. 대장공주마마의 말씀이 옳다고 한들 이리 사람의 체면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닙니까! 소문이라도 퍼지면 제가 어찌 얼굴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겠습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대장공주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그럼 온이의 평판은 상하고 더러워져도 되는가! 폐하, 저 아이 놀란 것 좀 보세요. 하마터면 이곳에서 불에 타 죽을 뻔했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폐하의 숙모라는 분께서는 대뜸 후궁의 풍기를 문란하게 어지럽혔다고 하고 있으니,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든 분이랍니까? 온이의 옷차림에도 전혀 문제가 없고, 몸엔 전부 불에 그슬린 재만 가득 한데, 정상인이 어찌 이걸 보고 그런 쪽으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흐음…….”
황제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역시 처음엔 몹쓸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여 병풍을 발로 차버렸는데, 그 후의 모습을 보고 오해였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이곳은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바닥에 널브러진 반쯤 타버린 옷도 아마 더러워져 갈아입은 옷이었을 것이다.
강왕비는 말로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고, 그렇다고 대장공주를 이길 만큼 배짱이 두둑한 것도 아닌지라 결국 고전적인 수법을 우려먹는 방법밖엔 없었다.
그녀가 쥐어 짜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폐하, 제가 다 폐하를 생각해서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옷만 제대로 갖춰 입고 있으면 다 괜찮은 것입니까? 어쩌면 미처 몹쓸 짓을 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르는 게 아닙니까?”
대장공주가 차게 웃었다.
“저, 말하는 것 하곤. 어찌 이치에 맞는 게 하나 없어? 그럼 자네도 그리 잘 차려입었으니, 내가 자네를 의심해도 되겠구먼? 어차피 자네도 그럴 시간이 없었는지 알게 뭔가!”
“그런……!”
“그만! 두 분 모두 그만하십시오!”
두통에 머리가 지끈지끈한 황제가 결국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 두 여자의 말다툼을 정리했다.
태후 역시 골치가 아픈 것은 마찬가지였던지라 한 마디를 보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실의 체면은 대체 어디 두고 온 것이에요!”
황제 역시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태후가 깊은 한숨과 함께 황제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다툼만 벌이다간 진상을 알 수 없을 겝니다. 먼저 대질부터 시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대질하라면 하지요!”
대장공주가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지온을 데려왔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강왕비가 급히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의 말만 들어서는 안 되지요! 회영왕도 있지 않습니까.”
강왕비는 회영왕이 조금 전에, 분명히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으니, 회영왕만 지온을 물고 늘어지면, 지온이 결코 궁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여인의 손해가 더 막심하지 않던가? 설령 아무 일 없이 의심만 사더라도 지온은 끝이라고 봐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내시에게 회영왕을 데려오라 지시했다.
“황숙.”
회영왕이 자신에게 오쟁이를 지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 황제의 말투는 몹시 부드러워져 있었다.
“조금 전에 누군가 황숙을 해치려 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사람이 이 사람입니까?”
“읍읍…….”
회영왕을 지온의 앞에 데려다 놓은 내시가 틀어막았던 입을 풀었다.
숨을 몰아쉰 회영왕의 입이 열렸다.
“이 사람은 누굽니까?”
“…….”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왕비가 달려들었다.
“누가 해치려고 하셨다면서요! 이 아이가 일부러 군왕을 여기로 꾀어내 군왕께 들러붙으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회영왕이 황당하단 얼굴로 강왕비를 바라보았다.
“형수,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누가 본 왕에게 들러붙으려고 한다는 말을 제가 하더이까?”
“아니 그럼…….”
강왕비의 말문이 콱 막혔다. 그녀는 회영왕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누가 신을 해치려 합니다, 폐하! 제발 신을 살려 주십시오, 폐하!’
그랬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고 한다고만 했었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왕비는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왜 해치려고 한다고 하셨던 겝니까!”
회영왕이 대답했다.
“정말 누가 해치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가 황제를 향해 고발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폐하! 조금 전에 신이 술을 많이 마신 듯하여, 옷을 갈아입으려고 궁녀를 불러 길잡이로 삼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궁녀가 어찌 길을 안내한 것인지, 신을 이곳 사랑채로 안내해주지 뭡니까! 신은 그 뒤, 방에 들자마자 머리에 통증을 느끼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
자리에 있는 이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괴한 표정을 지은 황제가 물었다.
“그러니까 황숙은, 누군가 황숙을 해치려고……그러니까 목숨을 앗으려 했다는 겝니까?”
“맞습니다!”
회영왕이 소리쳤다.
“신이 연기에 기침하느라 깨어나지 못했으면 그대로 불구덩이에서 타죽었을 겁니다! 폐하, 꼭 신을 위해 나서주셔야 합니다! 감히 황성 안에서 종친의 목숨을 앗으려는 일이 벌어지다니, 그러다 누군가 폐하께 역심이라도 품으면 어찌합니까!”
‘아주 그럴싸하군…….’
생각을 마무리 지은 대장공주가 활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군왕은 우리 온이를 본 적도 없다는 것인가?”
회영왕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맞고 혼절했는데 어떻게 봤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물었다.
“그런데 이 소저가 누님께서 새로 슬하에 들이신 양녀입니까? 그럼 제 생질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대장공주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자네의 생질녀이니 앞으로 잘해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님. 한 가족이 아닙니까!”
강왕비를 오만하게 깔아본 대장공주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었는가? 두 사람은 서로 본 일이 없다는구먼. 본궁이 내 수양딸에게 좋은 사위를 붙여주고 싶은 것은 사실이네만, 그럼 더욱이 아무나 갖다 붙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강왕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하얗게 변하길 반복했다.
원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라 세밀하게 계획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라고 일이 이렇게 번질 거라는 예상을 했겠는가?
그 와중에 회영왕은 뭔가 입맛이 쓴 듯 입을 쩝쩝거리며 중얼거렸다.
“누님, 말은 맞는 말인데 뭔가 이 동생이 듣기에 기분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무나라니? 내가 아무나는 아니지 않나?’
마음이 편해진 대장공주가 화색이 만면하여 대답했다.
“생각이 멀리 갔구먼.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말이.”
두 사람의 대화로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혹여 황가의 추문으로 번질 수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지자, 기분이 크게 좋아진 황제가 지온에게 말했다.
“지온 동생, 자네도 그렇지 갑자기 사내를 봤다고 그리 다짜고짜 손을 쓰면 어쩌나!”
그러나 지온의 대답은 또다시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폐하, 소녀는 사람을 때린 적이 없습니다!”
“음?”
황제가 멈칫했다.
“자네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인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는 여기 계신 회영왕 전하를 뵙지도 못하였습니다.”
모여 있던 이들은 다시 한번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럼 조금 전 고모님께 살려달라고, 고의가 아니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이었던 게야?”
황제는 제 머리가 이제 수명을 다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진상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일 같아 보였는데, 어찌 모두 제 생각과 다른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지온의 얼굴에 죄책감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신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 돌아보니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하여 시녀가 돌아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움직이다 실수로 촛대를 건드려 그만…… 불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엔 불안과 초조가 가득했다.
“신녀가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리 큰 길일에, 궁에 불을 내고 폐하와 마마님들을 모두 경동(驚動)하게 한 것도 모자라 번거롭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제가 정말…….”
대장공주가 그녀를 얼른 붙들어 달랬다.
“네 탓이 아니다. 다른 이가 수작을 벌인 게 틀림없어. 온이, 널 먼저 여기에 가둬두고 회영왕을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더욱 가증스러운 게 무엇인 줄 아느냐? 아닌 줄을 알면서도, 다른 이들이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 봐 더러운 방향으로 생각하도록 계속 입을 놀렸다는 게야!”
분명 강왕비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강왕비도 대장공주의 말에 바로 반박하긴 어려웠는지,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폐하,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한 방에 있었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닙니까!”
콧방귀를 뀐 대장공주가 그녀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그게 바로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는 것이네! 이렇게 큰 방이, 병풍으로 가려져 있기까지 했네. 더구나 한 사람은 창가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문가에 있었으니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이지! 어쩐지 일이 아주 이상하다 했네. 문은 왜 잠긴 것인가? 회영왕은 누가 데려온 것이고? 시중을 들던 궁녀는 어디를 갔단 말인가? 의문점이 이렇게나 많은 사건이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일이 아니다? 그걸 본궁 더러 믿으란 말인가!”
황제는 어찌 되었건 자신의 친어미에게 그런 불명예를 업고 가게 할 순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지저분한 생각뿐이라고 말하다니. 그럼 강왕비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황제가 대장공주를 달랬다.
“고모님, 화를 푸세요. 어쩌면 별 일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이지요. 황숙은 궁인이 길 안내를 잘못했던 것뿐이고, 지온 동생은 누군가 실수로 문을 잠가 나오지 못했던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어쩌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게지요…….”
말을 하면 할수록 황제는 궁색해졌다.
피해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겪은 일만 표면적으로 보았다면, 황제의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건이 어찌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미 모두 알게 되지 않았던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에 어찌 모른 척을 한단 말인가!
‘회영왕을 때려 정신을 잃게 만든 이는 누구며, 지온 동생이 있던 방의 문을 잠근 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 너무도 버젓이 보이는, 풀리지 않은 두 가지 의문점을, 대체 사람들에게 어떻게 무시하고 넘어가라 한단 말인가!’
황제의 난처한 모습에 대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이 고모도 폐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폐하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삼 년입니다. 본궁이 오랜만에 돌아와 초대에 응한 자리에서, 그것도 본궁이 어렵사리 슬하에 들인 수양딸이 이리 못된 일을 당했습니다. 폐하, 본궁이 이리 홀대받을 사람인 것입니까?”
황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