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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46)화 (146/385)
  • 146화. 개 같은 소리!

    신하들 사이에 있던 유신지가 슬쩍 루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무슨 일인 것 같소? 딱 보니 누구 하나 된통 당하게 생긴 것 같은데…….”

    루안의 미간은 잔뜩 좁아져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가시질 않았다.

    이윽고 편전에서 나온 강왕비가 황제의 뒤를 따라 옥로전으로 향하는 것을 본 순간,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신지의 손에 잡힌 제 소매를 잡아 뺀 루안은 당장 옥로전으로 향했다.

    “어, 뭐하러 가는 거요!”

    유신지의 물음에 그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폐하께 혹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시면, 옆에서 도움을 드릴 생각이요.”

    그가 그렇게 떠나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툴툴, 비아냥을 쏟았다.

    “조정 생활 참 잘해! 이런 일에도 그저 폐하 옆에서 도와드릴 생각뿐이니 영전을 그리 빨리하는 게지!”

    치열한 고민 끝에 이를 꽉 문 유신지가 루안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나도 같이 가겠소!”

    비아냥대던 신하가 깜짝 놀라서, 멀어지던 유신지를 보다가 저의 친한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유씨 가문 대공자와 루 낭중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 모르겠단 말일세. 딱 보기에도 폐하께서 사적인 일을 처리하러 가시는 것 같은데, 루 낭중이야 딸랑이 짓 하러 간다지만, 저자는 거길 굳이 왜 가냔 말일세.”

    “누가 알겠나? 말하기 곤란하기도 하고…….”

    시선을 부딪치는 두 사람의 표정이 기묘했다.

    ‘그렇지, 거 말하기 곤란하지. 곤란하고말고.’

    * * *

    황제는 걸어가며 연신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천한 것이 감히 궁에서 그런 뻔뻔한 짓을 했는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

    옥로전에 도착하자 옷에 불이 붙은 회영왕이 머리를 감싼 채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태후와 다른 이들은 이미 옥로전 밖으로 대피한 뒤였고, 놀란 부인들과 규수들은 연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물은 어디 있느냐!”

    황제가 고함을 치자 이미 물을 뜨러 갔다가 막 돌아온 내시들이 죽을힘을 다해 회영왕을 향해 물을 끼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영왕에 몸에 붙었던 불은 모두 꺼졌지만, 그는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한 채로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다가가 그를 발로 툭툭 차며 황제가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황숙, 괜찮습니까?”

    회영왕은 선제의 당형제로, 배분으로 따지자면 사실 황제는 그를 아저씨라 불러야 했다.

    이제 겨우 스물을 넘긴 회영왕은 평소 음주와 가무에 빠져 있거나, 새장을 들고 산책을 하고 귀뚜라미 싸움을 즐기는, 못 배우고 아는 게 없으며 무능한 한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황제는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화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회영왕은 난데없는 발길질에 황제의 다리를 와락 끌어안으며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누가 신을 해하려 합니다, 폐하! 제발 신을 살려 주십시오, 폐하!”

    회영왕이 까만색 눈물과 콧물을 줄기줄기 뿌려대며 황제의 다리에 들러붙어 몸을 비벼대자, 황제는 역겨움에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으로 그를 차버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겝니까? 황숙이 놀라 정신이 나가셨구나. 여봐라, 와서 황숙을 진정시켜라!”

    그러자 곧 내시가 달려들어 회영왕을 제압하더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차가운 얼굴의 황제가 태후와 다른 몇몇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황후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연회는 여기서 끝내겠소.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정리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이 세 명의 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 옥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황제의 지시에 황후가 대답하고는 연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출궁시켰다. 이 사람, 저 사람 참석했던 이들 대다수가 얼추 떠났을 때쯤, 금위군 하나가 달려왔다.

    “폐하, 사랑채에서 사람을 발견했사옵니다!”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곧장 사랑채로 향했다.

    이때, 태후와 세 명의 비, 그리고 대장공주는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다들 제 집안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황제를 따라 함께 사랑채로 향했다.

    콧바람을 식식거리며 황제를 따라 옥로전에 도착한 강왕비는, 차갑고 고고한 얼굴로 서 있는 대장공주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계속 도도하게 건방 떨고 있거라! 그래야 내게 당하고 울 때 더 아플 테니까!’

    * * *

    그들이 사랑채에 도착했을 때, 불은 이미 거의 잡힌 상태였다.

    호 공공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폐하, 발견된 이는 이곳에 있사옵니다.”

    황제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한 손으론 코를 막고, 피어오르는 연기에 손바람을 부쳐가며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화장대에서 쏟아진 화장품과 도구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옷들도 바닥에 마구 널브러져 있었는데, 여인의 옷으로 보이는 옷들은 이미 반쯤 타버린 상태였다.

    황제가 화를 누르며 회영왕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옷까지 이리 다 벗어놓고, 뭐? 누가 해치려고 해? 살려줘?’

    회영왕이 읍읍 거리며 뭐라 변명을 하려 했지만, 내시들에게 틀어 막힌 입은 떨어질 줄을 몰라 들리질 않았다.

    ‘억울합니다! 저는 정말 억울하게 당한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황제는 그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병풍 앞까지 걸어가 다시 한번 깊은 심호흡을 했다.

    병풍에는 이미 구멍이 여러 개가 나 있는지라 어렴풋하게나마 병풍 뒤 구석진 곳에 여인 하나가 자리한 것이 보였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저 평범한 궁녀라면 모를까, 만약 빈(嬪) 중에 하나라면…….’

    황제는 다시금 이를 꽉 물었다. 오쟁이를 지게 생겼다는 분노에 그가 단번에 병풍을 발로 차버렸다.

    병풍이 날아가자, 소스라치게 놀란 병풍 뒤에 있던 여인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의 모습을 확인하자, 황제의 분노는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냐?”

    그가 상상했던 일은 애초에 일어난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병풍 구석에 있는 것은 그의 빈이나 궁녀가 아닌 한 소녀였고, 소녀의 옷차림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검은 그을음을 묻히고 빨간 눈을 한 것이, 소녀는 무언가에 매우 놀란 듯 보였다.

    곧 난리가 날 것으로 보이자 흥분한 강왕비가 희열감에 차서 대장공주를 쳐다보았다.

    멈칫했던 대장공주가 황제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온아,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게야?”

    온통 빨갛게 변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던 지온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어머님, 살려주세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다른 이들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후궁에서 일어난 몹쓸 일을 처리하러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래도 대응이 빠른 것은 태후였다.

    “보아하니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로구먼…….”

    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와 태후의 말을 싹둑 잘랐다.

    “지온 소저! 어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는가? 궁에 처음 온 사람이 이리 후궁의 풍기를 문란하게 어지럽히다니, 감히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이런 소릴 할 사람이 강왕비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녀는 사실 황제가 지온을 보고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물었을 때 이미 속이 뒤집히고 있었다.

    ‘당연히 저 몹쓸 년이 여기까지 왔으면 회영왕과 따로 만나려고 온 게 아니고 뭐겠냐고! 지난번 요의 때는 다 차려 놓은 밥상을 누가 홀랑 들어먹을까, 그렇게 화를 내셔놓고는! 어찌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 게야?!’

    그러나 이젠 모르든 아니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이 아닌가!

    ‘내 절대 저 천한 것이 이대로 빠져나가도록 그냥 두지 않을 것이야!’

    그래서 강왕비는 태후가 이대로 사건을 덮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곧장 달려들어 훼방을 놓았던 것이었다.

    당연히 화가 난 태후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확실하지 않으니 함부로 말하지 마시게!”

    어렵게 태후와 맞설 용기를 품은 강왕비가 턱 끝을 들었다.

    “태후마마, 상황이 명명백백하지 않사옵니까? 오늘 예상치 못한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지온 소저는 이대로 군왕 하나를 홀렸겠지요. 이런 불미스러운 일도 벌어졌겠다, 대장공주마마의 체면도 있으니 군왕의 측비 자리는 보장되는 게 아니옵니까? 대체 이게 무슨 풍조란 말입니까? 이런 수단을 쓰는 것을 이대로 방임했다가, 앞으로 다른 이들이 똑같이 따라 배우기라도 한다면 어쩌시려는 것인지요!”

    태후가 미처 반박하기도 전에 지온의 비명이 먼저 울렸다.

    “아닙니다, 전 안 그랬어요! 전 억울합니다!”

    완전히 무너지는 듯한 지온의 모습에 강왕비의 가슴이 흥분으로 터질 듯 차올랐다.

    ‘넌 화가 나 죽을 것 같겠지! 나이가 어리면 성질머릴 못 참을 줄 알았거든! 화가 날수록 말이 안 나올 테니, 넌 명줄 끊길 때만 기다리고 있거라, 천한 것!’

    생사를 오갔던 제 아들을 떠올린 강왕비의 눈빛이 더욱 흉흉하게 번들거렸다.

    “자네가 안 그랬다는 것을 어찌 설명할 텐가? 회영왕이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이곳으로 왔단 말이야! 설마 이 화재도 자네가 계획한 것은 아니겠지? 일을 이리 만들어 공주마마께서 자네를 위해 폐하께 왕비 자릴 간청 드리게 할 심산은 아니었고? 나이도 어린 소저가 어찌 이리 심계가 어둡고 깊은 건지……. 기회만 되었다면 폐하께도 손을 뻗쳤겠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휙, 하고 고개를 돌린 대장공주가 눈을 부릅뜨더니 강왕비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개 같은 소리!”

    이 다섯 글자를 그녀가 어찌나 크고 위엄 넘치게 소리쳤던지, 그 소리는 꼭 마른 봄에 치는 벼락처럼 크게 울렸다. 공주의 목소리는 방안의 모든 이들을 치고 지나가며 모두를 찌릿하게 만들었다.

    순간 놀라 혼이 빠져있던 강왕비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다시 대거리를 시작했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로 파들거리는 손을 든 그녀가 대장공주를 향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어찌 일국의 공주라는 분께서 그런 상스러운 말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대장공주가 지온을 서아에게 맡기곤 한 걸음 크게 강왕비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곤 휘릭, 한차례 불진을 휘두르더니 불같은 분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강왕비를 노려보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내 딸이 무엇이 부족해서 겨우 측비 자릴 노린단 말인가? 내 아이 수준에, 황실의 저딴 폐물이 어디 가당키나 하고?”

    회영왕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다가 말로 얻어맞고야 말았다.

    대장공주의 차가운 비웃음이 이어졌다.

    “조여화(曹麗華), 자네 머릿속이 지저분하다고 본궁까지 그럴 거라 생각지는 말아야지. 저리 놀라 힘들어하는 온이를 보고, 누가 그런 부분까지 생각할 것 같나? 자넨 말이 아주 술술 나오던데, 그것도 다 자네가 경험자라 그렇겠지. 아닌가?”

    이미 삼십 년도 더 지난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는 이도 몇 없는 것을, 대장공주가 이리 폭로해버리자 강왕비의 수치심과 분노가 폭발했다.

    “헛소리!”

    “헛소리라니!”

    대장공주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강왕부로 시집을 갔던 게 조여화, 자네가 아니었나? 본궁도, 태후께서도 두 눈 똑똑히 봤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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