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45)화 (145/385)
  • 145화. 불이 난 옥로전 사랑채

    세자비의 말에 잠시 화를 참으려던 강왕비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겠던지 불만을 쏟았다.

    “저것들 하는 걸 좀 봐라! 하나는 남편도 죽고 없는 과부에, 하나는 아비 어미 없는 고아 주제에, 어찌 저리 날뛰어! 본인들이 뭐라고 폐하더러 챙겨 달라말라야! 분수를 알아야지.”

    세자비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녀가 조용히 강왕비를 달랬다.

    “어머니, 대장공주께선 폐하의 어른 되는 분이시지 않으십니까.”

    남편도 죽고 없는 과부라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대장공주는 공주였다.

    지아비를 잃은 여인으로서 이대로 수절하며 살길 원한다면 이대로 살아도 좋았고, 수절하길 원치 않는다면, 다른 이와 다시 혼인하여 살아도 상관없었다. 심지어 선고로서의 삶을 살며 다른 한편으로 얼굴 반반한 미남자를 노리개 삼아 들여도 괜찮은 것이 그녀였다. 아무렴 그녀가 다른 여인들과 같을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대답은 강왕비가 분노의 화살을 결국, 강왕세자비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넌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냐? 어느 집안사람이야!”

    입을 다물었던 세자비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님.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집에 돌아가면 어머님께 다시 죄를 청하겠습니다.”

    씩씩거리며 콧바람을 뿜어댄 강왕비는 억지로 화를 참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중을 들던 궁인이 실수로 뜨거운 국을 지온의 치마에 흘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온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 대장공주에게 말을 하고는 옥로전 뒤에 있는 사랑채로 향했다.

    이 상황을 본 강왕비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녀는 세자비의 옷을 세차게 잡아당기며 외쳤다.

    “분명 폐하를 몰래 만나러 가는 게야!”

    세자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것이겠지요. 어머님께서 너무 생각이 과하신 게 아닙니까?”

    강왕비가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서 누가 그저 옷만 갈아입고 나온다더냐! 대단한 규수들과 비교도 안 되는 저딴 신분으로 대장공주까지 홀린 아이다. 이상한 수작질을 한 게 틀림없지! 내 그런 일들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아느냐? 그해, 네 시아버지도…….”

    다행히 모든 것을 털어놓는 바보짓까진 하지 않은 강왕비였으나 세자비의 얼굴은 이미 충격에 휩싸인 뒤였다.

    제 시어머니가 알고 보니 그런 방법으로 ‘강왕비’ 자리를 꿰찬 것이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가 있었구나!’

    강왕비는 이미 좌불안석,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했다.

    “나도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겠다!”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기에, 모든 것을 포기한 세자비는 제 시어머니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따라가지 않으면 시어머니가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알 수 없고, 그리되면 남편은 또 화를 낼 것이 뻔하지 않은가?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으러 사랑채에 들어간 강왕비는, 옷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핑계로 세자비마저 쫓아 보내곤, 시비만 데리고 지온이 어느 방에 있는지 몰래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내, 지온이 옷을 갈아입고 있는 곳을 찾아내어 지온과 시녀가 나누는 대화를 몰래 엿듣기 시작했다.

    * * *

    “이 옷 너무 두꺼워. 입으니까 덥다.”

    “그럼 아가씨 좀 더 얇고 시원한 이 옷으로 바꿔 입는 게 좋겠어요.”

    강왕비가 창문 틈으로 살펴보니 지온이 하늘거리는 얇은 치마로 바꿔 입고 있었다. 더욱 선녀 같은 분위기가 넘쳐나는 것을 본 강왕비가 저도 모르게 이를 바드득 갈았다.

    ‘저 요망한 것 하는 짓 좀 보게! 그렇게 입어, 사내를 꾀려는 속셈 아니야?’

    강왕비는 지금 자신이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황제가 오기 전에 재빨리 일을 망쳐놔야 할 게 아닌가!

    강왕비는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린 끝에 결국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

    ‘그래. 사내를 만나겠다, 이거지? 내 만나게 해주지!’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강왕비가 시비를 불러 말했다.

    “넌 어서 가서…….”

    * * *

    지온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서아의 물음에도 지온은 창가로 걸어가 조용히 창을 열어볼 뿐이었다.

    서아가 고개를 내밀어 살폈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지온이 격자로 난 창살 근처를 훑자 그녀의 손에 고운 입자의 향분이 묻어나왔다. 향분의 냄새를 맡은 지온이 입을 열었다.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에서 만든 파사영(婆娑影)이란 향이네. 아주 진귀하고 희소한 향이라 서역의 상인 중에서도 소수만 취급하는 향이야. 삼 개월 전부터 그렇게 진귀한 물건들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도성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아마 강왕부……였지?”

    흠칫 놀란 서아가 물었다.

    “그럼 아가씨, 조금 전에 강왕부 사람이 몰래 엿듣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인가? 지온은 엿듣고 있던 이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 귀한 향료를 아무나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서아야, 넌 궁이 익숙하지 않으니 가서 매고고님을 모셔와. 반드시 사람들 눈을 피해서 모셔오는 걸 잊지 말고. 알았지?”

    “네, 아가씨.”

    서아가 급히 나갔다.

    창을 닫은 지온은 다시 단장하려는 듯 화장대 앞에 앉았다.

    지온 소저 본신의 무공이 아무리 하잘것없어도 뒷방 여인네 하나 상대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조금 전 그 창문이 조심스레 열리더니 누군가 지온의 동태를 살피곤 다시 슬그머니 사라졌다.

    매고고는 금방 도착했다.

    “아가씨…….”

    곧바로 조용히 하란 손짓으로 입을 막은 지온이 눈짓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그리곤 그들을 병풍 뒤로 데리고 들어갔다.

    목소리를 낮춘 지온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고고님, 누군가 저를 해치려고 합니다!”

    * * *

    강왕비가 뵙기를 청해왔다는 내시의 말에 황제는 역정이 일었다.

    대장공주는 조방궁에 들어간 이후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제 친어미라는 사람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다시 조방궁 밖을 활보하는 일은 없었을 거란 소리였다.

    도대체 하라는 일은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으면서, 치지 말란 사고만 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 친어미를 수수방관하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연회 자리를 비운 채 편전에 들었다.

    “폐하!”

    그를 본 강왕비가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를 부축한 황제가 따뜻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숙모님? 연회가 계속 진행 중이라, 짐이 오래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그 소릴 듣자마자 강왕비가 눈물부터 쏟았다.

    “여덟째도 제 곁에 없고, 폐하의 큰형님은 절 범죄자 취급을 하는데, 이젠 폐하마저 저를 피하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있던 기운도 빠져버린 황제였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숙모님. 짐이 왜 숙모님을 피하겠습니까? 오늘은 정말 시간을 내는 것이 여의치 않아 그런 것입니다.”

    비록 좋게 말은 하고 있지만, 연신 밖을 향해 있는 시선과 자신에게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는 황제를 보며, 강왕비는 다시금 자기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역시 그 천한 것을 만나러 갈 생각이신 게야! 여인에게 정 따윈 쏟지 않는 제 큰형을 보고 배우지 않고, 여섯째는 대체 뭘 했단 말인가!’

    강왕비는 바로 지난달, 자신이 큰아들에게 부인을 들이더니 어미를 잊었다며 욕했단 사실일랑은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그녀는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더욱 가련한 척했다.

    “아순, 지난번 그 일은 정말 이 숙모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능양의 부추김에 조씨 가문의 외숙모가 제 아들을 위해 나선 것뿐이에요. 저는 옆에서 같이 몇 마디 거들었던 뿐이고요. 아시겠지만 여덟째가 장원으로 옮겨가고 달라진 세자가 절 집안에 연금해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야기하던 강왕비는 정말 슬픔이 벅차올라, 황제에게 제 고통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친왕비인데 이제 아무나 제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듭니다. 폐하의 형님이야 강왕부를 책임지고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며느리 주제밖에 안 되는 오씨, 그 쥐 털 만한 것이 이래라저래라 같잖게 나대다니요! 지난 한 달은 그것이 저를 무슨 범죄자 취급을 하는 통에 제 아랫것들조차 고것의 눈치를 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 들어주고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별것 아닌 사소한 일들이었던지라 이미 황제는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가 대충 핑계를 대고 그만 일어서려던 찰나,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둥둥, 북소리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누군가 편전으로 급히 달려 들어왔다.

    “폐하, 옥로전에 불이 났사옵니다! 바로 대피하셔야 하옵니다!”

    멈칫한 황제가 입을 열려던 그때, 강왕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뭐라? 어떻게 불이 난 것이냐? 어디서 불이 난 것이야?”

    내시가 대답했다.

    “옥로전 뒤에 있는 사랑채입니다.”

    강왕비는 매우 놀랐다.

    옥로전 뒤에 있는 사랑채라면 옷을 갈아입던 곳이 아니던가!

    ‘세상에, 어찌 이리 교묘한 일이 다 있단 말인가? 내가 사람을 시켜 일을 벌이자마자 어떻게 바로 사랑채에서 불이 난단 말이야? 이 일이 그 계집과 관련이 있는 게야?

    잠깐, 관련이 있건 없건 간에 일단 불이 났으니 내가 궁이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부분들도 가려지겠구먼?’

    강왕비는 놀랐던 가슴이 다시 기쁨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곧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하니 어서 피하시지요. 옥로전은 이곳 바로 옆이 아닙니까!”

    황제는 급변하는 그녀의 신색에서 감추려야 감춰지지 않는 기쁨을 읽어내곤 미간을 좁혔다.

    그는 제 친어미가 대체 무슨 마음인지, 저 머릿속에 무슨 생각들이 굴러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멀쩡한 칠월칠석, 그것도 길일에 궁에 불이 났다는데, 대체 기쁠 까닭이 뭐란 말인가?

    마음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몸을 일으킨 그가 밖으로 향했다.

    “호은은 어디 갔는가? 사람들은 대피시켰느냐? 어서 금위군을 보내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모후와 고모님께선 아직 옥로전에 계신 것인가? 짐이 가서 확인해야겠다.”

    * * *

    연회장의 춤과 노래는 이미 멈춘 상태였다.

    황제가 전 밖으로 나왔을 때, 신하들은 모두 편전 밖에 모여 있었다.

    수상인 상용(常庸)이 앞으로 나와 보고를 올렸다.

    “폐하, 마음을 놓으시옵소서. 작은 불이 난 것으로 옥로전까지 번지지 않았사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확실히 옥로전 쪽엔 아주 작은 불꽃만이 보였다.

    그제야 조금 안심을 하던 그때였다. 연기가 피어오르던 곳에서 불쑥, 사람 하나가 밖으로 뛰나오는 것이 아닌가!

    몸에 불이 붙은 채 뛰쳐나온 이는 마구 달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살려줘! 살려줘!”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던 신하들은 곧 충격에 빠졌다.

    ‘어찌 사내가 거기서 나온단 말인가?’

    ‘옥로전은 여인들의 연회장소가 아닌가? 여인 외엔 내시들만 있어야 할 곳에, 어찌 사내가 나와!’

    그리고 금방 뛰쳐나온 이를 알아본 자가 입을 열었다.

    “회영왕, 회영왕일세!”

    황궁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 되는 이들이면 뭐하나 부족한 이들이 아니었으니, 모인 신하들의 얼굴 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술렁술렁 떠올랐다.

    ‘설마하니, 이번 화재가 황궁의 추문도 하나 활활 태워 올리게 되는 건가?’

    ‘어느 궁의 비가 연루된 게야? 하긴 누가 연루됐건 간에, 폐하의 체면이 좋을 수가 없겠어.’

    그랬다. 처음엔 그저 매우 놀란 듯 보였던 황제의 얼굴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고 있었다.

    “상 수상, 이 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짐은 모후께서 괜찮으신지 가보겠네.”

    일어나 허리를 굽힌 상용이 눈치 좋게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걱정 마시옵소서, 폐하.”

    그는 처리해야 할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할 것이므로, 소문이 외부로 퍼져나가는 일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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