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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44)화 (144/385)

144화. 얼굴이 낯이 익어

옥로전에 도착했을 때, 연회의 자리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대장공주는 반백쯤 된 부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머리에 봉관(*鳳冠: 봉황 장식이 달린 관)을 쓴 것을 보니 태후인 듯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태후보다 좀 더 나이가 젊었는데 친왕비의 복색으로 보아 강왕비인 듯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화려하게 꾸민 젊은 여인들은 예복의 품계를 생각할 때, 아마도 황후와 현비, 신비로 판단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조금 먼 자리에 앉은 이는…….’

지온이 여인들을 살펴보고 있을 때, 경소소가 침음을 흘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웬일로 나오셨지?”

지온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경소소를 보자 그녀가 말했다.

“영수궁 마마는, 이런 곳에 거의 모습을 안 보이시거든. 나도 그래서 태후께 인사드릴 때 두 번인가 본 게 다야.”

“그렇구나.”

지온은 그녀가 아마도 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비밀이 밝혀질 위험 때문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옥종화였던 시절, 상해에서 자라긴 했지만, 그래도 귀부인 몇 분은 뵌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경소소가 지온을 이끌어 태후와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후에게 인사를 올린 경소소가 대장공주를 향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숙모님! 제가 지온 언니를 잘 데려왔는데, 상이라도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대장공주가 손에 놓고 있던 불진을 들더니,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소소야, 상도 사람을 봐가며 말을 꺼내야지. 전에야 팔찌라도 빼줄 수 있었겠지만, 이제 숙모가 가진 거라고는 이 불진뿐이니 털 가락이라도 몇 개 뽑아주랴?”

경소소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숙모님!”

어린아이가 애교를 부리며 떼쓰는 모습에 태후와 다른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고 태후의 시선이 지온으로 향했다.

“이 아이가 새로 들인 양녀인 겝니까?”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한 대장공주가 지온을 불렀다.

“어서 와서 외숙모께 인사를 올려 보아라.”

그 말에 태후의 표정이 굳었고, 황후와 다른 이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관계로만 보자면 당연히 외숙모라 부르는 것이 맞지만, 황가에서 어디 그런 호칭을 쓰던가?

‘대장공주가 그걸 알면서도 굳이 저리 언급한 것은, 저 양녀를 그만큼 중히 본다는 뜻인가?’

모두가 이리 생각하고 있을 때, 당연히 태후를 외숙모라 부를 수 없었던 지온이 예를 갖췄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의 태후가 웃으며 지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주 어여쁜 소저가 아닙니까. 이리, 외숙모가 볼 수 있게 가까이 오세요.”

지온이 그녀의 말에 더 앞으로 나오자 그녀를 위아래로 몇 번을 살핀 태후가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좋군요.”

그러고는 지온에게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했다.

태후가 좋다는데, 황후와 다른 이들 역시 성의 표시를 안 할 수가 있겠는가?

강왕비 앞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죽일 듯이 지온을 노려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지온의 얼굴을 본 강왕비는, 능양진인이 했던 이야기를 완전히 믿게 된 참이었다.

아쉽게도 지난번 일이 실패했고, 증거도 없어 두 아들에게 애꿎은 원망만 들어야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새언니인 조경 장군 부인은 그 일로 절에 갇혀 말도 하지 못하고 수양을 해야 하는 중벌을 받게 돼, 이제 자신을 도울 사람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강왕비.”

태후의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감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어린 소저를 그리 뚫어질 듯이 쳐다만 보다니 어쩌려는 것인가?”

정신을 차린 강왕비가 웃음을 쥐어짰다.

“신첩…… 신첩은 그저 얼굴이 낯이 익기에…….”

대장공주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역시 그 아이 얼굴이 낯이 익지요? 본궁도 그랬습니다. 처음 볼 때부터 어딘지 낯이 익었어요. 어쩌면 모든 것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인가 싶습니다.”

태후가 미소지었다.

“자네에게 좋은 딸이 생겼단 걸 알았네. 그러니 이제 내 앞에서 자랑은 그만해도 되겠어.”

“어머님…….”

곁에 있던 강왕세자비가 조용히 강왕비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무리 싫어도 보는 눈이 워낙 많아 어쩔 수 없었던 강왕비는, 반지 하나를 빼내어 선물로 내주었다.

남은 것은 가장 멀리 앉아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 앞에 걸어간 지온은 웃음을 머금은 채 몸을 낮췄다.

“옥비마마를 뵙습니다.”

지온이 예를 올렸는데,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간을 좁히던 태후는, 옥비가 지온을 뚫어질 듯이 보고 있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강왕비도 온이가 낯이 익다더니, 옥비도 그 아이가 낯이 익어 그러는가?”

화들짝 정신이 돌아온 옥비가 당황했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지온 소저가 너무도 아름다워 신첩이 순간 실례를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급히 떨잠을 하나 떼어 지온에게 건넸다.

그 모습에 황후와 다른 이들의 미간이 동시에 좁아졌다.

옥비가 하는 떨잠이 어디 보통 떨잠인가? 내궁에서 만든 진귀한 것이 아니던가?

황후와 삼비(三妃)들이나 가진 것을 어찌 선물로 준단 말인가. 더구나, 태후가 옥으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본인이 그보다 더 귀한 것을 선물하면 태후를 이겨 먹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선물을 받은 지온이 옆에 있는 궁인에게 그것을 건넸다.

옥비는 아직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한 듯,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지온 소저는 남방 사람인지요? 남방 쪽 어투가 들립니다.”

지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신녀의 본가가 남쪽에 있사옵니다.”

“남쪽 어디인가요?”

고개를 든 지온이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상해…….”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심정을 느낀 옥비의 귓가에, 이어지는 지온의 말이 들렸다.

“……근처에 있는 남향이옵니다.”

지온이 배시시 웃었다.

“마마께서 상해분이시다 보니 그래서 낯이 익으셨나 봅니다.”

웃음을 지었을 뿐, 옥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온은 무릎을 굽혀 옥비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대장공주 곁으로 돌아왔다.

* * *

시간이 되어 연회가 시작되었다.

지온을 데리고 자리에 앉은 대장공주가 옥비를 흘긋 보더니, 낮게 비웃음을 흘렸다.

“가짜는 가짜일 수밖에 없는 게지. 삼 년을 숨겼는데 아직도 저리 격이 떨어져서야, 쯧쯧.”

지온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돌아가면 옥형 선생에게 향이라도 올려야겠구나. 참으로 안타까워.”

그리 말하며 대장공주는 속으로 탄식했다.

‘옥씨 집안은 모두가 황천을 건넜거늘, 가문의 명성마저 다른 이의 손에 망가지고 있구나.’

대장공주 옆에 앉은 지온은 자신을 살피는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느꼈다.

어디 그뿐인가? 대장공주에게 술을 올린답시고 찾아와서는 지온에게 낯 뜨거운 칭찬을 퍼붓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생각에 지온은 조용히 대장공주에게 물었다.

“저들이 저를 왜 이토록 신경 쓰는 것인지요?”

대장공주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신경 쓰지 말아라. 다른 이도 본인처럼 온통 더러운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찬 줄 아는 것들이라 그런 것이니.”

멈칫한 지온은 대장공주의 말이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회가 이어지던 중, 태후에게 술을 올리겠다며 다른 곳에 있던 황제가 찾아왔다.

그런데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자 황제의 인척 가문의 소저들이 수줍어하며 제 용모를 다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지온은 그제야 대장공주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아, 그럼 아까 저들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지 이미 삼 년이나 되시지 않았느냐. 젊고 기력도 왕성하신 폐하께서 아직 후사를 두지 못하셨으니…….”

‘후궁을 늘리겠단 심사였구나!’

상황을 이해한 지온이 웃으며 물었다.

“어머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제게 순서가 오는 일은 없겠지요?”

지온을 향해 눈을 흘긴 대장공주가 그녀의 이마를 톡 때렸다.

“본궁의 세가 아무리 기울었다지만, 딸까지 보호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야.”

웃음을 터트린 지온이 대장공주를 더욱 치켜세웠다.

“아무러면요! 어머님이 나서시면 그게 누구라도 깨끗하게 처리가 되지요.”

지온은 지난번 강왕비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함부로 언급해선 안 되는 사건이라 조심스럽긴 했지만, 대장공주 역시 기분이 좋은 듯 지온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까딱였다.

그때, 황제가 특별히 대장공주를 위해 술 한 잔을 올리겠다며 찾아왔다.

“고모님. 고모님께서 이리 연회에 참석해주셔서 짐이 얼마나 기쁜 줄 모릅니다.”

대장공주가 웃음을 지었다.

“이리 말씀하시는데 고모가 되어 어찌 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술잔을 비운 황제가 부드럽게 지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모님께서 술이 들어가시면 흥이 많이 오르시니, 동생이 고생을 좀 하겠지만, 고모님을 잘 부탁하네.”

지온은 웃으며 그러겠다, 대답했다.

지온은 황제가 연회에 찾아와 먼저 말을 걸어 대화한 첫 번째 규수였다. 더구나 둘 사이도 무척 친근한 듯 보이자 사방에서 질투의 눈빛이 날아들었다.

본래 성격도 좀 짓궂은 구석이 있던 대장공주는, 3년이나 두문불출, 숨죽이고 지낸 탓에 안 그래도 몸이 근질거리던 차였다.

주변 이들의 눈빛을 읽은 그녀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당장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장공주가 황제의 손을 부여잡고는 절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삼 년이나 못 봤는데 폐하께서 아직 이 고모를 이리 기억하고 마음을 써주시니,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이제 이 고모도 나이가 들었어요.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것은 괜찮은데, 폐하의 사촌 동생이 걱정이에요. 이 아인 집안에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아이인데, 나마저 없으면 저 불쌍한 것을 어쩌면 좋을지…….”

그리곤 눈물을 훔치는 그녀였다.

황제는 황급히 그녀를 달랬다.

“그게 어인 말씀입니까, 고모님. 아직 이리 젊으신 고모님께서…….”

황제의 소매를 그러잡은 대장공주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입을 열었다.

“젊지요. 젊긴 젊어도 몸이 정말 좋지가 않아요. 지난 삼 년 사이에 본궁은 병치레만 했다 하면, 병석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지도 못한 채 여러 날을 일어나질 못했단 말입니다.”

“고모님…….”

황제의 가슴이 철렁했다. 대장공주가 그렇게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아니던가?

“삼 년 전만 해도 이 고모는 모든 게 악몽 같았어요. 그래도 저 아이가 있어 다행이었지요. 매일 곁에서 마음을 달래주니 이제 이리 좋아진 것이겠지요, 폐하. 만에 하나라도 말입니다, 본궁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들랑 폐하의 사촌 동생을 잘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황제가 연신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대장공주는 그제야 황제의 손을 놓아주곤, 눈물을 말리는 듯 제 눈꼬리를 꾹꾹 누르며 웃었다.

“나이 먹고 주책이지요,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해 폐하의 시간을 잡아먹었어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

황제는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더 남긴 후에야 대신들과의 연회를 위해 돌아갔다.

능청스레 다시 자리에 앉은 대장공주가 잔을 들어 제 입을 가리더니 빙긋 웃으며 지온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저것들 속이 다 뒤집히고도 남았을 것이야. 그렇지 않겠느냐?”

“…….”

‘그러고도 남겠지. 누군가의 귀에는 어머님이 거의 대놓고 이야기를 한 거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지금은 저희끼리 몰래 눈치를 보며 수군거리고만 있다지만, 속으론 대장공주가 뻔뻔스레 제 조카의 침상에 밀어 넣을 양녀를 거뒀다며, 분개하며 욕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사실 강왕비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이미 그녀는 지온이 요의에게 벌어진 참혹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더욱 기가 차고 화가 났다.

‘내 아들 하나를 해친 거로 모자라서, 다른 아들을 또 유혹하려 들어? 낯짝도 두꺼운 것……!’

“어머님!”

강왕비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한 것을 본 강왕세자비가 급히 그녀를 말리며 생각했다.

‘하나뿐인 시어머니가 이런 분이라니! 정말, 골치가 아파 죽겠네!’

며느리 쥐 잡듯 잡는 것이 취미요, 눈 많고 입 많은 이런 곳에서 경거망동하기가 특기인 시어머니는 제 성질을 참을 줄을 몰랐다.

‘그렇게 똑똑하신 아버님께서 어쩌다 이런 사람을 왕비로 고르신 걸까?’

세자비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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