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43)화 (143/385)
  • 143화. 바보 맞소. 멍청하오.

    세 사람은 근처 풀숲을 돌아다녔다.

    삼색고양이는 마치 그들과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멀리는 가지 않고 가끔 울음소리를 들려주어 그녀들을 이리 저리로 끌고 다녔다.

    그렇게 울음소리에 이끌려 어딘가로 따라가던 지온의 눈에 나무 뒤에 어렴풋한 관화(*官靴: 관복에 신는 신)의 형체가 스쳤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지온은 곧장 자리를 피하고자 급히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나무 뒤에 있던 관화의 주인이 어쩐 일인지 그녀를 따라 나오는 게 아닌가!

    지온은 더욱 초조해졌다.

    오늘은 그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대장공주가 뒤를 봐줄 터지만, 지금 이 잘못만큼은 절대 저질러선 안 되는 잘못이었다. 외딴곳에서, 외간 사내를 만났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지온이 걷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뒤따르는 이의 속도 역시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지온은 제가 가진 향환을 더듬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만에 하나라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먼저 손을 쓰는 게 낫다.’

    지온이 향환을 눌러 바스러뜨리려는 순간, 뒤따르던 이가 목소리를 냈다.

    “그만 가시오, 나요!”

    멈칫.

    지온이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쉽게 볼 수 없는 표정의 그녀를 마주한지라, 루안의 얼굴에 어찌할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지온을 쫓아 달릴 사람이, 루안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한편,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분노를 느끼며, 지온이 으르렁거렸다.

    “사람 놀라 죽는 꼴이 보고 싶었나 보죠?”

    루안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오. 멀리서 보니 당신이 여기 있기에, 난 그저 찾아와 인사를 하고 싶었소.”

    “인사도 시간과 장소를 봐가면서 해야죠!”

    지온의 분노가 계속 이어졌다.

    “궁에서 나간 뒤에 하면 안 됐던 거냐고요, 네?!”

    ‘지온’이란 신분으로 처음 입궁한 상태라, 안 그래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지 않았던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상황이었는데, 일부러 일까지 만들다니!

    억지로 화를 눌러 참아가며 지온이 물었다.

    “그 고양이. 당신이 풀었던 건, 설마 아니겠죠?”

    “그저 우연일 뿐…….”

    루안의 얼버무린 대답에, 지온은 냉소라도 짓고 싶었다.

    ‘우연은 얼어 죽을 놈의 우연! 내가 멍청이로 보이시나?’

    오늘 유난히 큰 지온의 분노 앞에, 루안은 더욱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날 일이 그렇게 심각했나? 난 칠월칠석을 챙겨주고 싶었을 뿐인데…….’

    여러 번의 심호흡 끝에, 지온은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아직 할 말 더 남은 거죠?”

    “…….”

    루안이 침묵하자 지온이 구석진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눈부터 좀 피해요.”

    루안은 조용히 그녀 뒤를 따라 나무 뒤로 돌아섰다.

    원래도 흐린 날인 데다 두 그루의 큰 나무까지 있다 보니, 나무 그림자에 두 사람의 신형이 제대로 가려졌다.

    “이제 말해 봐요.”

    뒤돌아섰던 지온이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지온은 여전히 화를 잔뜩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흘끔흘끔, 지온의 안색을 살피던 루안이 물었다.

    “화가 난 것 같소?”

    지온이 루안을 노려보았다.

    “화내면 안 되나요?”

    “아니오…….”

    지온이 빠르게 그의 말을 끊었다.

    “여인인 제가 당신에게, 그렇게나 여러 번 혼인하자고 했어요. 청혼이 싫었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될 걸, 어떻게 그런 말로 슬쩍 넘어가려고 할 수 있죠? 그런데도 내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지온이 차갑게 웃었다.

    “그럼 뭔데요? 지금 잠깐 내게 당신이 의지가 되니까, 내가 당신을 가깝다고 느끼는 걸 거라면서요. 지금 보니 우리 루 대인께서는 독심술도 하시는 분이셨군요? 제 마음마저 이렇게 속속들이 다 보고 계시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루안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 차분하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지, 이렇게 날카롭고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그에게 조금 전, 그 고양이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도 예쁜 몽실몽실한 그 고양이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지만, 때때로 이를 드러내며 발톱을 세워 할퀴려 들었었다.

    지온은 그 고양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이 마음을…… 어쩌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아니, 난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소.”

    이제 루안의 말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 찾아온 것도 당신에게 그 뜻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려고 온 거요.”

    “그래요?”

    지온이 턱을 톡, 치켜들더니 다소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 무슨 뜻이었는지 빨리빨리 말해보시죠? 저도 다시 돌아가 궁연에 참석해야 하니까요.”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이 시간, 길가에 켜둔 등불의 빛이 지온의 얼굴로 차근히 스며들었다.

    이런 거만한 모습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생기 있고 선명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루안은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녀도 화를 내는 존재임을. 자신도 그녀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존재임을.

    루안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지온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돌아온 것으로도 난 이미 행복하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는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소망일 거요. 어느 꿈에서조차 꾸어본 적 없을 정도로 아름답지…….” 

    멈추었던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그건 거절도 아니고, 당신의 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소. 그저…… 그저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또 나 자신이 너무 많은 기대를 하기 싫었기 때문이오. 이젠 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리다. 그리고 더 많은 걸 원하기도 하겠소.”

    그의 이야기를 듣던 지온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한참이 지나, 그녀가 한 말은 한마디뿐이었다.

    “바보.”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루안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던 사람. 여전히 그때 그 소년 시절,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바보!”

    그녀는 웃음이 날 것 같기도, 눈물이 날 듯도 했다.

    “사람이 왜 그렇게 고집이 세요? 왜 꼭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데요? 다른 사람이 좋아해 주고 쫓아다니는 게 뭐가 그렇게 싫다고…….”

    루안은 그저 조용히 지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겐 지금 이 순간이 꿈꾸던 최고의 순간이었으니까.

    옥종화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된 그때, 루안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호하여 다시는 상처 입히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표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역시 전하리라 다짐했지만, 너무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과거 옥종화를 만난 처음부터 그는 옥종화를 보기만 해왔다.

    옥종화가 태자 전하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울 때도, 의안왕이 암중에서 홀로 그녀를 향한 마음을 키워갈 때도 그랬다.

    옥종화를 좋아해 고백하는 이들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막상 그들처럼 고백하려니, 루안은 자신이 너무 하찮게 여겨져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생각이지만, 그때의 자신 역시 이제 막 사춘기를 시작했던 어린 소년일 뿐이지 않았던가.

    하늘이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고, 지금의 자신은 충분히 철이 들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상대를 바라보기만 해왔던 오랜 습관은, 그가 눈앞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가 날 좋아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가 삼 년간 은인자중하며 무애해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으니, 그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에서 이러는 것인가?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고마움이 아닌 것을…….’

    루안은 지온의 목소리가 높아지고서야 상념에서 빠져 나왔다.

    “이 답도 없는 인간! 진심을 말해도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생각에서 빠져나오자 그제야 조금 현실감이 느껴지는 루안이었다.

    분명 지온은 눈앞에서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는 웃고 있는 그녀를 볼 때보다 조금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

    문득, 루안이 질문을 던졌다.

    “그날, 당신이 한 그 말은 무슨 뜻이었소?”

    “무슨 말이요?”

    “한 번도 태자비가 되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던 그 말, 그 말 말이오.”

    “말 그대로죠!”

    지온이 대답했다.

    “그때, 당신은 내가 태자비가 될 거라 여겨 내게 아무 말 안 했던 거였잖아요. 내 예상이 틀렸나요?”

    “…….”

    루안은 침묵하며 생각했다.

    ‘틀리지 않았지…… 난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그녀와 태자의 사이가 그렇게 좋았으니, 그녀가 태자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럼 자신이 굳이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처음부터 루안은 이 연정이 혼자만의 감정이라 생각했었다. 그녀와는 관계없는…….

    ‘그러나 내가 틀렸다. 처음부터 그녀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바보, 멍청이!”

    지온의 말에 루안이 빙긋 웃었다.

    “바보 맞소. 멍청하오.”

    “당신은 좀 자신을 자랑스러워해도 돼요.”

    지온이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더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요.”

    루안은 자신이 어디가 그리 좋은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날.

    책장 뒤에 몸을 숨긴 채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무섭고 당황스러웠던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옥종화의 마음은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다.

    거기 있었군요.

    당신이 거기 있었어요.

    * * *

    “찾았다! 여기!”

    풀숲에서 삼색고양이를 들어 품에 안은 경소소가 기쁨에 소리쳤다.

    어린 궁녀는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니야, 뭘 이런 걸 가지고…… 이 고양이 정말 귀엽다!”

    경소소가 지온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지온 언니, 고양이 찾았어!”

    그 소리를 들은 지온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가봐야 해요.”

    이번엔 루안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나무 그늘 밖으로 나가기 전, 루안은 다시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지온이 돌아보자, 루안이 나무 위에 묶어 놓은 꽃등을 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안이 꽃등을 그녀에게 건넸다.

    “들고 가시오.”

    지온이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이걸 당신에 내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봐야 할까요?”

    “커험.”

    헛기침을 한 루안이 시선을 돌렸다.

    “어서 가보시오, 다른 이들이 보겠소.”

    웃음을 참은 지온이 꽃등을 받아 들었다.

    “가볼게요.”

    “음.”

    지온은 그제야 경소소에게로 돌아가는 걸음을 뗐다.

    * * *

    경소소는 마냥 아쉬운 얼굴로 고양이를 궁녀에게 건네고 있었다.

    “궁연이 곧 시작할 것 같아. 가자, 언니.”

    “그래.”

    지온의 손에 들린 꽃등을 발견한 경소소가 물었다.

    “어? 그 꽃등은 어디서 났어?”

    “아까 대인을 한 분 만났는데, 길이 어두우니 길 비추라고 나무에 있는 꽃등을 내려주셨어.”

    궁연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신하들은 대부분 나이가 있었다. 지온이 대인이라고만 하니 경소소는 그저 나이든 할아버지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분 좋은 분이시네! 그런데 이 꽃등 정말 예쁘다, 언니.”

    겹으로 두른 꽃잎으로 이루어진 꽃등은 유난히 정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궁녀와 고양이를 떠올린 지온은, 이것 역시 루안이 따로 준비한 게 아닐까 의심하며,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역시 황궁이야.”

    경소소도 더는 묻지 않았고, 고양이를 안은 어린 궁녀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눈으로 배웅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 있던 루안이 밖으로 나오자 어린 궁녀가 몸을 낮추며 예를 갖췄다.

    “대인.”

    멀어지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 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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