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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42)화 (142/385)
  • 142화. 텃세는 텄네

    정국공의 성이 경씨(耿氏)라 소소의 이름은 경소소(耿素素)였다.

    밝고 활발한 소소는 지온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도, 정도껏 곤란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이가 소소처럼 선을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도화빛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경소소의 소개에 피식, 웃음 흘리더니 입을 열었다.

    “아, 이분이 그 유명한 지씨 가문의 큰소저?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지온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옆에 있던 경소소가 슬쩍 그녀의 신분을 일러 주었다.

    “완현비(阮賢妃)의 여동생이야. 순서로는 여섯째…….”

    웃음을 지은 지온이 마주 인사를 하려던 찰나였나. 현비의 친정인 완씨 집안의 여섯째 아가씨가 선수를 치듯 먼저 입을 열었다.

    “요즘 그리 떠들썩한 화신점이 지온 소저가 풀어주는 것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대갓집 규수가 궁관에서 잠시 머무는 일 정도야 들어봤어도, 직접 관상에 점까지 본다니, 제가 그런 일은 금시초문이라……. 지온 소저, 아니면 여기서 한 번 봐주시고, 제 식견을 넓혀주시겠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장중에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방긋방긋 웃어가며 말하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말 속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귀한 집 아가씨들은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이 소녀들은 지온을 두고 천박하다며 비웃고 있었다.

    관상이나 점 따위를 보는 이들이 누구던가? 승려나 도사, 선고와 같은 이들이나 보는 것이 아니던가? 지체 높은 이들의 눈엔 모두, 품격 없는 이들이나 하는 격 낮은 일들인 것이다.

    평소 문턱 높은 집안을 수시로 드나들며, 대접받는 듯 보이는 능양진인조차, 진짜 신분 높은 이와 지위를 비교하면, 애초에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이니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경소소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지온이 본래 관가의 규수였단 것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지온은 대장공주의 양녀였다.

    완씨 집안 여섯째 소저의 이런 발언은, 대장공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었고, 그것은 정국공부 역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경소소가 당장 비꼬는 말을 던지려는 찰나, 지온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지온 언니?”

    경소소가 놀라 지온을 바라보자 지온이 웃으며 그녀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다시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부탁을 하시니, 제가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지금은 점괘통도 없고, 별자리를 보는 것도 어려우니, 소저의 관상이나 봐 드리는 게 좋겠어요. 제가 잘 봐 드리지 못하더라도, 너무 노여워 마시길.”

    여섯째 소저는 설마 지온이 진짜로 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었다.

    더구나 대답하는 말본새가 본인이 진짜 대단한 고인이라도 된 줄 아는 듯하지 않은가?

    완씨 집안의 소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전만큼 좋지가 않았다.

    “오? 그럼 한 번 봐주시죠, 지온 소저!”

    자세하게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머리끝이 뾰족한 것을 보니 좋은 머리를 타고나셨네요.”

    완 소저의 입꼬리가 작게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

    ‘아부할 줄 알고, 그래도 눈치는 있다 이거지? 상황 파악이 빠르네. 그래, 내가 뭐 한 번쯤 봐줄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누가 그랬던가, 진짜는 언제나 뒤에 나온다고!

    “그런데 인당(*印堂: 미간)이 너무 좁으시네요? 저런……. 그런 관상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속 좁고, 새가슴에, 좀스러운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향한 질투가 많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 되는 걸 못 봐주기 때문에, 그걸 조롱하고 비웃는 걸 좋아하는 이들이 많고요.”

    순간 장중에 정적이 흐르다 곧이어 조금 전보다 더욱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당연히 비웃음이었다.

    지씨 가문의 큰소저란 사람이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이야!

    이제 막 들어온 신분 높은 가문의 소저들 모임에서, 그것도 완씨 집안의 소저에게 이리 대놓고 강수를 놓다니!

    완 소저의 낯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지금 뭐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관상을 잘못 본 것 같죠?”

    헤실헤실 웃는 지온의 모습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스승님께서는 관상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게, 기분 좋게 띄워 주는 말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워낙 솔직한 성격이라 늘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래서 가끔 재미로 보고 말지, 제가 이걸로 밥 벌어 먹고살지 않아도 돼서 참 다행이지 뭔가요? 설마 제게 화나신 건 아니지요?”

    화가 났다. 화가 나다 못해, ‘타고난 좋은 머리’가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솔직한 성격? 뭐야, 지금 한 소리가 다 진짜고, 다른 사람들이 저와 다른 소릴 하면, 그건 내 기분을 띄어주려는 거짓말이란 거야, 뭐야?!’

    완 소저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본인이 본인 입으로 관상이나 점 같은 건 격 떨어지는 일이라 비웃지 않았던가? 이제 와 그걸 따지고 들면 제가 판 격 떨어지는 무덤에,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완씨 집안 여섯째 규수의 얼굴이 분노로 새파랗게 물들자, 경소소는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녀가 지온의 손을 맞잡으며 까르르 웃었다.

    “지온 언니, 나도 가묘(*家廟: 집안 사당)에 계신 스님한테 손금 보는 거 배웠어! 그걸로 자주 언니나 동생들 손금도 봐주고 노는데, 다들 내가 봐주는 게 잘 안 맞대. 언니가 손금 보는 거 가르쳐줄래? 다음번에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어!”

    어린 소녀들끼리 손금을 보며 노는 것은 시간 보내기 좋은 놀이로, 흔하게들 하는 놀이였다.

    경소소가 이리 말을 꺼내버리는 바람에, 여기서 완 소저가 더 이야기를 꺼내면 도리어 완 소저가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판이었다.

    화를 참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버린 완 소저였지만, 여기서 더 어쩔 도리는 없어 보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각자 마음속으로 계산들을 끝냈다.

    ‘지온 소저가 저런 성격이었나? 텃세는 텄네.’

    말라 죽은 낙타라도, 말보다 큰 법이다.

    아무리 대장공주의 세가 전과 같지 않다지만, 그녀가 제 양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자 한다면 당연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고,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것이다.

    잠깐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장사 고고가 찾아왔다.

    걸교(*乞巧: 칠월칠석 날 저녁, 견우서와 직녀성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하여 달라고 빌던 옛 민간 풍속)를 위해 소녀들을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오직 혼인하지 않은 어린 규수들만을 위한 걸교는, 걸교루(乞巧樓)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지온이 다른 소녀들과 함께 옥로전(玉露殿)을 나오니, 멀지 않은 곳에 고운 빛깔로 단청을 하고, 사방을 트여 세운 누각, 걸교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무늬의 비단으로 세워진 듯이 보이는 걸교루는, 백 척 높이로 솟아 있었는데, 각종 보석으로 세밀하고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살면서 이리 아름다운 걸교루는 단연코 본 일이 없었던 지온은, 정말 깜짝 놀랐다.

    “역시 황궁은, 황궁이구나.”

    경소소가 걸교를 위해 지온을 걸교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저들은 앞다투어 준비한 바늘과 실을 꺼내어 들고 경쟁이라도 하듯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사실 그들처럼 신분이 되는 소저들은, 바느질 정도는 대충 꿰맬 수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이제 각자 흩어져 놀다가 궁연(宮宴)이 시작할 때를 맞춰 다시 옥로전으로 늦지 않게 돌아오기만 하면 될 터였다.

    자주 입궁하여 궁의 지리에 익숙한 경소소가 지온을 데리고 다니며 길을 알려주었다.

    “이쪽 길은 승원궁(承元宮)으로 가는 길이야, 폐하의 침궁이지. 그러니까 실수라도 절대 들어가면 안 돼. 그리고 화춘궁(華春宮)은 이쪽이야. 황후마마의 거처.

    그리고 청녕궁(淸寧宮)은 여기서 가까워, 언니. 태후께서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거든…… 아! 저쪽에 하나씩 보이는 게 취미궁(翠微宮)이랑 장복궁(長福宮)이야. 각각 현비마마랑, 신비마마께서 지내고 계셔. 남은 곳이 영수궁(靈秀宮)인데, 승원궁이랑 가장 가까워.”

    그러더니 갑자기 경소소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영수궁에 누가 사는지는 알지? 근데 그분이랑은 웬만하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아.”

    순간 지온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지온이 물었다.

    “그건 왜? 옥비마마는 옥형 선생의 후손이잖아. 그 집안은 명성도 높았을 텐데…….”

    “그것도 옛말이지, 뭐.”

    경소소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사실, 나도 그분이 도성에 돌아오신 지 얼마 안 됐을 땐 엄청나게 동경하고 그랬거든? 다들 옥형 선생께서 직접 가르친 손녀라, 능력이 사내도 이겨 먹는다고 들었거든. 그런 분이 궁에서만 지내야 한다니, 너무 아깝기도 하고. 그런데…….”

    “그런데?”

    경소소의 입술이 꼬물거렸다.

    “폐하의 마음엔 온통 그분밖에 없으시다 보니까, 다른 마마님들껜 늘 시큰둥하시고 매일 영수궁에서 그분이랑 부부처럼 지내시거든. 그런데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지 삼 년이 됐는데도 아직 후사도 없고…….”

    이야기할수록 마음이 복잡해지는지, 경소소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날 소리지.”

    지온은 그저 웃음만 지었다.

    황제에게 그리 크게 총애를 받으면서 후사조차 보지 못한다면 당연히 명성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출신이 낮은 이었다면 요녀가 비가 되어 그렇다며, 이미 요비(妖妃)라 욕을 들었을 것이었다.

    몇 대에 걸쳐 이어지던 옥씨 집안의 명성이 끊어지고 있었다.

    그저, 그 명성을 끊는 것이 ‘옥종화’란 이름이란 것이, 지온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언니, 그만 돌아가자.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이화원인데, 오늘 밤에 폐하께서도 군신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여셨거든. 괜히 여기 있다가 마주치면 안 돼.”

    지온도 그러자며 대답했다.

    그렇게 돌아가는 두 사람의 귀에 문득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고양이 소리에 의아해하는 사이, 갑자기 어린 궁녀 하나가 달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두 사람을 발견한 어린 궁녀는 급히 다가와 예를 올리더니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두 분, 고양이 한 마리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셨는지요?”

    작은 동물을 좋아했던 경소소가 고양이란 말에 얼른 물었다.

    “어떤 고양인데? 네가 기르는 거야?”

    어린 궁녀는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 울먹거렸다.

    “아주 귀여운 삼색고양이온데, 마마님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녀석이라 저희가 몰래 기르고 있었습니다. 장사 고고께 걸리면 분명 저희를 벌하실 거예요!”

    “일단 진정해. 방금 고양이 울음소릴 들었으니까, 우리가 찾는 걸 도와줄게.”

    어린 궁녀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다.

    “정말이세요? 감사합니다!”

    경소소가 돌아서더니 지온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지온 언니, 옥로전에서 아직 궁연은 시작 안 했잖아. 놀이하는 셈 치고 우리가 고양이 찾는 거 도와주면 안 될까?”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래도 너무 멀리 가면 안 돼. 네가 말한 대로 다른 신하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알겠지?”

    경소소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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