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41)화 (141/385)
  • 141화. 칠월칠석의 연회

    칠월칠석은 ‘여아절’로 큰 명절은 아니었지만, 궁에선 그날 하루 황후의 여가솔 몇을 청하여 입궁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올해는 전과 달리 무척 성대했다. 명문 집안의 여가솔뿐 아니라 황제도 군신들을 초대했던 것이다.

    현재 한미해진 지씨 가문은 당연히 참석할 자격이 될 리 만무했다. 그러나 들려온 다른 소식 하나가, 위씨의 머리를 쓰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조방궁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아이가 입궁을 해본 경험도 없을 텐데, 같이 갈 자매가 하나 있으면 좋잖은가!”

    그 소리에 쓴웃음을 지은 포 유모가 완곡히 말을 돌려 그녀를 말렸다.

    “대장공주께서 준비를 하시겠지요.”

    그래도 위씨는 포기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대장공주께는 지온이와 나이 비슷한 아이가 없지 않나?”

    포 유모는 계속해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장공주님 곁엔 없어도 정국공부에는 있잖습니까?”

    포 유모는 정말이지 이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큰 아가씨와 그리 난리를 치고 완전히 돌아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 큰 아가씨가 대장공주의 양녀로 들어갔단 소식에 또 그 덕을 보고 싶어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설사 함께 입궁한다고 해도 당연히 더 가까운 삼남가를 더 챙길 텐데!’

    김이 새어버린 위씨가 원망을 쏟았다.

    “망할 것이 어찌 그리 운이 좋아? 어찌 대장공주께서는 그런 것이 눈에 차신단 말이야!”

    ‘큰 아가씨가 안 차는데, 둘째 아가씨가 눈에 차실까…….’

    그런 생각을 하는 포 유모였지만, 그래도 입으론 연신 위씨를 위로했다.

    “부인, 그런 말을 앞으로 절대 다시 하시면 안 됩니다. 큰 아가씨께서 대장공주님의 양녀가 되신 것은 가문 전체에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조방궁에 자주 선물도 보내고 큰 아가씨와의 관계를 좀 개선하면, 혹시 알겠습니까? 정국공부와 왕래라도 하게 되어 둘째 아가씨의 혼사라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요.”

    위씨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알겠네.”

    어차피 이리된 마당에, 자신이 더 어찌하겠는가? 지서는 이미 여러 집안과의 혼사를 파투낸 상태라 더는 혼사를 미룰 수도 없었다. 반면 지온 그 아이는, 혼약을 파기한 후로는 길운이 들어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 않은가?

    ‘운명이란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인가?’

    * * *

    칠월칠석의 황궁 연회를 위해, 정국공부는 일찍부터 사방전으로 사람을 보내왔다.

    지온을 위한 옷을 만들고 입궁 예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는데, 지온을 가르치기 위해 왔다가 돌아간 유모의 입에선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지온 소저가 어찌나 훌륭하시던지요! 소인이 단단히 실력을 보여드릴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걸음을 하였사온데, 자세며 태도며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으시지 무엇입니까? 하여 이리 금방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정국공부의 노부인이 미소지었다.

    “지난번에 내 보니 확실히 뛰어나 보이더구먼.”

    그러고는 다시 유모에게 물었다.

    “그래, 대장공주는 어떻던가? 잘 지내는 것 같았나?”

    유모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마마께서는 아주 무탈하셨습니다! 얼굴에 늘 웃음이 걸려 있으셨어요. 심지어 소인께 농까지 던지시지 뭡니까? 날이 이리 더운데도 잘 드시고, 잘 주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척이나 안심되는 듯, 노부인이 말했다.

    “그럼 되었네. 난 그 아이가 응어리를 풀지 못하고 계속 그리 자기를 가두고 살지나 않을까 걱정이었어. 남은 평생이 얼마나 긴데, 어찌 그리 살겠나.”

    옆에 있던 정국공 부인이 노부인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분명 공주마마께서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봉아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우리도 앞으로 그 아이를 집안 식구라 생각하고 잘해주면 되는 것이지.”

    정국공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

    * * *

    눈 한 번 깜짝하니 날은 이미 칠월칠석의 연회 날이었다.

    지온은 대장공주와 함께 입궁하고 있었는데, 마차 안에 있던 대장공주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내가 조방궁 밖을 나서는 날이 올 줄이야.”

    지온이 미소지었다.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쉬운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마음만 달리 잡수시면 하지 못하실 일이 없으신 것이지요.”

    고개를 끄덕이던 대장공주가 샐쭉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계속 날 마마라 부를 테냐?”

    머뭇거리던 지온이 다시 불렀다.

    “어머님.”

    그제야 뿌듯한 웃음을 짓던 대장공주는 문득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입을 열었다.

    “이 나이가 되어 내가 너처럼 다 큰 딸을 거저 얻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음이야……. 널 이리 잘 가르치고, 키워준 능운진인에게 본궁은 정말 감사하다.”

    지온은 말없이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궁에 도착한 대장공주는 지온은 데리고 곧장 옥로전으로 향했다.

    지난 삼 년간 이런 일에 한 번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대장공주가 옥로전에 들어선 순간, 떠들썩하던 궁전에 침묵이 휘몰아침과 동시에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늘 대장공주는 평소와 다름없이 도포 차림을 하고 얼굴엔 입술연지만 발랐을 뿐, 화장은 전혀 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소박하고 정갈한 차림의 그녀에게선 여전히 고귀한 기운이 넘실거려 한껏 치장한 군주(*郡主: 친왕의 딸)와 현주(*縣主: 황족 여자의 봉호)들 사이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의 머릿속이 생각으로 바빠졌다.

    지금까지 황실은 삼대째 이어졌다. 그러나 그동안 무탈하게 자라 성인이 된 이는 아주 적어 결국 현재에 이르러 ‘공주’라는 칭호를 가진 이는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여양대장공주였다.

    그녀가 들어서자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에 군주(*郡主: 친왕의 딸) 하나가 가장 먼저, 대장공주에게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여양,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얼굴에 웃음을 띤 대장공주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안(壽安) 언니께서는 삼 년을 못 봤더니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수안군주(壽安郡主)가 대답했다.

    “놀리지 마세요, 여양. 그저 몇 해 전부터 일에서 손을 뗀 것뿐입니다. 이제 며느리에게 고생 거리를 맡기고 나니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리로 와, 앉으세요.”

    “그러셨습니까? 잘하셨어요. 쓸데없는 일에서 신경을 끄면 당연히 마음이 편해지지요.”

    대장공주가 빙긋 웃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저 말은 무슨 뜻으로 한 거지?’

    옥로전에 있던 많은 이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냥 한 말인가? 아니면 뭔가를 암시……?’

    그러나 사람들과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던 대장공주는 금방 지온을 데려왔다.

    “친척들을 소개해주마. 여기 이분은 수안군주시다. 전에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시던 분이시다.”

    수많은 이의 이목이 지온을 향해 날아들었다.

    삼 년간 두문불출하며 수양만 하던 대장공주가, 돌연 양녀를 들인 일은 분명 대사건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겠는가?

    다들 황실 직계가 완전히 끊어지게 된 후로, 내심 앞으로 강왕부의 천하가 펼쳐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왕비가 도성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조용히 지내던 대장공주가 돌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강왕비의 뺨을 매섭게 후려치며, 강왕부의 체면을 패대기치지 않았는가!

    이 모든 일이 바로 저 ‘양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온의 과거에 대해 수도 없이 캐고 다녔다고 볼 수 있었다.

    저 소녀는 나름 신비한 구석이 있는 소녀였다.

    어리디어린 나이에 능운진인으로부터 명겁(*命劫: 목숨을 잃는 환난)을 겪게 될 것이란 단언에, 지 소저는 능운진인을 따라 세상을 주유하러 집안과 부모 곁을 떠났다. 그리고 구 년이 흐른 후 다시 본가로 돌아온 지 소저는 여러 가지 모진 일들을 겪은 끝에 혼약을 파기했다.

    유씨 가문과 지씨 가문 모두 혼약을 파기한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다들 보고 듣는 것들이 있는데 그 까닭이 숨겨질 리가 있겠는가?

    아무튼, 집안에 난리가 벌어지고 내몰리듯 조방궁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된 소녀의 앞날은 까만 먹구름이 낀 듯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소녀가 내몰리듯 가게 된 조방궁에서 대장공주와 연을 맺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대장공주라면 뒷배 중에서도 엄청난 뒷배였으니, 그것이 소녀의 수완이라면 정말 대단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화신점이란 것도 신묘하기 그지없었으니…….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인가.’

    편안한 표정의 지온이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지온이 군주를 뵙습니다.”

    수안군주는 대장공주와 비슷한 나이였는데, 외모관리를 워낙 잘하여 마흔도 안 되어 보였다.

    지온을 요리조리 살피던 수안군주가 미소를 지었다.

    “다 같은 가족인데 군주라 부르니 멀게 느껴지는구나. 편하게 이모라 부르거라.”

    그러고는 지온을 칭찬했다.

    “어찌 이리 얼굴도 예쁘고, 태도 고울꼬! 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비교가 안 될 수가 있어야지. 자, 이모가 얼굴을 봤으니, 선물을 주어야지?”

    수안군주가 제 팔에 걸고 있던 팔찌를 빼 지온의 손에 쥐여주자, 사양하지도 않고 받아 챙긴 지온이 공손히 감사의 예를 갖췄다.

    “감사드려요, 수안 이모님.”

    수안군주를 시작으로, 나머지 군주와 현주들 모두 어찌나 손이 크고 후한지, 이번 입궁으로 지온은 큰 밑천까진 아니더라도, 작은 주머니 정돈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다.

    이윽고 정국공부 쪽 사람들이 도착하자 대장공주가 다시 지온을 데리고 그들을 찾아갔다. 지온은 안 그래도 인사를 다니며 얼굴을 익히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는데, 또 다른 친척들이 왔단 소리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지온이 어렵사리 친척을 모두 뵙고 인사를 마쳤을 때, 대장공주가 다른 소녀 하나를 불렀다.

    “소소(素素), 여기, 이 언니가 처음 궁에 입궁하여 사람들도 모르고, 길도 알지 못해. 그러니 네게 언니를 부탁하마.”

    정국공 부인의 딸인 소소는 열네, 열다섯 살쯤 되는 소녀였는데, 동글동글한 얼굴이 무척 귀여운 아이였다.

    소소가 방긋 웃음을 짓자 양 볼의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세요, 숙모님!”

    그러고는 소소가 지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지온 언니, 어디든 무조건 나만 따라오면 돼!”

    지온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자 소소가 말했다.

    “같은 식구끼리 무슨 그런 말을 해! 같이 가서 놀자, 언니!”

    지온이 대장공주를 바라보자,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가 보거라. 여기는 다 늙은이들밖에 없어, 어차피 네가 있어 봐야 재미도 없을 게야. 소소와 놀다 보면 새로운 사람들도 사귈 수 있겠지.”

    “네, 어머니.”

    지온이 인사를 하고 소소와 함께 멀어져갔다.

    두 사람이 멀어지자 정국공 부인이 두리번거리며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대장공주를 따로 불러 작게 물었다.

    “제가 도통 조방궁에 들릴 시간이 안 나 여쭙질 못했는데……. 마마, 양녀를 들이신 건 대체 무슨 계획이신 것입니까?”

    대장공주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을 말 하시는 겝니까?”

    정국공 부인은 제 시어머니와 생각이 달랐다. 정국공부 노부인이야 그저 대장공주가 삼 년을 그리 답답하게 살았으니 양녀를 들여 가슴에 진 응어리라도 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며느리인 그녀는 그보다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국공 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지온 소저가 확실히 외모도 수려하고, 자태나 예절도 부족하지 않지요. 그리고 듣자니 제법 능력도 좋다지요? 영수궁(靈秀宮)에 있는 그분에 비하여…….”

    “그만 하세요!”

    대장공주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그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겝니까, 형님! 저는 그런 짓 따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절 조카에게 여자나 보내려는 그런 사람으로 보신 겝니까?”

    정국공 부인은 무안해지고 말았다.

    “제가 생각이 너무 멀리 갔나 봅니다. 그래도 보이는 상황이 워낙…….”

    “그래도 저는 그리하지 않을 겁니다.”

    대장공주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저를 어머니라 부르는 이상, 그 아이는 제 딸입니다. 됐으니, 그만 태후나 보러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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