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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40)화 (140/385)
  • 140화. 단 한 번도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던 유신지가 이해가 안 가는 듯 입을 열었다.

    “무엇이오? 두 사람 설마 공무로도 왕래가 있는 것이오?”

    이 사건에 대해 유신지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던 지온은 바로 그에게 대답했다.

    “제 아버지가 얽힌 사건 문서에요.”

    유신지가 멈칫하며 물었다.

    “소저의 부친께서는 병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지온은 그저 웃음을 지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문서에 집중하자 유신지는 루안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 형, 어찌 된 거요?”

    주변을 살핀 루안이 손가락에 찻물을 찍어 탁자에 무어라 쓰자 순간 경악에 빠졌던 유신지가 곧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대리시에도 어쩌면 관련 문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공자님까지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지온의 말에 유신지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안 되지만 루 형은 된다는 것입니까? 어째 차별 대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온 소저.”

    지온이 미소지었다.

    “루 대인께서는 본인 스스로가 자유로울 수 없는 분이시잖아요. 그리고 저와 연루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고요.”

    ‘하긴, 그렇군…….’

    하지만 그래도 유신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루안이 물었다.

    “관아에는 안 가나?”

    유신지는 움직이기 귀찮았다. 어차피 나중에 돌아가 외부에 처리할 공무가 있다고 전하면, 바로 위 상사가 제 체면을 생각해 아마 그냥 넘어가 줄 터였다.

    그때, 그의 시종 부주가 제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자님, 관아에서 빨리 오라고 재촉이 왔습니다! 무슨 큰 사건이 터진 모양인데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유신지였다.

    “그럼 먼저 가보겠소. 가보겠습니다, 지온 소저.”

    지온과 루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장소를 옮기겠소?”

    유신지가 부주와 함께 사라진 뒤에 루안이 묻자,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로 내려온 두 사람은 조방궁의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했다.

    앞서 걸어가는 지온의 치맛자락이 이리저리 살랑일 때마다, 루안의 심장도 함께 이리저리 뛰었다.

    그날, 별원에서 그는 지온을 수면 위로 데리고 올라왔었다.

    웃음을 지은 그녀는 말했었다.

    “이게 바로 온통 별뿐인 세상이란 거예요.”

    그 후 루안은 그녀를 데려다주었고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이번에도 서아가 말을 전해준 덕에 자신이 지온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던가!

    지난 며칠,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 물 속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 후로 커다란 용기를 내어 찾아왔건만…….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루안은 그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옥종화는 지씨 가문의 큰소저가 되어 다시 자신과 만났고, 때론 의도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놀리고 자극했다.

    처음엔 루안도 지온의 그런 말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대체 어떤 여인이 먼저 혼인하자 말한단 말인가?

    그러나 한 번, 두 번, 농담이 이어질수록, 그 또한 지온이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거 받으세요.”

    정신을 차린 루안의 손엔 은표가 몇 장 들려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번 돈이죠?”

    지온이 배시시 웃었다.

    “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주는 거예요!”

    “…….”

    “사실 집안 사업을 내가 물려받질 않았어요. 그래도 돈 버는 일은 내 전문이라 앞으로 조금씩 더 많이 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 다수전 같은 거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돼요. 돈 관련 된 일은 내가 다 해줄게요.”

    “…….”

    루안은 갑자기 손이 너무 뜨거워 데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진심으로 혼인에 필요한 지참금을 벌고 있단 말인가?’

    “아, 루 대인님……. 지금까지 돈을 몇 번이나 챙기셨죠?”

    루안은 말없이 그녀가 숫자를 세는 것을 듣고 있었다.

    “처음은 다수전, 두 번째 다루에서 찻값. 세 번째 양고기 전병…… 그러고 보니 우리가 같이 나갈 때마다 다 내가 샀네요? 이 정도로 많으면 대인을 제게 넘겨야 하지 않을까요?”

    태양은 지면을 지글지글 사르고, 여름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며 짜증을 부추겼다.

    그러나 루안은 홀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뭐 하세요?”

    들려온 음성에, 그제야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 듯 정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지온이 몸을 돌려 정자로 들어가며 말했다.

    “거절하더라도 그런 얼굴을 보일 필욘 없잖아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진 루안은 그제야 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담하지 마시오!”

    그가 낮게 읊조렸다.

    까르르 웃은 지온이, 천천히 부채를 흔들며 루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좀 빨갛게 변한 것 같네? 날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

    “왜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지온이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루 대인께서는 제가 대인께 부족한 사람이라 싫으신 것입니까?”

    루안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이런 일을 벌인 건, 그저 무애해각만을 위해서가 아니오. 그리고 북양을 위해서도 있지. 부친께서 암살당하신 일에 의심 가는 정황이 아주 많소.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결국 정해왕부처럼 존재조차 사라지고 말 거요.”

    고개를 모로 틀고 생각에 잠겼던 지온이 그를 대신해 말 속에 숨겨진 뜻을 건져 올렸다.

    “그러니 너무 감동할 필요도 없고, 더욱이 혼인은 당연히 해선 안 된다는 말인가요?”

    “…….”

    지온이 황당하단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루 대인. 내가 감동 좀 했다고 혼인하자고 하는 그런 사람이었나요? 대체 나에 대해서 어떤 오해를 하는 거냐고요!”

    그녀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 옥종화가 열여덟이 되도록 혼사를 거론하는 이야기조차 나오지 않는 일을 없었을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뒷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처음 만난 옛사람이오. 그리고 현재로선 유일하게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 지금의 가까운 관계와 특별한 시점이 만들어낸…….”

    “알겠어요.”

    지온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저도 강요할 순 없죠. 유 대부인께서 벌써 여러 번 혼사를 주선하고 싶단 말씀을 하셨어요. 사실 유씨 가문이라면 나쁠 게 하나 없는 집안이죠. 가풍도 바르고 깨끗하고, 웃어른께서는 자애로우시고, 형제자매들도 서로 사이가 좋고요. 으음? 우리 루 대인께서 얼굴이 왜 그리 안 좋으실까요?”

    루안의 목소리가 답답하게 흘러나왔다.

    “일부러 날 화나게 할 필욘 없지 않나. 당신이 유씨 가문에 마음이 없는데 굳이 사서 고생을 할 이유가 뭐냔 말이오.”

    “사서 고생이라뇨?”

    지온이 빙긋 웃었다.

    “내년이면 나이가 열일곱인데, 유씨 가문이 아니라면 다른 집안이라도 찾긴 찾아야죠. 대인께는 버림받았어도, 그래도 시집은 가야 하잖아요?”

    “아니…….”

    루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하고 싶던 말이 다시 들어갔다.

    사실 그도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전에도 말이다.

    지온이 옥종화였던 시절, 그녀는 구혼자가 부족하지 않았음에도 열여덟이 될 때까지 혼인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었다.

    루안은 찾아가 청혼할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입을 떼기도 전에, 선제가 보낸 사자가 옥종화를 먼저 찾아갔었다.

    다시 입을 다문 루안을 보며 지온은 더는 묻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온은 그만 자리에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몇 걸음을 뗀 그녀가 다시 멈춰 섰다.

    “루안, 난 단 한 번도 태자비가 되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흠칫한 루안의 눈 속으로 천천히 멀어져가는 지온의 뒷모습이 박혔다.

    * * *

    “으, 더워…….”

    짧은 옷으로 챙겨 입은 야우가 혀를 축 빼물고 장원의 돌 탁자에 늘어져 있었다.

    안에서 나온 한등이 부채로 야우의 얼굴을 툭 치며 장난을 쳤다.

    “세상에 이렇게 큰 개가 다 있구먼!”

    부채를 뺏은 야우가 파닥파닥, 팔이 빠져라 부채를 흔들었지만, 땡볕에 이슬 두 방울로 목을 축인 듯, 여전히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도성은 왜 이렇게 더운 거냐? 그래도 우리 북양이 좋지. 지금 때면 겹옷을 입어도 괜찮잖아.”

    “올해가 유난히 덥네요. 팔월만 지나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고는 한등이 핀잔을 줬다.

    “인내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 공자님은 산처럼 미동하나 없으시구먼.”

    두 시종이 고개를 돌리자, 서재의 열린 창문 너머로 루안의 옆모습이 보였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은 그는 사건 문서에 집중한 채였다.

    야우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넷째 공자님은 진짜 대단하시단 말이야. 우리 주인님보다 더 참을성이 있으셔.”

    한등이 야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뒤에서 주인의 뒷말을 하는 건 나쁜 거지만……. 장난으로라도 우리 공자님이랑 왕야의 성정을 비교하는 게 좀 그렇긴 하지요.”

    잠시 제 주인의 성정을 떠올린 야우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아, 그렇지.”

    사공자님이 나이는 어리지만, 북양왕가에서 가장 신중하고 무게감 있는 분이 아니던가.

    그게 아니었다면 당시 사공자님을 도성으로 보낼 생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우리 전하는…….’

    입술을 꾹 비틀어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아낸 야우가, 땀을 닦고는 한등에게 말했다.

    “과일 좀 내오자. 사공자님 벌써 일하신 지가 한참인데 얼마나 더우시겠냐? 말로 안 해도 딱 알 수 있잖아, 어?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거 아니냐.”

    한등이 눈을 홉떴다.

    “본인이 먹고 싶은 거 아니고요?”

    야우가 킬킬 웃었다.

    “킬킬……. 우리가 과일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뭘.”

    * * *

    그렇게 우물로 향한 두 시종은 바구니를 던졌다.

    우물에 던져두었던 시원한 수박을 한등이 반으로 썩둑 썰어 먹기 좋게 손질하여 루안에게 가지고 갔다.

    “공자님, 수박 좀 드시고 더위 좀 식히세요.”

    시간이 좀 흘러서야 사건 문서를 보던 루안의 정신이 돌아온 듯, ‘오’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루안의 집중한 모습에 한등은 알아서 물러나며 내심 크게 감탄했다.

    ‘공자님은 역시 대단해! 이렇게 더운 날에 저리 열심히 공무를 보시다니!’

    “수박 드세요! 수박!”

    두 시종이 외치는 소리에, 각자의 방에서 일하던 관리들도 밖으로 나와 포도 덩굴 아래로 모여들었다.

    수박 한 조각을 들던 고찬의 눈에 여전히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 루안이 들어왔다.

    “대인께서는 참으로 성실하시구먼!”

    성실한 루 대인의 사건문서는 이미 이 각이 지나도록 미동조차 없었다.

    그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건 문서 위에는 은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열 냥짜리 은표가 무려 서른 장이나 있었다.

    한참 지나 밖에서 수박을 먹던 이들이 모두 흩어진 뒤에야, 루안은 긴 숨을 내쉬며 은표 다발을 들었다.

    그러고는 탁자에 놓인 단지를 열었다. 단지는 안은 컸지만, 입구가 작아서 무언가를 보관하기에 좋았다.

    그는 은표를 한 장씩 단지 안으로 밀어 넣고는 다시 뚜껑을 덮었다.

    ‘단지가 가득 차면 서원 하나 건설할 만큼은 되지 않을까? 무애해각 같은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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