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38)화 (138/385)
  • 138화. 세상이 온통 별천지였다

    내시가 두 사람을 데려다주어 두 사람은 궁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곧 말고삐를 쥔 한등이 지온의 마차 앞에 서서 지온의 시녀와 이야기하는 모습이 루안의 눈에 들어왔다.

    루안과 지온이 나오자 한등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공자님!”

    “그래.”

    루안은 곧 한등의 손에서 말고삐를 건네받아 말 위에 올랐다.

    지온 역시 마차에 올랐고, 마차는 천천히 황궁에서 멀어졌다.

    루안은 마차 뒤를 따라가며 말을 몰았다.

    늦은 밤이라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루안 역시 더욱 빠르게 말을 달렸다.

    한등이 끌고 온 말은 한 필 뿐이라, 제 주인이 속도를 내며 채찍질하는 것을 보면서도 한등은 그저 두 다리로 죽어라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등이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저 두고 가지 마세요!”

    그러나 한등의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 * *

    지온의 마차는 패루 앞에서 멈췄다.

    당금(當今)의 황제는 야간에도 통행할 수 있게 해주었기에, 조방궁 밖의 긴 거리는 막 사람들로 붐볐다.

    마차에서 내린 지온은 곧 루안도 도착한 것을 보고는 물었다.

    “식사 안 하셨을 텐데, 같이 식사하실래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가는 주루로 들어간 그들은 다소 구석진 곳에 있는 별실을 요청했다. 별실에 들어선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지만, 지온은 얼마 먹지 않고 곧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에 맞지 않는 거요?”

    그제야 입을 연 루안이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말을 꺼냈다.

    “오늘로 공주마마께서 양모가 되셨으니 앞으론 뒷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기쁜 일 아니겠소?”

    고개를 든 지온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기쁜 일이죠.”

    자신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좋은 일이었다.

    대장공주가 자신을 양녀로 삼았으니, 자신은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계층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셈이었다. 앞으로 제 사촌 오라버니가 된 황제를 오라버니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한 셈이야.’

    “그런데 왜 그리 억지로 웃는 거지?”

    조용히 두 사람의 술잔에 술을 채운 지온이 입을 열었다.

    “아마 옥종화와는 완전하게 끝난 거겠죠?”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그녀가 채운 술잔을 들어 제 목구멍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더 좋은 시작을 위해.”

    미소를 지은 지온이 그의 축배를 따라 읊고는,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독한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목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지온은 이것이 고통인지, 시원함인지 헷갈렸다.

    “오늘 별이 밝네요!”

    그녀가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달 없는 하늘에 별빛으로 빛나는 은하수만이 가득했다.

    지온은 별을 손에 쥐어 보려는 듯 창밖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별이 잡히겠는가? 몇 번 손을 쥐던 지온은 빙긋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던 루안의 가슴이 흔들렸다.

    “나와 같이 가볼 곳이 있소.”

    루안의 말에 휙 돌아선 지온이 루안을 보며 웃었다.

    “어디로요?”

    “가보면 알겠지.”

    * * *

    아마도 마신 술 때문이었으리라.

    생각은 짧아지고 몸은 가벼워졌다. 지온이 돌아보니 그들은 어느새 거리에 나와 있었다.

    묶어 놓았던 고삐를 풀고 말에 오른 루안이 지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부도, 시녀도,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시간인지라, 어쩐지 사랑을 위해 도피하는 남녀가 된 것만 같았다.

    지온이 그에게 제 손을 포개자 루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그녀는 루안의 앞에 앉았다. 루안이 가볍게 말고삐를 당기자 말은 곧 달리기 시작해, 금방 거리를 벗어났다.

    귓가를 스치는 칠월의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자니 두 사람은 몸이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빠른 속도감은 사람을 취하게 했다.

    말이 멈췄을 때, 지온은 서각이 있는 별원에 도착했단 것을 깨달았다.

    “이곳으로 가지.”

    이번에 루안은 지온을 서각이 아닌 서과원(*西跨院: 과원은 안채 곁에 있는 뜰이란 의미로, 서쪽에 있는 뜰이란 의미)으로 데려갔다.

    정원 담에 동그랗게 낸 월동문(月洞門)을 넘어간 지온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 넓디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굽이치는 다리가 호수를 가로지르고, 조용한 정자는 홀로 바람을 맞고 있었다.

    루안이 그녀와 함께 정자에 올랐다.

    “여기의 별이 더 반짝이는 것 같지 않소?”

    하늘과 호수를 보던 지온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많이요.’

    호수의 중간이지 않은가.

    수면에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자, 은하수 사이에 있는 것처럼 세상이 온통 별천지로 보였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하나, 하나가 부족해요.”

    루안이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휘청, 일어나 정자의 난간 끝으로 걸어간 지온이 갑자기 몸을 뒤로 던졌다.

    루안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늦고 말았다.

    지온은 호수에 풍덩 떨어졌다.

    멈칫했던 루안의 심장도 철렁하고 떨어졌다.

    “종화!”

    외치는 순간, 루안은 삼 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의 그녀도 이렇게 물에 빠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진 루안은 그대로 호수로 뛰어들어 아래로, 아래로 자맥질했다.

    얼음장 같은 호수의 물과 부력은 그를 자꾸만 수면 위로 올려보내려고 했지만, 루안은 죽을힘을 다해 아래로 헤엄쳐 죽기 살기로 그녀를 찾았다.

    그때, 루안의 손에 따뜻한 것이 걸려들었다.

    손을 움켜쥔 그가 곧장 지온을 끌어와 위로 올라가려 헤엄을 치려할 때, 돌연 그의 온몸이 꽁꽁 사로잡혔다.

    옥종화와 같은 것이 하나 없는, 그러나 꼭 같은 눈빛을 한 얼굴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루안의 입술로 부드러운 감각이 밀려들었다.

    * * *

    조방궁 입구 밖까지 뛰어온 한등이 거친 숨을 몰아쉬다, 익숙한 마차가 보이자 단숨에 마차로 뛰어갔다.

    “서아 누님!”

    마차 밖에 앉아 있던 서아가 야무지게 만두를 먹으며 말했다.

    “이제 온 건가요? 쓸모없는 사람.”

    혀를 빼문 한등이 원망을 쏟았다.

    “다들 그렇게 빨리 가는데, 이렇게 쫓아 온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고요. 저희 공자님은요?”

    한등의 질문에, 서아가 주루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식사 중이세요.”

    “아.”

    제 배를 문지르던 한등이 서아를 향해 얄팍하게 미소지었다.

    “저도 밥 안 먹었는데. 누님, 만두 한 알만 주십쇼.”

    그러자 서아가 성을 냈다.

    “돈 가진 거 없어요? 가서 사 먹어요!”

    “내가 가서 사 먹는 게, 누님이 나눠주는 것보다 맛있을 리가 없잖아요?”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밤, 칠월칠석이 다가오는 어느 밤이었다.

    * * *

    7월이었다.

    대서(大暑)를 지나, 후텁지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문밖을 나서면 찌는 듯한 더위에 육수가 뽑혀 나오듯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이른 아침부터 조방궁 근처의 주루를 찾은 유모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반 위에 놓인 얼음을 담은 여러 개의 대야에선 서늘한 기운이 흘렀고, 탁자 위 우유와 과일들 역시 얼음이 함께 조각된 그릇에 담겨 시원함을 더했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유모지의 이마엔 여전히 땀이 비쳤다. 연신 부채를 팔랑이는 그의 모습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이윽고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지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모지는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사이에 혼약이 있었을 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다가, 도리어 혼약이 취소된 후에야 그녀를 더 많이 만나고 있지 않던가?

    과장이 아니라, 집안에서 함께 지내는 친지 여동생들을 제외하면, 그녀는 자신이 가장 많이 만난 여인이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진짜 중요한 건 말이야…….’

    “안 덥소?”

    유모지가 그녀를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숱도 많은 머리칼이, 길게 늘어지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땀 한 방울이 안 보인단 말인가!

    “안 더운걸요?”

    지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소설에서 못 보셨어요? 고수들이란 무릇, 겨울엔 뜨거운 화로와 같고, 여름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법이거든요.”

    “지금 본인이 고수라는 거요?”

    유모지가 입을 삐죽였다.

    “됐소. 도둑도 내가 대신 잡아줘야 하는 사람이 퍽이나 고수겠소.”

    유모지는 ‘진짜 지온 소저’가 도성에 막 돌아왔을 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고수가 아무 때나 힘을 쓸 것 같으세요? 고수는 격이란 게 있거든요.”

    장난처럼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인 지온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유모지는 지온의 장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소.”

    두 사람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문하러 갔던 유신지가 올라왔다.

    “가게 얼음을 너 혼자 다 쓰게 생겼다. 그런데도 이리 덥다고 난리를 치면 어쩌자는 거냐?”

    유모지가 땀을 닦으며 자신은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듯 당당하게 소리쳤다.

    “나 원래 더위 많이 타는 거, 형도 알잖아!”

    유신지는 어딘가 모자란 듯 보이는 제 동생을 바라보며 더욱 걱정했다.

    “다음 달이 향시인데, 날씨가 보아하니 올해는 더위가 길어질 것 같구나. 괜히 시험 치르다 쓰러지지나 말거라.”

    유신지의 말에 유모지는 금방 울상이 됐다.

    “이래서 시험을 볼 수나 있겠냐고!”

    결국, 매를 벌어 꿀밤을 맞는 유모지였다.

    “허튼 생각일랑은 꿈도 꾸지 말아라! 오늘도 해야 할 이야기 빨리빨리 끝내고 서원으로 돌아가 수업이나 받아!”

    꿀밤을 맞은 이마를 문지르며, 유모지가 지온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물건은 가져왔소?”

    웃음을 눌러 참은 지온이 대꾸했다.

    “도둑이에요? 정산하는 건 좋은 일인데, 못된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왜 그렇게 묻고 그러세요.”

    그녀의 말이 끝날 때쯤이었다. 주루의 계단을 올라오는 다른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른 아침부터 차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 또 있네?’

    상대는 열예닐곱쯤 되는 어린 서생들이었다. 소년들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한바탕 떠들어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뭔 놈의 날이 이렇게 덥냐!”

    “와, 진짜. 밖으론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다.”

    “그래도 여긴 좀 시원하네. 여기서 복습하는 거 어떠냐?”

    금방 소년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듯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소년 하나가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장사(章四)야, 장사, 여기 복습하러 온 거 아니었냐? 근데 무슨 소설책을 들고 왔어?”

    열예닐곱. 한창 원기가 충만하여 방방 뛰어다니고 싶은 소년들에게 가만 앉아 서책만 들입다 파게 하는 것은, 안 그래도 고문에 가까운 일일 터였다. 당연히 소설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소년들의 관심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소설인데? 나도 한번 보자!”

    “산해검협전? 재밌냐?”

    산해검협전이란 말에, 지온의 시선도 그들을 향해 돌아갔다. 유모지가 쓴 소설이 아니던가!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운 유모지는, 제 소설에 대해 좋은 평가를 듣고 싶은 두근두근한 기대감과 동시에, 혹시나 혹평이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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