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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37)화 (137/385)
  • 137화.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조경 장군 부인은 넋이 빠진 상태였다.

    대장공주의 마차가 하늘을 달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치고 나갔다. 조경 장군 부인은 그 마차에 치이기라도 한 듯이 한쪽으로 내팽개쳐져 있었다.

    꼬박 삼 년을 두문불출하며 난택산방 밖으로는 걸음도 하지 않던 대장공주가 겨우 이 일 때문에 입궁을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건 다 제가 벌인 사단이었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냐!’

    이대로 대장공주가 황제에게 발고하면 무슨 벌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아니야, 아니지. 나뿐만이 아니라 강왕부도 있잖은가.’

    제 큰조카인 강왕세자를 떠올린 조경 장군 부인은 그야말로 몸이 달달 떨려왔다.

    얼굴에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렸다가 다시 새파랗게 되길 몇 번.

    두려운 마음에 당장 도망치고 싶은 조경 장군 부인이었지만, 자신에겐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못난 아들이 있단 것에 생각이 닿았다.

    결국, 이를 바득 간 그녀의 입술이 마부를 향해 열렸다.

    “강왕부로 가자!”

    * * *

    강왕세자가 다급히 입궁했다.

    강왕세자는 입궁하러 가는 내내 황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장공주와 황제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웃음까지 비춰가며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이야기를 안 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신, 폐하를 뵙습니다.”

    강왕세자를 보자마자 황제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일어나세요.”

    그제야 강왕세자는 알 수 있었다.

    ‘와서 발고만 한 것이 아니로구나! 저들의 수작이 성공했어!’

    속에서 화가 치밀었지만, 강왕세자는 일단 참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이미 삼 년 전의 그 바보가 아니었으니, 전처럼 황제를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리 늦은 시간에 형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황제는 빙글빙글 웃어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황제의 물음에 강왕세자는 내심을 감추며 큰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신, 조금 전 외숙모님에 관한 일을 듣고 마음이 크게 불안하여, 이리 늦은 밤에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폐하께 이 일을 해명하고, 둘째로 고모님께 사죄드리고자 함입니다.”

    그러고는 대장공주는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인 그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외숙모께서 깊은 생각 없이 조방궁에서 문제를 일으키셨습니다. 외숙모께서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었습니다. 고모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강왕세자를 슬쩍 쳐다본 대장공주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지했단 말 한마디로 그저 넘어가려는 겐가? 자네 말 한 번 쉽게 하는구먼.”

    강왕세자의 허리가 더욱 아래로 굽었다.

    “고모님께서 화가 나신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조카가 이미 외숙부님께 말씀을 드렸으니 앞으론 제대로 외숙모님을 단속하실 것입니다. 다음에 다시 고모님을 찾아뵙고 제대로 사죄드리겠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강왕세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고모님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얼마 전 제 어머님께서는 병을 얻으시어 현재 와병 중이십니다. 하여 바깥일엔 관여하기 어려우신 상황이지요. 더구나 제 어머니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이유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지온 소저와 저희 왕부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조경 장군 부인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은 강왕세자는, 조경 장군 부인의 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자백까지 한 마당에 그걸 어찌 피한단 말인가?

    그래서 강왕세자는 자신을 낮춰 조씨 가문의 죄는 인정하되 제 어미의 죄는 부정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대장공주가 끝까지 강왕비가 죄가 있다며 물고 늘어지며 분노를 토한다면 아마도 지금의 국면을 전환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장공주의 분노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도리어 공주는 웃음까지 머금는 것이 아닌가?

    대장공주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본궁은 폐하의 생모를 오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고한 친왕의 비가 의지할 곳 하나 없이 고아가 된 소녀를 두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더구나 방법이 너무 저급하지 않았습니까? 강왕비가 그럴 리가 없지요. 본궁도 믿습니다.”

    흠칫한 강왕세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믿……으신다고요?”

    “그렇네.”

    대장공주가 보살처럼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본궁이 안 믿을 리가 있겠는가? 제 아들 걱정에 조경 장군 부인이 순간 잘못된 생각을 한 것이겠지. 그래서 다른 이에게 분풀이하려던 게 아니겠는가?”

    그 말에 강왕세자는 말문이 막혔다.

    ‘그 성정 강한 대장공주가 어찌 저리 대범하게……!’

    “고모님…….”

    “되었네.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됨세. 자네도 밖에서 종일 바빴을 텐데, 집에 오자마자 또 이런 일까지 해결해야 하니 많이 힘들겠지.”

    대장공주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강왕세자의 불안도 더욱 거세졌다.

    ‘불안하구나.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나온단 말이지! 입궁하여 대장공주와 한판 단단히 벌이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강왕세자의 시선이 황제에게 닿았을 때, 그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 완전히 똑같았던 것이다. 입으론 온갖 자비로운 말을 다 하면서도, 표정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모습…….

    이미 제 모친인 강왕비와 이 사건이 관련되어 있단 것을 확신하지만, 그저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왕세자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폐하, 어머니께서는 정말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황제가 웃으며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형님, 더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짐은 당연히 형님을 믿지요. 숙모님의 병세는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지셨습니까? 좋아지시면 형님께서 숙모님께서 즐기실 수 있으실 만한 것들을 찾아, 다른 생각도 하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 홀로 계시다 보면 생각이 한쪽으로만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폐하!”

    강왕세자의 마음에 조급함이 들어찼다.

    “다른 이들은 어머니를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도 믿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황제가 무슨 소리냔 듯 되물었다.

    “짐도 믿고 있습니다.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십니까, 형님?”

    ‘그게 믿는 사람의 표정이냐!’

    드디어 강왕세자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인생에 있단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애초에 이쪽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변명이 들어갈 여지조차 없지 않은가?’

    황제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래, 그럼 아닌 거로 해주마.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이런 망할! 답이 정해지긴 뭐가 정해져?!’

    강왕세자가 답답해하는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형님, 다른 용건은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그만 들어가 쉬십시오.”

    “폐하……!”

    강왕세자가 한 번 더 최후의 발버둥을 쳐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황제가 그의 말을 뚝 잘라 먹었다.

    “아, 며칠 후에 짐이 연회를 열 생각입니다. 그때 좋은 소식을 전할 생각이에요.”

    “여덟째가 간 것이 바로 얼마 전입니다. 연회라니 좋은 생각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요의 이야기가 나오자 황제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좋지 않을 것이 무엇입니까? 가연(*家宴: 집안 잔치)이라 집안사람끼리 식사 한 끼 하는 것뿐인데, 그런 것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강왕세자는 속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어린 줄로만 알았던 황제가 이젠 말로 자신의 입까지 틀어막고 있잖은가!

    “형님께서 막내를 지극히 아끼셨단 것을, 짐도 알고 있습니다.”

    황제가 다시 온화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나 고모님께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강왕세자가 멈칫했다.

    “고모님께 좋은 일이라면……?”

    “있네!” 

    대장공주가 냉큼 대답했다.

    “본궁이 조금 전에 양녀를 들여 슬하에 자식이 생긴 참이었네. 담이 자네도 이 고모에게 자식이 생긴 것을 기뻐해 주겠지?”

    강왕세자의 시선이 천천히 공주의 옆에 있는 지온에게로 옮겨가는 사이, 대장공주는 이미 지온에게 인사를 시키고 있었다.

    “온아, 네 사촌 오라비께 인사를 올리거라.”

    “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지온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강왕세자를 향해 몸을 낮췄다.

    “지온이 사촌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어요.”

    얼굴에 선명히 떠오른 경악한 표정을, 채 숨기지도 못한 강왕세자의 귀로 대장공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자네 외숙모에게 고맙구먼. 조경 장군 부인이 아니었으면 본궁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야. 조경 장군 부인이 그리 난리를 쳐준 덕에 본궁이 완전히 마음을 먹을 수가 있었네. 그런데 자네 왜 말이 없는 건가? 설마 사촌 동생이 싫은 것인가?”

    “그,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강왕세자의 속은 터질 것 같았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장공주와 일전을 벌일 생각에 노기가 등등하여 입궁했건만……!’

    비축한 힘을 터트려 한 방 날릴 때마다 어째 솜뭉치를 때리고만 있었다.

    무속 사건은 이미 황제와 이야기가 끝난 게 분명했다. 황제와 대장공주는 겉으론 믿는다고 하지만 표정으론 ‘응, 범인은 너!’라고 외치며 자신에게 변명의 기회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거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녀까지 들이다니!

    이번 가연이 열리고 나면 황궁 밖의 사람들은 대장공주가 왜 갑자기 양녀를 들였는지 사방으로 알아볼 것이 뻔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처럼 번져,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겠는가?

    ‘그게 집 담벼락에 집안 죄상을 낱낱이 밝혀 거는 것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야!’

    * * *

    강왕세자는 결국 실패했다.

    그가 새파래진 얼굴로 돌아가자 대장공주는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대장공주는 지온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수해야 할 자가 있다면, 복수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속이 뻥 뚫리는 일인 것이다.

    ‘세상과 씨름하지 않겠다고 난택산방에 갇혀 사는 건 그저 자신을 속일 뿐인 게야.’

    제 오라버니를 궁지에 몰아 강제로 양자를 들이게 하여 황위를 빼앗은 자들이었다. 오라버니의 후사를 끊은 이들이 평생 호의호식하는 것을 어찌 가만히 두고 보란 말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은 목숨으로 갚을 때가 됐어!’

    목적을 모두 이룬 대장공주가 몸을 일으켰다.

    “폐하의 쉬는 시간을 다 빼앗았습니다. 시간도 너무 늦었으니, 저희는 그만 물러가 보겠어요.”

    황제가 웃음을 머금었다.

    “고모님, 조심해서 가십시오.”

    그러나 돌아가려 전 밖을 나선 그들 앞으로 흔들리는 등롱이 다가왔다.

    앞서있던 나이든 유모가 대장공주를 향해 예를 갖췄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공주마마께서 입궁하셨다는 소식에 태후마마께서 소인을 보내셨습니다. 청녕궁(*淸寧宮: 태후의 거처)에 잠시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주름으로 얼룩진 늙은 유모의 얼굴에 대장공주가 미소를 거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라 보고 싶기도 하구먼. 유모, 안내하게.”

    “네, 마마.”

    그러고는 두 사람을 향해 대장공주가 말했다.

    “먼저 돌아가 있게나.”

    지온이 몸을 낮추며 대답했다.

    “네.”

    대장공주의 신형이 사라진 것을 본 지온이 루안과 서로 시선을 맞부딪혔다.

    두 사람 모두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려던 때, 가마 한 대가 두 사람을 스쳐 전 앞에 멈췄다.

    지온의 귀로 내시의 밝은 문안 소리가 들려왔다.

    “옥비마마, 어찌 예까지 오시었사옵니까?”

    부드러운 음성이 내시의 문안에 대답했다.

    “폐하께서 아직 궁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하여 와보았네.”

    그러자 내시가 반겼다.

    “마마와 폐하께서는 참으로 뜻이 통하시나 봅니다. 폐하께서도 마침 궁으로 돌아가시려던 참이셨습니다.”

    “그랬는가?”

    아마도 그때 황제가 전 밖으로 나온 듯 그녀의 목소리에 기쁨이 어렸다.

    “폐하!”

    루안이 고개를 숙여 지온을 살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우린 그만 나갑시다.”

    “…네.”

    루안의 말에 지온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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