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36)화 (136/385)
  • 136화. 대장공주께서 자네를 수양딸로 삼기 원하시네

    청옥은 의아한 얼굴로 지온과 루안을 바라보았다.

    ‘두 분, 지금 뭐 하시는 거지? 내가 조금 전에 뭘 들은 거야?’

    감정을 추스른 지온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청옥에게 물었다.

    “다들 많이 놀랐나요?”

    “아? 아!”

    청옥이 얼른 대답했다.

    “아니에요!”

    지온이 미소지었다.

    “그렇게 놀라면서 아니라니. 그만 정리하고, 다들 돌아가 쉬세요.”

    “네.”

    청옥이 후전으로 돌아 들어가자, 지온이 다시 루안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떻게 이렇게 바로 찾아왔어요?”

    “운이 좋았소.”

    루안이 대답했다.

    “근처에서 공무를 보던 중에 피리 소리를 들었소. 그 김에 직접 찾아온 것이오.”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미소지었다.

    “대인이 직접 나타나 준 덕에 효과가 더 좋았어요. 본래 의술이 고명한 의원을 데려와 그 자리에서 바로 아이를 살려낼 생각이었거든요. 그럼 뒤집어쓴 오명도 바로 씻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대인이 곧장 나타나 준 덕에 사숙과 입씨름을 할 필요도 없었거든요.”

    많은 관졸이 보고 있던 터라 능양진인은 수작을 부릴 기회조차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루안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방궁에서 당신의 처지가 이런 줄 몰랐소. 아무리 그래도 무속의 죄까지 뒤집어씌울 줄이야.”

    지온이 미소지었다.

    “괜찮아요. 오히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될 것 같거든요. 대장공주께서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앞으로 제게 나쁜 짓을 할 마음을 먹으려면 좀 더 고민해야 할 거예요.”

    그녀가 대장공주와 좀 더 가까운 관계가 되려 했던 것도 뒷배를 만들어 두려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공주마마가 이렇게 의리 넘치는 분일 줄은 몰랐어.’

    직접 사방전까지 찾아와 조경 장군 부인을 막아서더니, 대놓고 저들을 압박해 얼굴에 먹칠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삼 년간 두문불출해왔던 약속까지 깨며 그들을 고발하고자 황궁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지온의 마음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어린 선고 하나가 급히 그녀를 찾으며 들어왔다.

    “지 사저! 지 사저!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저에게 입궁하란 명령을 내리셨어요!”

    사방전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어린 선고의 말에 흠칫 놀랐다.

    멀리 보이던 등롱의 불빛이 점점 다가올수록, 황궁 내시의 복색 역시 더욱 선명해졌다.

    두 사람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 * *

    ‘처음 하는 입궁도 아닌데…….’

    황제가 있는 전(殿) 밖에 선 지온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사념들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종화였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도성에 왔던 적이 있었다.

    제 나이 열두세 살, 여 선생이 장원 급제를 했을 때였다.

    대장장이 출신이 장원급제했단 소식은, 온 세상에 두루 퍼져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에 선제는 특별히 그의 스승에게 큰 상을 내렸는데, 그가 바로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무애해각의 선장인 옥형 선생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큰상을 받고, 황제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도성에 왔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태자와 의안왕을 만났다.

    옥형 선생과 종화가 다시 상해로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제는 태자와 의안왕을 그녀의 할아버지 손에 맡기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엔…….’

    생각에 잠겼던 지온은 가벼운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루안 역시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의 손을 거친 사건이니 보고를 올리기 위해 황제를 찾아뵌 것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지온은 자신을 안심시키는 듯한 그의 눈빛을 받으며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정신 차리자. 지금 난 지씨 가문의 큰소저 지온이지, 옛날의 종화가 아니야.’

    겉모습이 바뀌었으니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황제라 해도 자신을 알아볼 수는 없을 터였다.

    이윽고 내시가 알현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 낭중과 지온 소저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깊게 숨을 들이쉰 지온은 긴장을 돋우며 전 안으로 들어갔다.

    “신 루안, 폐하를 뵙습니다.”

    “신녀 지온,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상석에 앉아 있었고, 흐트러졌던 도포와 도관을 정제한 대장공주는 매고고가 기립한 가운데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척이나 편안한 모습이었다.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먼저 루안을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듣자니, 오늘 일을 자네가 해결했다더군. 참으로 공교로워.”

    루안은 천연덕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사건이 벌어졌을 때, 마침 신이 근처에서 공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조방궁에서 무속에 관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벼이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장 수하들을 이끌고 조방궁으로 향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황제는 크게 안심한 듯했다.

    “때맞춰 잘 찾아가 줬네. 그 자리에서 사건을 해결하고 끝을 낸 것이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무속에 관한 소문이 퍼져 백성들이 불안에 동요했을 걸세. 자네라면 제대로 일을 처리할 거라 짐은 믿어 의심치 않아.”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가 다시 물었다.

    “이 사건은 정말 조경 장군의 처가 꾸민 것인가? 배후에 다른 사람이 더 있지는 않겠지?”

    황제의 본심은 대장공주에게 확실하게 못을 박으려는 것이었다. 대장공주가 자신을 찾아와 원통함을 읍소하기는 했지만, 강왕비와 연루된 어떠한 증거도 없는 것 같았기에, 황제는 대장공주가 강왕비에 대한 선입견에 치우쳐 자연스레 그리 연관시켰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루안이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아닌가?

    “조경 장군 부인이 이미 이실직고를 하였으니 확실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황제는 순간 긴장하며 물었다.

    “무엇이냐?”

    “신이 조사하니, 조경 장군 부인이 최근 강왕비를 보기 위해 강왕부를 다녀간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능양진인 역시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 일 이후에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루안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대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본궁이 모함한 것이 아니었지요? 일찍이 강왕비가 벌인 일이라 그리 말씀을 드렸는데, 폐하께서는 믿질 않으시더니…….”

    민망해진 황제의 속에서 불같은 분노가 솟았다.

    ‘대체 황제의 생모라는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야!’

    근래 요의의 일로 제 어미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는 크게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매일 같이 강왕부로 약재와 사람을 보내 그녀의 병세가 어떤지 알아보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런 사달을 내다니!

    ‘큰 형님은 능력도 좋은 분이 대체 뭘 하시는 게야? 어찌 제대로 단속 하나 못하시고!’

    황제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대장공주는 내심 덩실덩실 격렬한 춤사위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저 핑계로 강왕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았던가?

    ‘조씨 집안과 강왕비의 관계가 있으니, 써먹지 않는 것이 너무 아깝단 생각에서 시작된 단순한 핑계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다니! 고것이 아주 죽고 싶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들었구먼! 이젠 도망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요망한 것!’

    이런 상황이 돼버렸으니, 루안을 바라보는 대장공주의 눈빛은 자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젊은 것이 능력이 출중하구나. 역시 루연의 아들이야!’

    “짐은 당연히 고모님을 믿습니다.”

    황제가 부드럽게 말했다.

    “조만간 짐의 큰 형님을 입궁시켜 제대로 꾸짖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대장공주가 슬쩍 물러났다.

    “너무 심하게 말씀하진 마세요. 폐하의 큰 형님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정이 아닙니까? 요즘 매우 바빠서 집안을 잘 챙기지 못했을 겁니다. 본궁이 약속대로 더는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을 터이니, 폐하께서도 강왕세자를 불러 언급만 하신단 생각으로 가볍게 말씀하세요.”

    그러나 모든 말이 상대에게 의도한 대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황제의 귀엔 대장공주의 말이 다른 의미로 들렸다.

    ‘조방궁에서 수양하는 고모님조차 형님더러 가만있지 못한다니, 형님은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야? 그래. 조정의 대신들을 끌어들여 강왕부의 세력을 공고하게 하는 일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선제가 제위 하실 때라면 우리 집안을 위해 그러는 거라 여기겠지만, 지금의 황제는 짐이 아닌가? 그런데 형님이 여전히 그러고 돌아다니는 건, 대체 누굴 대적하기 위함이란 말인가?’

    황제는 가슴에 차오르는 질문과 의심들을 눌러가며, 대장공주를 향해 대답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모님.”

    그리고 황제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지로 누르며, 루안과 함께 들어와 말 한마디 없이 서 있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세나 몸가짐이 썩 보기에도 좋아, 한눈에도 대갓집 규수로 보이는 소녀였다.

    ‘그런데 어찌 눈에 익구나.’

    황제는 문득 가슴이 저리는 것을 느끼며 소녀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자네가 지씨 집안의 큰소저인가?”

    지온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지온이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짐이 잡아먹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고개를 들어 답하거라.”

    그에 멈칫한 지온이 대답했다.

    “네, 폐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지온의 눈이 부시도록 맑고 하얀, 그리고 고운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드는 지온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던 황제는, 가슴에서 솟는 알 수 없는 기대와 갈망을 느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황제는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가슴에 오래도록 담아 놓았던, 무엇보다 자신을 매달리게 하는 소망과 관계된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소녀의 얼굴이 확실하게 시야에 들어온 순간, 황제는 솟구치던 기대와 갈망이 산산이 부서지며 허탈함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아름다운 규수였다. 궁중에 있는 미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그러나 이상하구나, 어쩐지 저 얼굴이 아니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그러다 황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얼굴이 아니면? 어쩌란 것이야?’

    머릿속을 헝클어뜨리는 사념을 몰아낸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군계일학의 규수로구나. 그러니 고모님께서 이리 자넬 예뻐하시는 것이겠지.”

    대장공주가 미소지었다.

    “당연하지요, 이 고모가 눈이 모자란 사람이었습니까? 외모는 별 것 아닙니다. 이 아이가 정말 뛰어난 것은 선량한 마음이에요. 이 아이가 곁을 지켜주지 않았으면 본궁은 아직도 난택산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것이에요.”

    황제의 웃음소리가 전을 울렸다.

    “고모님의 눈에 들었으니, 무엇이든 훌륭한 것이 당연하겠지요.”

    황제와 대장공주의 연이은 칭찬세례에 어색해진 것은 지온이었다.

    ‘가만히 있다 갑자기 웬 칭찬을 이렇게 해대는 거야?’

    그러나 옆에 있던 루안의 미간은 슬그머니 좁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하는 모습을 보니,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고모님께서 지온 소저를 가까이 두고 예뻐하시면, 짐도 안심할 수 있겠지요.”

    대장공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고모님. 저 아이를 정국공부에 데려가 인사를 시키고 얼굴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궁에서도 그리 해야 하니……. 아니면 짐이 황후에게 가연(*家宴: 집안 잔치)을 준비하라 말을 전할까요?”

    ‘가연이라니?!’

    지온과 루안의 시선이 부딪혔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무슨 뜻이지? 황가의 가연이 지온과 무슨 상관이지?’

    루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대장공주가 미소지었다.

    “본궁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폐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소개를 해두면 저 아이에게도 좋을 거예요. 그럼 또다시 정신없는 것들에게 이리 괴롭힘당하는 일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리 하시지요! 지온 소저.”

    “네, 폐하.”

    지온의 대답에 황제의 입이 열렸다.

    “대장공주께서 자네를 양녀로 삼기 원하시네, 자네의 마음은 어떤가?”

    루안의 얼굴에 경악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온의 표정은 루안보다 더 놀라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뭐가…… 왜……? 웬 양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