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35)화 (135/385)
  • 135화. 중요한 단서

    대장공주가 다시 제 얼굴을 감싸 쥐며 외쳤다.

    “이 고모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며 공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울면서 이야기까지 풀어야 하는데, 내게 그런 고명한 연기 기술이 있을 리가 있는가.’

    합이라도 맞춘 듯, 마침 안으로 들어온 매고고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마마께서 예를 갖추지 못하신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마마께서 너무도 큰일을 당하시어 마음이 상하여 그런 것이옵니다. 지난 삼 년간 단 한 번도 조방궁을 떠난 적이 없던 공주마마가 아니셨습니까? 그런데도 마마께서 이리 큰 모욕을 당하시다니, 폐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다 쪼개질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 황제는, 드디어 매고고의 말 속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아냈다.

    “누가 고모님을 괴롭히기라도 한 것인가? 어찌 된 것이야? 누가 감히 고모님을 모욕한단 말이냐?”

    황제 앞에 엎드린 매고고가 울며 말했다.

    “정녕 모르시는 것이옵니까, 폐하?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강왕비께서 공주마마께 어찌 그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강왕부에 찾아가 강왕비께 인사를 올리지 않은 이유뿐이옵니다, 폐하. 그러나 이는 폐하께서 직접, 공주님은 그런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허락하신 일이 아니시옵니까?”

    “…….”

    침묵하던 황제가 물었다.

    “숙모님께서 무엇을 하신 것인가?”

    더듬더듬 울음을 참아가며 있었던 일을 들려준 매고고는, 이야기를 마치며 쓰러지듯 앞으로 엎어져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는 눈가를 어르는 그녀의 내심은 겉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몇 년간 기술을 안 썼더니, 연기가 전만큼 안 되는구먼!’

    한편, 매고고의 이야기에 황제는 어찌 된 상황인지 깨달았다.

    “조경 장군 부인이 조방궁에 무속의 죄를 뒤집어씌울 흉계를 꾸며 고모님을 해하려 했다, 이 말인가?”

    매고고가 울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모님께서 혹 너무 과하게 생각하신 것이 아닌가? 짐의 생각으론 조경 장군 부인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던 듯 보이네. 그리고 숙모님 역시 어쩌면 이 일에 대해 모르실 수도 있고…….”

    그때, 대장공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지만 새빨갛게 변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친모를 지키고 싶으신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어차피 친고모도 아닌 본궁을 폐하께서 아끼실 리가 없지요.”

    ‘무슨 말을 그리……!’

    당황한 황제가 곧장 부정하고 나섰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짐은 선제의 뒤를 이었으니, 고모님은 당연히 짐의 친고모님이십니다!”

    그러자 대장공주가 당장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럼 저를 이리도 괴롭히며 목을 조여 오는 이를, 폐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지 않냐며 반문하려던 황제였으나 대장공주는 그에게 발언할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조방궁은 본궁의 것입니다. 조방궁에서 사람을 해치려는 흉계를 꾸몄는데 그것이 어찌 본궁의 일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무속의 죄가, 겨우 전(殿) 하나 관리하는 장사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죄라 생각하십니까? 결국, 그 죄는 본궁의 목을 조이겠지요! 본궁과 아무런 원한도 없는 조씨 가문에서 본궁을 해하려 들 이유가 있겠습니까? 돌고 돌아, 결국 폐하의 숙! 모! 가! 본궁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이겠지요!”

    대장공주가 굽혔던 허리를 쭉 펴며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보아하니 왕비 자리에 질린 강왕비가, 태후 자리에 앉고 싶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 *

    능양진인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신경 써주는 이가 없어 자리에 무릎을 꿇은 그대로 정신을 놓고 있던 그때, 문득 귓가로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지온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숙,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목마르지 않으세요? 차 드세요.”

    웃음을 지은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의 지온을 본 능양진인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신을 깨닫고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능양진인은 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던지라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고 말았다.

    다행히 옆에 있던 지온이 그녀를 부축하며 조용히 말했다.

    “사숙, 이제 조심해서 걸으셔야겠어요. 다음엔 부축해줄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지지 않고 쏘아붙이려 입을 열었던 능양진인은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이번 흉계가 실패했으니 대장공주는 당연히 자신에게 화가 났을 터였다. 일이 끝난 후에 자신까지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일단은 조용히 수그리고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창피 좀 당하면 되는 게 아닌가? 내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

    “고……맙구나.”

    억지로 미소를 짜낸 능양진인은 지온이 내준 차까지 모두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지온은 내심 감탄했다.

    어쩌다 보니 제 스승이 되어버린 능운진인이 주지 자리에 앉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리 낯짝 두꺼운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만 보아도, 스승님이 사숙을 이기지 못한 게 차라리 정상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능양진인은 올라오는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구나. 사숙은 그만 돌아가 참회를 해야겠다.”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조심해서 돌아가시지요, 사숙.”

    지온은 사방전 앞까지 능양진인을 배웅한 뒤, 두 눈으로 능양진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 누군가 지온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에게 겁을 먹은 것인가?”

    지온이 돌아보자 루안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녀가 샛눈을 떴다.

    “대인의 눈에는 소녀가 야차로 보이시는 건가요?”

    지온을 가만히 보고 있던 루안이 대답했다.

    “야차가 그리 생겼으면 지옥도 천국이 되겠군.”

    지온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말을 잘하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루안은 뭐라 대답하려다 사방전 뒤에 있는 전에서 청옥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 * *

    “고모님!”

    황제가 큰 소리를 냈으나 대장공주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스로 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황제가 다시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해명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강왕비는 짐을 낳아준 생모가 맞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저 숙모님일 뿐입니다.”

    다시 대장공주가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는 그리 생각하실지 모르나, 강왕부도 그리 생각한답니까? 다른 생각이 없는 이가 어찌 조방궁을 두고 이런 흉계를 꾸민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후로 본궁은 조방궁에서 나가지도 않은 채 수양에만 정진했습니다. 본궁이 언제 폐하께 문제를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까?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저를 가만 놔둘 수 없는 강왕부를 본궁이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정말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단 것을 저더러 대체 어떻게 믿으란 말이에요!”

    “고모님, 짐이 곧장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내릴 테니, 고정하십시오. 그런 일을 벌이다니, 짐이 반드시 조경 장군 부인을 제대로 처벌하라 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왕부는…….”

    “결국, 폐하께서는 친어미는 풀어주고 싶단 말씀이시군요.”

    황제는 어쩔 수 없이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일에 숙모님이 연루되어 있다면, 짐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대장공주의 음성이 그제야 다소 누그러졌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본궁도 그만 마음을 놓겠습니다.”

    목적을 달성한 대장공주는 매고고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황제에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용포의 매무새를 정리해주는 그녀의 모습에선, 조금 전 울며불며 난리를 치던 사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 그 사람은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대장공주가 따뜻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리 사소한 일에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것이 무엇이랍니까.”

    황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전엔 비단 삼척에 목까지 매겠다더니, 그게 갑자기 사소한 일이 돼 버린 게야?’

    대장공주는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봄바람 같은 말투로 그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 모든 일에 진지하실 것 없어요. 그래도 폐하의 생모인데 일이 커지면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정식으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된다면, 올라오는 어사(*御史: 관직명 주로 탄핵의 일을 처리함)들의 탄핵 상소에 주무실 시간도 없으실 겁니다.”

    사실이었다.

    황제의 생모가 대장공주를 모해하려 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사건의 진실 여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기회라고 생각한 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생각만으로도 역정이 차오르는 비난을 퍼부어댈 것이 뻔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황제는 그제야 다소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저를 생각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고모님.”

    대장공주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고모로서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본궁은 폐하의 숙모가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강왕비는 낭비벽에, 사치스럽고, 속내는 바늘 끝도 안 들어갈 만큼 작고 옹졸한 사람입니다. 도성에 돌아온 후로 남부와 북부의 상인들이 왕부를 끊임없이 출입한답니다. 각양각색의 진귀한 것들이 여름에 내린 우수 끝에 불어난 물줄기처럼 왕부로 흘러 들어가기 바쁘고, 성대한 연회도 밤에 달뜨는 듯 열린다지요? 그런데도 무엇이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벼락같이 노성을 토한다더군요. 폐하, 여론의 힘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다 폐하의 어진 성품까지 그에 엮여 도마 위에 오르면 그간 쌓은 폐하의 명성은 어찌 되겠습니까?”

    말을 하는 중간중간, 대장공주는 있지도 않은 눈물을 닦았다.

    “폐하께서는 지난 삼 년간 각고의 노력을 하신 끝에 이제야 모든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되신 것을 이 고모가 모르겠습니까. 얻을 땐 힘들었어도,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이 명성이란 것이에요. 폐하를 본궁이 아끼니 하는 말입니다.”

    황제는 마음에 작은 감동이 일었다.

    “고모님…….”

    “이 사건은 더 조사할 필요 없을 겁니다.”

    대장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대로 조사가 들어가면 결국 곤란해지는 것은 폐하가 될 게 아닙니까. 이 고모야 수모를 좀 당해도 괜찮아요. 폐하를 위해서라면 본궁도 강왕비에게 한발 물러서 줄 수도 있어요. 단, 다시는 이런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폐하께서 제대로 단속하여 고삐를 쥐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무조건 그리하겠다는 대답 말고 황제가 달리 할 말이 있겠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모님. 짐이 앞으로는 고모님께서 다신 이런 수모를 겪지 않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조씨 가문은 명을 내려 처벌이 필요한 이들은 처벌할 것이고, 숙모님 쪽 역시 짐이 제대로 고삐를 쥐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장공주가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그리 마음을 써주시니, 이번 일은 본궁도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본궁의 조방궁이 억울하게 당한 것까지 그리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그 말에 황제가 당장 약속했다.

    “짐이 크게 상을 내리라 당장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에 대장공주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리 정성을 보이시다니!”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대장공주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조방궁의 한 사람에겐 절대 섭섭하게 상을 내리시면 안 될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고모님?”

    대장공주가 긴 한숨을 뱉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 고모가 아이를 가지고 싶었어도 낳지를 못했어요. 부마께서 세상을 떠난 후로 조방궁에서 수양하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막으려야 막을 수도 없었지요.

    능운진인에게 제자가 하나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들어보셨겠지요? 수년간 세상을 떠돌다, 올해 초에 도성으로 돌아온 아이입니다. 효심이 깊은 아이라 돌아오자마자 제 스승을 위해 기도를 올리려 조방궁에 들어 수양하고 있지요. 과부살이를 하는 본궁에게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그 아이가 자주 찾아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어찌 마음을 쓰는지, 나비까지 불러다 본궁을 기쁘게 해줬더랬어요.”

    대장공주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고모가 마흔이 넘어서야 슬하에 자식을 두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그녀의 말에 뭔가를 느낀 듯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나비를 불러들인 이가 그 아이였습니까! 이번 일에 무고하게 모함당한 것이 그 아이가 아닙니까? 그래서 고모님이 그리 화가 나신 거로군요.”

    “맞아요.”

    대장공주의 얼굴에 노기가 깃들었다.

    “문 밖 출입도 없이 과부살이를 하는 늙은 공주에게 무슨 바람이 있겠습니까? 자식 같은 아이 하나 곁에 두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무엇이 과하다고, 그 아이에게 무속의 죄까지 뒤집어씌우다니! 그것이 본궁과 맞서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황제가 급히 나서서 그녀를 달랬다.

    “고모님 고정하십시오. 이제 고모님께 무례히 대하는 이가 있다면, 짐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위로가 되었던지 대장공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모는 참으로 기쁩니다.”

    잠시 고민하던 황제가 대장공주를 향해 물었다.

    “고모님, 혹, 그 아이를 고모님의 양녀로 들이려고 하십니까?”

    그 한 마디에 대장공주의 마음이 흔들렸다.

    “양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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