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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34)화 (134/385)
  • 134화. 입궁

    불현듯 대장공주가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부인, 그 반응은 본궁이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게 만드는군. 설마 자네, 이 사달을 구경하기 위해 때를 맞춰 찾아온 건가?”

    조경 장군 부인은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며, 가까스로 미소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

    “아닌가?”

    대장공주가 능양진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이실직고할 것이 무엇인가?”

    대장공주의 시선을 받은 능양진인이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곧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겠사옵니다. 실은 빈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사옵니다.”

    “오?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능양진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장공주가 비록 권력을 잃긴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목숨 하나쯤은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황궁에서 맡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여전히 노여움을 산 상태가 아니던가.

    ‘어쩌면 황궁에선 이 일을 빌어 입막음을 위해 살인멸구하려 들지도 모르지. 당연히 강왕부와도 척을 질 순 없으나, 그날 강왕비에게 들은 이야기 있으니…….’

    결심이 선 능양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고고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사질이 최근 난택산방을 자주 찾게 되면서 빈도의 심중에 질투가 생겨, 그만……. 그래서 빈도가 이리 악한 흉계를 꾸미고 말았습니다! 모두 빈도의 잘못이니, 마마, 부디 죄 없는 다른 무고한 분께는 노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러는 능양진인의 시선이 옆에 있는 조경 장군 부인에게로 향했다.

    대장공주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 그랬나?”

    그러고는 대장공주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평온하여 마치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듯했다.

    능양진인이 죄를 모두 가져가 뒤집어쓰자 안심하고 마음을 놓았던 조경 장군 부인은 돌연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죄 없는 무고한 분께는 노하지 말아 달라면서 왜 날 쳐다보는 것이야? 그게 죄를 지은 자가 나라고 화살을 돌리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조경 장군 부인은 벌컥 화를 냈다.

    “내게 누명이라도 씌우겠다는 게야?!”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감히 그녀와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능양진인이 고개를 떨궜다.

    “모두 빈도가 잘못한 것입니다. 다른 분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자네……!”

    조경 장군 부인은 화가 치솟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말끝마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가!

    ‘저 천한 것이!’

    “마마, 절대 저자의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신부는 그저 조방궁에 향을 올리러 왔다가 우연히 상황을 마주쳤을 뿐이옵니다!”

    대장공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제 찻잔에 차를 채웠다.

    매고고가 의아한 듯 물었다.

    “조경 장군 부인, 능양주지는 부인을 지목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경 장군 부인이 입을 열었지만, 혀가 굳은 듯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랬다. 능양진인은 그녀를 지목해 언급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저 천한 것이 수년을 권세가들과 어울리더니, 사람 잡는 기술이 아주 무르익었구먼! 따질 수도 없게 만들었어!’

    겉으로는 능양진인이 모든 것을 이실직고한 듯 보였다. 그러나 과연 뒤에서 모든 것을 사주한 이도 능양진인이라고 대장공주가 믿겠는가?

    ‘딱 봐도 표정이 얼음장 같은 것이, 안 믿고 있어!’

    여전히 빠르게 들려오는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조경 장군 부인은 이제 제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찻잔을 내려놓은 대장공주가 지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온아, 넌 어찌 생각하느냐?”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앉아 있던 지온은 제 이름이 불리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신녀는 능양사숙을 믿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이 방법이 얼마나 악랄한 방법인지 알고 계신 분은, 사숙뿐이기 때문이지요.”

    지온의 시선이 능양진인을 스쳤다.

    “무속의 죄를 범하면 죽음밖에 답이 없습니다. 그런 흉계를 세울 정도라면 독하고 악랄한 인간일 것입니다. 사갈의 심장에, 이리의 양심을 가지고 날뛰는 미친 자가 분명하겠지요!”

    말하는 족족 쏟아지는 독설에 능양진인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저 계집이! 날 돕겠다는 게야, 산 채로 파묻어버리겠다는 게야!’

    “오?”

    “먼저, 사숙은 제게 이리 악독하게 하실 만큼 큰 원한이 없으십니다. 신녀가 난택산방에 자주 들었다는 것이 이유라기엔 너무 과도하지요.”

    대장공주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이 크게 번진다면 본궁 역시 무사치 못할 것이야. 능양주지는 지난 삼 년간 본궁을 모신 것에 모자람이 없었네. 본궁도 그런 능양주지가 그리 악독한 자라 믿지 않아.”

    능양진인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깔깔 웃고 있었다.

    ‘나와 부딪힐 땐 그렇게 사람 속을 긁어대는 화상이 따로 없더니, 내 편에서 다른 사람 속을 뒤집으니 이리 시원할 수가 없구먼!’

    지온의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는, 무속을 범한 죄는 가볍게 볼만한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마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주마마마저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문제인데 능양사숙은 어찌 되시겠습니까? 조방궁이 다른 사람 손에 망가지게 되면 사숙 역시 그리될 텐데 굳이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있겠는지요?”

    “그렇지.”

    대장공주가 동의했다.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하여 신녀는, 사숙께서는 내부의 속사정은 조금 아실 수 있겠으나, 주모자는 아니리라 여겼습니다.”

    빙긋 미소를 지은 지온이, 무릎을 꿇고 앉은 능양진인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 때문에 억지로 자신에게 칼을 겨누시다니, 사숙, 고생이 크셨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능양진인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 아니네…….”

    조경 장군 부인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는 가운데, 하필이면 밖에서 들려오던 주판 소리가 멎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온 루안이 조금 전의 보여주었던 장부를 보이며 보고했다.

    “찾았습니다, 마마.”

    “찾았는가? 빠르구먼.”

    대장공주가 웃으며 물었다.

    “말해보시게. 본궁을 해하려던 자가 누군가?”

    대장공주를 바라보던 루안의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이 떨어지기 직전, 조경 장군 부인이 무릎을 꿇으며 소리를 질렀다.

    “마마! 저는 그저 지씨 집안의 저 못된 계집을 혼내주려 했을 뿐, 마마를 해하려던 생각은 추호도 없었사옵니다!”

    놀랄 것도 없는 전개에 대장공주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점포의 주인장이 조경 장군 부인, 자네 사람이었다, 이 말인가?”

    조경 장군 부인이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그녀가 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그러나 정말 마마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사옵니다. 지난번 아들 녀석이 조방궁에 방문했다가 지 소저의 일에 휘말려 임창백부의 자제와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그것이 도성에 소문이 돌아 웃음거리가 된 것이 분하여 갚아주려 했던 것일 뿐, 마마와는 추호도 관련이 없사옵니다!”

    그러나 대장공주의 차가운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본궁 또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네. 그러나 그 일이 아니라도 자네 아들의 평판은 이미 들어주기 어려울 만큼 나쁘지 않은가? 그런데 겨우 그런 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여아에게 이리 악랄하게 손을 썼단 말을, 본궁 더러 믿으란 말인가!”

    조경 장군 부인은 당황했다.

    ‘지금 대장공주가 날 살려주려는 건가? 갑자기 착해졌다고?’

    그때 대장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죄를 뒤집어쓸 필요 없네. 자네는 본궁을 해할 이유가 없겠지만, 다른 이에겐 이유가 있겠지 않겠는가.”

    대장공주가 조경 장군 부인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자네 작은 시누는 잘 지내시는가? 도성에 돌아온 소식은 들었네만, 아직 본궁에겐 얼굴도 비추지 않았다네.”

    그녀의 작은 시누가 누구던가? 강왕비가 아니던가!

    조경 장군 부인은 순간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눈앞에서 앉아 있던 대장공주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포를 툭툭 털어 정리한 대장공주의 입에서 명이 떨어졌다.

    “매, 입궁을 준비하거라!”

    * * *

    늦은 밤임을 무릅쓰고 대장공주가 입궁에 나섰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조방궁을 나선 길이었다.

    조경 장군 부인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친 것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가 무슨 소릴 해도 대장공주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조경 장군 부인은 아무런 위협도 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방궁의 여관까지 불러 정중히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더욱 그녀를 두렵게 했다.

    ‘일이, 일이 너무 커졌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지만, 조경 장군 부인은 여전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모 잃은 계집 하나 처리하려던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만 엮이게 된 게 아니라, 강왕비까지 끌고 들어가게 될 판이었다. 안 그래도 강왕비에 대한 강왕세자의 불만이 높아지던 상황이 아니던가? 그 와중에 외숙모까지 대장공주의 분노를 샀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강왕세자가 대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우리 노야는…… 우리 조씨 집안은, 강왕부만 의지하고 사는데…….’

    오싹한 기분과 함께 조경 장군 부인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후회,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리 큰일이 될 줄 알았으면 참을 것을……!’

    대장공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미 완전히 망가진 아들의 평판에 추문 하나 더 붙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른 후회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 * *

    최근 들어 황제의 기분은 무척 좋은 상태였다.

    막 정무를 마친 황제가 후궁으로 향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시 하나가 들어왔다.

    “대장공주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흠칫한 황제는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고민했다.

    “누구라 했느냐?”

    선제에게 여동생은 딱 하나라, 대장공주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이도 한 사람뿐이었다.

    “여양대장공주이시옵니다, 폐하.”

    “고모님께서?”

    황제는 의아했다. 대장공주는 지난 삼 년간 조방궁을 벗어난 적도, 당연히 입궁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내시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 이미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비키거라, 폐하를 뵐 것이다!”

    들려오는 소리에 매우 놀란 황제가 얼른 말했다.

    “어서 고모님을 모셔라!”

    이윽고 관이며, 도포가 엉망으로 흐트러진 대장공주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폐하! 그리도 제가 용납이 안 되셨습니까!”

    들어와 울부짖듯 소리친 그녀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얼굴을 감싸 쥔 채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양대장공주가 어찌?!’

    놀라 넋을 놓고 있던 황제는 옆에 있던 호 공공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달려가 대장공주를 일으켜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고모님? 어찌 이리……?”

    “폐하!”

    덥석, 대장공주가 황제의 용포를 붙들었다. 새빨갛게 변한 눈과 표정이 너무도 처량했다.

    “저를 남겨 두시는 것이 어려우시면 말씀을 하세요. 본궁이 비단 삼척에 목을 매고 떠나드리겠습니다. 폐하, 어찌 본궁에게 이러시는 것입니까? 저 넓은 황릉에 이 늙은 칠 척의 육신 하나 눕힐 곳을 내어주는 것이 그리도 아까우신 겝니까?”

    “고모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짐이 어찌 고모님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십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겐지, 그만 눈물을 그치시고 말씀을 해보세요…….”

    말을 하는 황제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능양주지, 그 멍청한 것이 들키기라도 한 것이야? 아니지, 그 일은 이미 잘 무마하고 지나갔다 하지 않았어? 이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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