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33)화 (133/385)
  • 133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고개를 떨군 지온은 꾹, 웃음을 눌러 참았다.

    ‘난택산방을 꽤 다니면서 대장공주님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막무가내이신 분인 줄은 몰랐네.’

    지금 대장공주는 능양진인의 면전에 대고, 내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죄를 네가 다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능양진인이 대체 무슨 수로 반대를 하고 나선단 말인가? 주지 자리에 계속 궁둥이를 붙여야 하는 이상, 대장공주는 밉보여선 안 되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이 말이 틀려도, 옳다고 해야 했다.

    “루 대인,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있던 루안은, 대장공주가 원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그림을 완성하고자, 맨 먼저 쓸만해 보이는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 역시 알았다.

    ‘나야 얌전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다.’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신, 곧바로 저들에게 형을 행하여 뒤에서 사주한 주모자를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이 된 대장공주는, 마침내 조경 장군 부인을 챙길 여유가 생긴 듯 시선을 돌렸다.

    “부인, 이리 얼굴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먼. 가서 차나 들겠나?”

    조경 장군 부인은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장공주의 차가운 미소를 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장공주를 위시하여 나란히 선 조경 장군 부인과 능양진인은, 차를 마시기 위해 사방전으로 향했다.

    당연히 지온 역시 함께 가야했다. 지온이 이들의 뒤를 따르며 루안 곁을 스치려는 찰나, 지온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렀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으나,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뭘 말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만히 미소를 지은 지온이 다시 사방전으로 향했다.

    몸을 돌린 루안은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여봐라.”

    “네!”

    “사람을 붙여 아이와 노 의원을 의원으로 보내라.”

    “네!”

    루안이 노 의원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는 말했다.

    “아이를 부탁하겠네.”

    그러자 노 의원이 제 수염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대인. 제가 보니 대인께서는 공명정대한 좋은 관리인 듯하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는 제게 맡겨두십시오. 삼일 안에 회복시키겠습니다.”

    “고맙네.”

    불쌍한 아이와 나이든 노인을 돌려보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악한 자들에게 철퇴를 내리는 일뿐이었다.

    두 사람을 보내고 루안은 고개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을 만큼 그의 눈빛에서 음산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고찬.”

    “네, 대인!”

    “저들과 제대로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으니, 장소를 알아보게.”

    고찬의 대답이 우렁차게 울렸다.

    “알겠습니다!”

    흉신악살(凶神惡煞)과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 관졸들의 기세에 이대복 모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대인!”

    금동자 같은, 청순하고 고운 외모를 가진 젊은 관리는, ‘살아있는 지옥의 염라대왕’이란 별호로 불리는 자였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대도 염라대왕의 신색은 조금의 변화조차도 없었다.

    관졸들은 죄인들을 한쪽에 있는 다른 전으로 끌고 들어갔다. 구경하던 구경꾼들은 이미 관졸들에 의해 모두 흩어진 지 오래라, 죄인들이 어떤 식으로 형을 당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참혹한 비명만이 간간이 죄인들의 소식을 전해올 뿐이었다.

    * * *

    뉘엿뉘엿 해가 산을 넘을 무렵, 루안이 사방전에 들었다.

    “공주마마.”

    대장공주가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빠르구먼. 알아보았는가?”

    “그렇습니다.”

    루안의 대답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알아보니 확실히 저들을 뒤에서 사주한 이가 있었습니다. 신이 사람을 보내 잡고 보니 한 점포의 주인장이었습니다.”

    “오?”

    대장공주가 물었다.

    “그 뒤까지 찾을 수 있겠는가?”

    조경 장군 부인의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어찌, 이럴 수가! 이리 빨리 알아냈단 말이야?! 루안이란 자가 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그러나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사람을 사서 한 일인지라 그녀는 이미 뒤처리를 깨끗하게 해둔 터였다. 그 주인장은 조씨 집안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루안의 대답은 그렇지가 않았다.

    “조사하더라도 배후와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찾고자 한다면 못 찾을 것은 없습니다.”

    “어찌 찾지?”

    루안이 눈짓을 주자 고찬이 바로 작은 상자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 상자 안에는 장부와 계약서들이 들어있었다.

    “점포가 누구의 명의로 되어있든, 결국 주인 집안을 위해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점포에서 번 돈이 결국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지만 확인할 수 있으면 사주한 진짜 주모자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공주의 명령이 떨어졌다.

    “더 기다릴 게 뭐가 있는가? 찾게!”

    “네, 마마.”

    그때부터 조경 장군 부인은 이 자리가 더욱 가시방석으로 느껴졌다.

    ‘루안 저자가 어찌 저리 자신을 하는 게야. 진짜 찾아내는 거 아니야?’

    그 점포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었다. 그러니 점포에서 걷어 들인 돈 역시 그녀의 전낭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장부에서 제대로 지웠던가?’

    다급해진 조경 장군 부인이 입을 열었다. 

    “마마!”

    대장공주의 얼굴에 빙긋 미소가 걸렸다.

    “무슨 일인가? 본궁과 차를 마시기 싫어진 게야?”

    조경 장군 부인이 고개를 납작 숙인 채 말했다.

    “날도 다 저물었사온데, 마마께서도 식사를 드셔야 하지 않사옵니까? 이 일은 급하지 않으니, 루 대인에게 천천히 처리하라고 명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괜히 이런 일로 마마의 봉체라도 상하시면 큰일이 아니옵니까.”

    대장공주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본궁을 생각해주는 이들은 자네처럼 나이 지긋한 이들뿐이네. 본궁이 조방궁에 들고 나서는, 전에 그리 눈앞에서 자주 알랑거리던 이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구먼.”

    조경 장군 부인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마마의 수양에 방해가 될까 그런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아마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저들도 흔쾌히 마마를 뵈러 오길 원할 것이옵니다.”

    “그들에 부인도 포함인가?”

    “당연합니다.”

    한담이 오가는 중에, 밖에서 대화가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원(*算員: 과거의 회계사)을 데려왔나?”

    “데려왔습니다. 다들 호부(*戶部: 재정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의 하급 관리들입니다. 지급해야 하는 녹봉과 매일같이 씨름하는 자들이니 장부 정도는 한 번 훑어보기만 해도 금방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기다릴 것 없이 주판을 가져다주면 되겠군.”

    “존명!”

    곧이어 주판알 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조경 장군 부인의 가슴도 함께 위아래로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심 욕설을 쏟았다.

    ‘대장공주가 여기 있는데, 대체 다른 곳에서 일을 안 하고 왜 여기서 난리들이야?’

    그러나 밖에 있는 이들에게 마음의 소리가 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투다다 투다다.

    규칙적이고 빠른 주판알 굴리는 소리만 들어봐도 지금 밖에 있는 이들은 경험 많은 나이든 산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대장공주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나마 자네가 본궁을 생각해주는군. 지금 꼴을 보게, 이런 저급한 수작질을 벌이다니, 다들 본궁의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 드는 게 아니고 뭐겠나? 그저 보기엔 지온이 저 아이를 노리고 벌어진 일 같겠지만, 조방궁에서 무속에 관한 일이 벌어졌는데 본궁이 그것에서 완전히 피해갈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뜬소문으로 중상모략을 하는 일이 횡행하지 않았는가. 뜬소문에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나? 작금의 폐하는 본궁의 친조카가 아니시네. 그 와중에 이런 일로 폐하께서 오해라도 해보시게. 그날로 사달이 나는 게지.”

    “맞사옵니다.” 

    조경 장군 부인은 초조하게, 밖에서 들리는 조사 상황에 귀를 기울이면서, 대장공주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내 사주한 자를 찾으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야! 한 번 용서해주면 다음에 두 번 세 번 또 그럴지 어찌 안단 말인가! 주모자를 찾아내면, 내 폐하를 찾아가 껍질을 도려내고, 근육을 뽑아낸 후에 능지처사(*陵遲處死: 살을 포를 떠서 죽이는 형벌) 형을 내려달라 고할 것이야! 무속을 가지고 수작을 부리다니 어찌 이리 악랄한 방법을 쓰려고 한단 말인가!”

    애써 웃음을 지은 조경 장군 부인의 얼굴이 마른 논처럼 쩍쩍 갈라졌다.

    “그렇지요, 마마.”

    만에 하나라도 걸리게 되면 여기서 어떻게 몸을 빼야 할지,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대장공주를 모함하려던 것은 절대 인정하면 안 되었다.

    ‘내키지 않지만, 두 가지 죄 중에 비교적 가벼운 죄…… 그래도 대장공주보다는 지온을 해치려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모자란 것 하나 없는 장군의 부인이 부모도 없이 어려운 사정의 여아를 괴롭히다니? 행여 이 일이 소문이라도 퍼지면 뒷말은 얼마나 안 좋게 날 것이며, 뒤통수가 또 얼마나 따가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부군이 이 소식을 들으면 집안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닌다고 난리가 날 터였다.

    ‘안 돼! 절대 인정 못 해! 나는 죽어도 인정 못 해!’

    그렇다면 모든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수밖에 없었다.

    조경 장군 부인의 눈 끝에 날이 섰다. 스산한 시선이 제 옆에 있던 능양진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능양진인이 이미 한참 전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어찌 행동하는지 능양진인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 사건이 모두 드러나면 분명 저를 대신 할 희생양을 데려다 놓을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뻔한 희생양은 또 뻔하게 내가 되겠지…….’

    날 선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그 순간, 능양진인은 결심을 굳혔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은 그녀가 애걸하듯 소리를 질렀다.

    “마마! 빈도가 죄를 지었습니다! 빈도의 죄를 이실직고하겠사옵니다!”

    신경이 예민하게 부풀어 올라있던 조경 장군 부인은 갑자기 능양진인이 무릎을 꿇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죄를 이실직고한단 말인가! 지금 누명이라도 씌우겠다는 게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러 시선이 그녀에게 우르르 몰렸다.

    대장공주의 표정이 웃는 듯, 아닌 듯, 실로 묘했다.

    매고고가 의아한 듯 물었다.

    “능양주지가 이실직고하는 것과 부인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찌 그리 긴장하고 계세요? 그리고 누명을 씌우다니요?”

    이마에 식은땀이 번들거리기 시작한 조경 장군 부인은 제 따귀를 힘껏 후려치고 싶었다.

    밖에선 주판알 튀겨대며 시시각각 장부의 문제를 찾아대고 있었고, 안에선 대장공주가 뼈있는 말을 해대며 계속 그녀의 신경을 긁어대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대장공주나 지온, 어느 쪽도 자신이 해치려고 했다고 인정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려 능양진인을 희생양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에 돌연, 능양진인이 먼저 죄를 이실직고하겠다며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녀가 능양진인을 잡아먹을 듯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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