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30)화 (130/385)
  • 130화. 관아에 신고한 것은 누구?

    청옥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여름이 한창인 6월에 그녀는 뼈가 시린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눈앞에서 엄숙한 표정으로 비분한 기운을 뿜어내는 능양진인은 고인의 모습 그 자체였으나, 그런 능양진인의 모습을 보는 청옥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청옥은 하늘에 부르짖고, 땅을 치며 고통스러워하던 지난 9년의 세월을 떠올렸다. 그토록 부르짖었지만 거들떠 봐주지 않던 지난 9년…….

    ‘화옥이 우릴 괴롭힐 때도 능양사숙은 언제나 저런 모습이었지.’

    한없이 자애롭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듯 보이나, 자신들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화옥이 마음껏 괴롭히도록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 아니던가.

    능양진인이 깊은 한숨과 함께 청옥을 바라보았다.

    “능운사저가 세상을 떠나고 장문의 대사저가 네가 아니란 것에, 청옥 네가 불만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러다 이제야 어렵사리 정식으로 직분도 맡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주변에 성과를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리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향을 올리고 신을 모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여 정성으로 하는 것인데, 어찌 사람들을 그리 속이려고 든 것이야?”

    청옥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닙니다, 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대답에도 능양진인의 말이 이어졌다.

    “태운 부적물이 병을 고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냐? 네가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르는 듯하니, 이 사숙이 알려주겠다. 이것이 바로 무…….”

    “능양사숙.”

    맑고 청아한 음성에 능양진인의 말이 툭, 끊어졌다.

    구경꾼들이 갈라진 사이로 얇은 삼 치마에 너울을 쓴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가 능양진인의 앞까지 걸어가 너울을 벗어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구경꾼들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너무 아름다운 소저가 아닌가!’

    “대사저!”

    청옥이 소리를 질렀다. 몸을 떨게 만들던 한기가 서서히 사라지며, 몸이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사저가 왔어! 이제 살았어, 사방전도 살았어!’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지온이 능양진인을 향해 예를 갖췄다.

    “사숙, 사방전의 전주가 저입니다. 그러니 사방전에서 벌어진 일은 저 역시 예외라 할 수 없어, 이리 벌을 청하러 왔습니다.”

    여유롭고 평온한 모습에 지온을 본 능양진인은 도리어 불안해졌다.

    ‘저 몹쓸 것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고는 하는 말인가? 손해 따윈 눈곱만큼도 보지 않으려는 것이 벌을 청하러 와?’

    “저건 누구지? 주지더러 사숙이라니, 출가한 선고 같아 보이진 않는데?”

    “자네 그것도 모르나? 저 소저가 바로 능운진인의 큰 제자가 아닌가! 지씨 가문의 큰 아가씨네. 어려서 능운진인과 함께 세상을 떠돌다 올 초에 도성으로 돌아와 태사부, 유씨 가문과의 혼사를 물린 그 소저 말일세, 기억나는가?”

    “아! 그 소저였나! 스승님의 상을 치른다 했었지, 아마? 유씨 가문에서 효심이 깊다고 칭찬을 했었지 않나?”

    “맞네, 사방전을 관리하는 게 바로 지온 소저네. 내 듣자니 화신점 역시 저 소저가 봐준다더구먼.”

    “정말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겠구먼, 저리 어린데…….”

    구경꾼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능양진인은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얼마나 됐다고 저 천것의 이름이 이리 높아진 게야? 이러다 조금 더 지나면 주지인 내가 설 곳조차 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능양진인의 얼굴엔 전혀 태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구나. 아무리 사방전의 전주인 너라도 책임지기 힘들 것이야.”

    지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숙, 상황이 심각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래 봤자 부적 한 장일 뿐인 것을요.”

    그녀의 말에, 구경꾼들이 술렁였다.

    ‘부적 한 장일 뿐이라니, 그게 지금…….’

    “사람 목숨이오!”

    누군가 소리치자 노파가 때를 놓치지 않고 곡소리를 냈다.

    “불쌍한 내 새끼! 네가 죽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는 구나! 관가의 소저는 관가의 소저인 모양이다, 세상에 어느 관가의 소저가 우리 같은 백성의 목숨을 신경 쓰겠느냐?”

    사내 역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가 아무리 관가의 소저라지만, 이리 사람 목숨을 우습게 볼 순 없는 것이다!”

    능양진인은 속으론 뛸 듯이 기뻤지만, 훈계하듯 입을 열었다.

    “사질! 어찌 그리 함부로 말을 하는가! 부적으로 목숨을 구하다니, 그럴 수는 없는…….”

    “하하!”

    갑자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보니, 능양진인과 함께 왔으나 한쪽에서 말없이 구경만 하던 귀부인이었다.

    드디어 귀부인이 입을 열었다.

    “능양주지, 저 아이를 위해 애쓰느라 고생이 많구먼. 저 아이는 어려서 철이 없다지만, 자네까지 상황파악이 안 되는가? 부적물로 병을 치료하다니, 그것은 무속이네! 조정에 고하면 당장 하옥되는 죄란 말일세! 그때가 되면 저 아이뿐 아니라 주지인 자네까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네!”

    그녀가 무속을 언급하자, 구경꾼 중에 있던 한 사람이 무속을 금하는 법을 떠올리고 맞장구를 쳤다.

    “맞소이다!”

    문사 차림의 사내였다.

    “태조께서 무속을 금지하는 법을 위법한 이는 참한다 했소!”

    귀부인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오래 향을 올린 사람으로서 한 가지만 말해 주겠네. 능양지주, 조정에서 누군가 관여하기 전에 자네가 지금 바로 처리한다면, 아직 기회는 있을 것이네. 이대로 미루다간 조방궁 전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네.”

    “부인…….”

    “더구나…….”

    그녀가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 아닌가? 출가한 사람이 이를 보고 안타깝지도 않단 말인가?”

    “옳소!”

    구경꾼 사이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 하나 잡게 생겼는데, 계속 그리 제자를 감싼다면 지금 바로 조정에 상소를 올려 조방궁 전체를 닫게 만들겠소!”

    “백성들 목숨을 파리 목숨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들 목숨만 목숨이고, 우리 같은 천민은 죽어도 된단 거냐!”

    선동된 백성들이 분을 토하며 소리를 질러대자 능양진인은 방법이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봤느냐? 사질이 책임을 모두 짊어지겠다면, 이 사숙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질을 칠 수밖에 없겠구먼. 여봐라…….”

    “사숙,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요?”

    지온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가 언제 사람의 목숨이 중하지 않다고 했습니까? 조금 전 저는 분명 부적을 말했는데, 다들 상상력이 뛰어나십니다.”

    그녀의 말에 순간 목이 콱, 막힌 능양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말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하지 말아라. 이미 이리 심각한 상황까지 왔는데, 목숨값은 반드시 갚아야…….”

    “누가 목숨을 잃었는지요?”

    또다시 중간에 말이 끊긴 능양진인의 얼굴에 분노한 기색이 비치기 시작했다.

    “저 아이를 눈앞에 두고도 그리 발뺌을 할 셈이냐? 그래도 난 네 스승님을 생각하여 사질을 최대한 지켜주려 하였어. 그런데 어찌 입만 열면 부인을 하는 것이야! 이런 일은 조방궁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네! 그런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어찌 자꾸 목숨을 잃었다 하시는 것입니까?”

    순간 멈칫한 사람들이 일제히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는 아직 죽지 않았고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이 다 시퍼렇게 변한 것이 곧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노파가 방방 뛰며 지온을 할퀴려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옥이 달려가 노파 앞을 막아서자 노파가 고성을 질렀다.

    “우리 손자가 다 저리됐는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고 있다니!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게 생겼단 말이다! 관아에 고하러 갈 것이다! 나는 관아에 다 고할 것이야! 무속으로 사람을 등쳐먹는다 고하러 가겠단 말이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경꾼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누가 관아에 신고할 생각인가?”

    낮고 부드러웠으나, 피로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높지도 않은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질서정연한 발소리와 함께 관병들의 음성이 들렸다.

    “비켜라, 모두 비켜! 태평사에서 사건 조사를 할 것이다! 관련 없는 이는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진짜 관병이 나섰다고?’

    당황한 청옥이 지온을 꽉 붙들었다.

    “사저…….”

    서로 시선을 맞춘 능양진인과 조경 장군의 부인 역시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자신들은 관아에 신고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관병들이 자리하고 있으면, 곧장 죄를 확실히 물을 수 있지 않겠는가?

    능양진인이 음습한 미소를 짓는 동안, 청색의 관복을 입은 젊은 관원이 느긋하게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사방전 앞까지 천천히 걸어온 루안이 다시 한번 물었다.

    “누가 관아에 신고할 생각인가?”

    그의 음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지만, 감히 그와 시선을 맞추는 이가 없었다.

    루안을 본 능양진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부의 루 대인이잖아!’

    화옥이 지온을 해하려 했을 때, 루안이 지온을 구해주었다. 그가 증인으로 나서는 바람에 화옥의 죄가 확증되었던 것이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또 저자가 나타나다니?!’

    능양진인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이 들어찼다.

    본래의 계획은 이러했다.

    조경 장군의 부인을 증인으로 세우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지온 일행의 죄를 처벌한다. 형벌장에 가두고 흠씬 때려 깊은 상처를 입힌 후, 치료를 해주지 않고 죽음까지 몰고 가는 것이 계획이었다.

    설령 사건 이후 누군가 잘못을 탓하더라도 조경 장군의 부인이 증인이 되어 줄 터이니, 자신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무속은 죽음의 죄가 아니던가?

    사사로이 형을 집행했다 해도, 어차피 조방궁은 내명부의 관할이라 명분만 제대로 있다면 별일이 없을 터였다.

    그때가 되면 강왕비가 자신을 위해 말을 해줄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루 대인으로 인해 상황은 통제 밖으로 나가버렸다.

    관부에서 개입한 이상, 그녀가 나서서 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노파는,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켕기는 것이 있는지 그저 입술만 달싹이고 있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루안이 다시 물었다.

    “뭐지? 본관이 잘못 들은 것인가?”

    루안의 옆에 있던 고찬이 호통을 쳤다.

    “조금 전까지 관아에 신고한다더니, 이제 와 말을 무르는 것인가! 지금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무시하는 것이냐?”

    본래 생긴 것도 엄한 고찬은, 수염까지 잔뜩 기른 상태라 한층 흉악해 보였다. 마치 역귀를 쫓아낸다는 종규(*鍾馗: 역귀를 쫓는 신) 같았다.

    구경꾼들 사이에 있던 아이 하나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끝내 울음소리가 터졌다. 그러나 아이는 혹시나 눈앞의 흉악한 대인의 미움을 살까 싶어, 금방 제 입을 움켜쥐고 울음을 삼켰다.

    덜덜 떨고 있던 노파가 간신히 입을 벌려 말을 하려던 그때,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대인, 신고하고 싶습니다.”

    노파는 놀라 입만 벙긋거렸고, 구경꾼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아니, 왜 저 소저가 신고를 한단 말이야?”

    “그러게나 말일세, 피해자는 따로 있구먼.”

    루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옮겨갔다.

    “오? 무엇을 신고하고 싶은가?”

    루안의 말에 지온이 청옥을 바라보자, 금방 그녀의 뜻을 눈치챈 청옥이 용기를 냈다.

    “대인, 빈도는 사방전의 장사입니다. 조금 전 사방전을 정리하고 있었사온데 몇 명의 일행이 갑자기 찾아와 바닥에 엎어지더니, 저희의 평안부가 저 아이를 죽게 했다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자, 노파의 정신이 돌아왔다.

    ‘일은 이미 받았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돈도 못 받는 게야!’

    돈 생각을 하니 담이 커진 노파가 청옥의 말을 끊었다.

    “대인, 저 악인들이 먼저 고발을 하다니요! 고발은 저희가 해야지요! 저 요도가 무속술로 사람을 속였습니다. 부적물을 마시면 아이의 병이 치료된다 하더니, 우리 손자가 곧 죽게 생겼지 뭡니까! 제발 도와주십시오, 대인!”

    사내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대인, 도와주십시오!”

    부인은 아이를 안은 채 슬피 울고 있었다.

    일가족이 다들 눈물 바람에 머리를 땅에 박는 모습은 너무도 슬픈 모습이었지만, 루안의 얼굴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