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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28)화 (128/385)
  • 128화.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

    오늘, 난택산방에는 간만에 외부에서 온 손님이 와있었다.

    다탁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신 여양대장공주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오지 말았어야 했네. 이제 막 조정으로 돌아와 놓고 바로 날 찾아오다니, 폐하께서 아시면 어찌 생각하시겠는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강은 문사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재야에 있는 이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찻잔을 든 그가 당당한 모습으로 웃음을 지었다.

    “신의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공주마마. 소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하늘 아래 모르는 이가 없으니, 폐하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요. 한낱 대장장이였던 소신은 선제 폐하의 큰 은혜로 장원급제까지 하였지요. 이렇게 큰 은혜를 입은 소신이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성에 돌아왔으니 공주마마를 찾아뵙는 것은 당연한 일이옵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폐하께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시는 분이신지, 자네는 잘 모르지 않는가.”

    비록 강왕 일가에 대한 원한이 큰 대장공주였지만, 그래도 작금의 황제에 대한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는 자신이 황궁을 나와 조방궁 에 기거하게 되었으니 황궁에서 더는 자신을 경계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향환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다시금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 자리에 앉은 이들 중에 심계 없이 단순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대장공주의 말에도 여강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신이 더욱 과거에 미련을 둘수록, 폐하께선 더욱 안심하실 것입니다.”

    “음?”

    “삼 년이 지나가며 형세가 변했습니다.”

    여강이 말에 뼈를 심었다.

    “당시 폐하께선 의지하는 이가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던 대장공주는 곧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당시 그가 의지하던 이는 당연히 강왕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니, 그 말은…….’

    대장공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자네를 위해 요담의 체면에 먹칠을 했다더니, 그것이 사실인가?”

    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공주의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연신 차만 들이키던 대장공주의 얼굴이 곧 시원하게 바뀌었다.

    “내가 이런 날을 맞는구먼!”

    여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는 그저 시작일 뿐이니, 너무 성급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내 참고 기다리겠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대화를 마치고 막 떠나기 전, 여강이 물었다.

    “아, 공주마마 곁에 지온이란 소저가 있으십니까?”

    “그렇네.”

    대장공주가 의아하여 되물었다.

    “그 아이는 어찌 묻는 것인가? 혹시 그 아이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이야?”

    여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지난달에 만난 그 소저로부터 신이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그 후에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여강이 말했다.

    “지 소저의 부친인 지원 역시 삼 년 전에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어사로 외임을 갔는데 능력이 출중하여 선제께서 도성으로 다시 부르셨던 사람이지요. 신, 선제께서 그를 무척 신임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제께서는 지씨 가문에 드디어 지 재상의 뒤를 이을 인물이 나왔다며 특별히 그를 키울 생각을 하셨었지요.”

    대장공주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은 지원의 죽음이…….”

    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는 그해 쓸려나간 관원 중 하나일 것입니다.”

    흠칫 놀라기도 잠시, 대장공주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그 아이가 제 아비의 사인을 밝히고 싶다고 했었네. 인제 보니 그 일 역시 우리와 관련된 일이었구먼.”

    * * *

    지온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 들어 대장공주가 그녀에게 과하게 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도 잘해주긴 했지만, 공주는 워낙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자란 터라 늘 조심하고 자제하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우리 온이 왔느냐?”

    수각에서 더위를 피하던 대장공주는 지온이 오자 금방 고개를 돌려 말했다.

    “소향아, 가서 양매(*楊梅: 소귀나무 열매)를 가져오거라! 그리고 아침에 가져왔던 여지도 신선한 것으로 챙겨오고, 정리진(井里鎭)에서 올라온 참외도…….”

    지온은 깜짝 놀랐다.

    양매와 여지, 모두 남쪽 지방 특산물이라 도성에선 보기 어려운 과일이었던 것이다. 차가운 음료에 들어가는 여지는 모두 말린 것들뿐이었고, 신선한 여지는 황궁에서만 먹어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공주님이 왜 이러시지? 이 정도면 거의 국빈 대접이신데…….’

    각양각색의 과일들로 탁자가 가득 찰 지경이 되고서야 대장공주가 그녀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먹거라! 네가 오기만 기다린 것이야.”

    지온은 속이 간질거리는 것이,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공주가 자신의 손에 쥐여준 여지는 심지어 껍질까지 까져 있었다.

    자신이 조용히 여지를 먹자, 다시 양매를 쥐여주고, 다음엔 참외를 쥐여주는 상황이라니…….

    결국, 지온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공주마마, 신녀가 혹시 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지요?”

    그러자 대장공주의 음성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너처럼 착한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한다고…….”

    참외를 내려놓은 지온이 진지하고도 간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 이러시면 신녀가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인지 말씀해주실 수는 없는 것인지요?” 

    잠시 망설였지만, 대장공주는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지온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네가 부친이 어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알고 싶다고 했던 것을 본궁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본궁의 오랜 지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우연인지 그가 그 일에 관해 이야기하더구나.”

    지온은 경악했다.

    ‘그냥 둘러댄 말이었는데, 설마 진짜로 문제가 있었단 말이야?!’

    “선제가 붕어하시고 신황이 제위에 오른 그 해, 정국이 요동을 치며 사람들 여럿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는데…… 네 부친 역시 아마도 그때 세상을 떠난 것인 듯싶구나.”

    말을 마친 대장공주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 아비의 죽음에 대해 찾고 있었던 것은 분명 다른 이에게 해를 당했다, 내심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한마디로, 가슴에 누군지 알지 못하는, 가상의 원수를 두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던가.

    ‘이제 진상을 알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할까. 부친은 해를 입어 목숨을 잃었으나, 자신은 복수할 방도가 없으니…….’

    그러나 그녀는 지온이 수많은 생각과 감정에 휩싸여 있단 것을 알지 못했다.

    ‘대노야의 죽임도 이 일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

    결국, 돌고 돌아 같은 사건에 마침표가 찍히게 된 셈이었다.

    ‘나와 지온 소저의 원수가 같은 사람이었던 거야.’

    “그 말씀은 저의 원수가 강왕부란 말입니까?”

    그녀가 직설적으로 물어오자 대장공주 역시 돌리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 지온이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묻은 과즙을 닦아내고는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대장공주가 물었다.

    “어찌할 생각이냐?”

    지온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연히 복수할 생각입니다.”

    그녀의 대답에 잠시 침묵한 대장공주가 말했다.

    “그러나, 상대는 강왕부다. 지금 용좌에 앉은 이는…….”

    “신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냐?”

    저도 모르게 대장공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저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야? 당시 강왕부가 성공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준비가 완벽했기 때문이란 것을 모르는 것이야?’

    조정에 누군가가 선동을 하며 바람을 잡았고, 황궁 안팎에 세력들이 그에 호응하며 들고일어났다. 도성을 수호하는 금군에까지 사람을 심어 놓았을 정도가 아니었던가.

    선제와 그녀는 그런 세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에 태자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제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로 의안왕을 황제의 양자로 들이기까지 숨 한 번 쉴 틈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조방궁까지 밀려났던 것이다.

    대장공주, 그녀라고 복수가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제 친조카와 친오라버니, 그리고 스무 해가 넘도록 서로 은애하며 살았던 남편마저 모두 잃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가 어찌 복수를 한단 말인가?’

    황위엔 이미 다른 이가 앉은 뒤였고 그녀에겐 더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저 어린아이 같은 여아가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부모와 스승을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아이가 무슨 힘이 있어서, 천하의 인물 중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이를 상대로 복수를 말한단 말인가?

    지온이 입을 열었다.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라 했으니,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 하늘이 이치일 것입니다. 저의 부친께선 충직한 신하이셨습니다. 그리 돌아가실 이유가 없던 분이지요. 그러니 살인자가 누구인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대장공주가 물었다.

    “그러나 그 복수를 어찌할 생각이란 말이냐? 강왕부는 평범한 왕부가 아니란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녀가 물었다.

    “공주마마께서는 신녀가 의지할 곳도 없고, 세력 한 줌 없는 천애 고아이기 때문에 복수할 방도가 없을 거라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온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주마마. 신녀는 천애고아가 아닙니다. 마마께서도 저를 도와주시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녀의 대답에 대장공주가 지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보지도 않았는데,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신녀는 고립무원에 빠진 불쌍한 고아였습니다. 혼사도, 제 집안의 가산도 모두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을 뻔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제 집안의 가산을 되돌려 놓았지요. 그리고 공주마마의 비호까지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대장공주는, 이미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다시금 뜨거워지며 제 온도를 찾는 것을 느꼈다.

    ‘그래, 해보지 않고 결과를 어찌 알 수 있단 말이야?’

    여강이 돌아왔고, 정국공부는 여전히 그녀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었다. 적어도 눈앞의 저 아이보단 그녀의 상황이 백배 천배 나은 상황인 것이다.

    ‘그런 온이도 복수를 말할 용기가 있는데, 내가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야?’

    이미 복수에 대한 생각이 꿈틀거리던 대장공주는 지금 이 순간, 제 마음을 확정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지!’

    * * *

    태양이 서쪽으로 저물며 한낮의 더위가 꺾일 때쯤, 지온이 난택산방을 떠났다.

    그녀가 돌아가는 길목에는 사방전이 있었는데, 사방전 밖을 사람들이 바글바글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안에서는 누군가 울며 난리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지온은 의아했다. 화신점이 유명세를 탄 이후로 찾아오는 향객마다 다들 공손한 모습을 보이며 큰소리조차 내지 않던 상황이 아니었던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간 서아는 사방전 문 앞에서 누군가 방성대곡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환갑쯤 된 듯한 노파 한 사람과 서른쯤 된 사내 하나, 그리고 사내와 비슷한 나이의 부인이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열 살쯤 된 아이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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