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7)화 (127/385)
  • 127화. 죽을 때도 아닌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고개를 끄덕인 능양진인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채씨 가문 역시 사방전에 향을 드리러 온 일이 있었으니 분명 제 사질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정국공부에서 팔공자님께 일이 생긴 그 날에도 마침 제 사질이 대장공주님을 대신하여 선물을 전하러 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왕비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능양진인은 내심 득의만만해졌다.

    채씨 가문 사람들이 지온을 본 일이 있는지는 그녀도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관가의 여가솔 중에 조방궁에 찾아와 향 한 번 올리지 않았던 이가 있겠는가?

    거기에 지온이 대장공주를 대신하여 선물을 전하러 간 것이 어찌나 배가 아픈지, 오랫동안 능양진인은 지온을 질투했었다.

    ‘이번에 그 일도 같이 이용하는 것이지!’

    능양진인은 정국공부에서 요의가 벌인 일로 지온이 불려가, 추궁당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린 강왕비는 정국공부의 일과 능양진인의 말이 딱 들어맞자, 금방 능양진인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천한 것이!”

    강왕비가 이를 갈며 욕을 뱉자, 능양진인은 다시 조경 장군의 부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부인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능양진인은 기름을 한 번 더 끼얹었다.

    “자제 분께서 조방궁에서 일을 당하셨을 때, 마침 제 사질 역시 그 일에 연루되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조경 장군의 부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능양진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말은…….”

    능양진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방궁에 온 후로 사질은 제 제자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지요. 어린 소녀가 아이같이 어리광을 부린다 생각하여 빈도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고, 제 제자는 그 일로 아까운 목숨까지 잃었지요.”

    조경 장군의 부인을 가장 괴롭게 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그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딱 하나 낳은 아들이 하필 남색이라니.

    다른 가문에 혼담을 몇 번 넣었지만, 모두 그 일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세간에는 제 아들과 정씨 가문의 공자가 조방궁에서 밀회를 했다는 황당무계한 소문이 파다하여 집안 전체가 얼굴을 들지 못하는 지경이 아니던가!

    능양진인의 그 말 한마디에 결국 조경 장군 부인마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내 아들이 진짜 수작질에 당한 것이라면, 가문 전체가 다른 이의 손에 놀아난 것이 아니야?!’

    부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능양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빈도는 사문에서 이런 원통한 일이 벌어진 것을 떠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얼마나 능력이 뛰어난지, 이젠 대장공주마마마저 그 아이를 싸고도시는 통에 빈도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왕비마마와 부인마저 그 손에 휘둘리시는 것을 뵙고 나니, 빈도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강왕비가 부인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저를 도와주세요! 여덟째가 저리 당했는데, 내 반드시 이 원통함을 풀어야겠습니다!”

    * * *

    강왕세자는 어두워진 얼굴로 바로 어서방에 찾아갔다.

    “세자 전하, 폐하께서는 지금 재상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호은의 말에 간신히 치미는 화를 다스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를 잘못 맞췄군. 그럼 난 잠시 기다리겠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재상들이 밖으로 나오더니 강왕세자를 보고는 각자 예를 올렸다.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모두 받은 강왕세자는, 그들이 멀어질 때를 기다려 곧장 전으로 돌진하듯 들어갔다.

    “폐하!”

    올라온 상소를 읽고 있던 황제가 제 형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호은, 자리를 마련하라.”

    그러나 앉을 상황이 아니라는 듯이 강왕세자가 당장 할 말을 꺼냈다.

    “여강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셨습니까?”

    “그랬습니다.”

    황제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로 말을 이었다.

    “벌써 소식을 들었습니까? 선제께서 여강은 낮은 신분 출신이라, 세상 돌아가는 것에 정통하다셨지요. 큰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 능히 재상의 재목이라 했습니다.”

    강왕세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폐하, 여강이 선제의 사람이란 것을 정말 모르신단 말입니까! 초기에 너무 빨리 몸을 빼는 바람에 그자를 놓치고 말았는데,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시다니요! 그가 조정을 어지럽게 하면 어쩌려 하시는 것입니다!”

    황제가 의아한 듯 말했다.

    “형님, 말씀이 이상한 것 같습니다. 선제께서 이 자리에 앉아 계셨을 땐, 당연히 선제께 충성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제 황제는 짐이 아닙니까? 그가 짐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충성한단 말입니까?”

    “폐하…….”

    순간 강왕세자가 말을 잇지 못하자, 황제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의 좋은 뜻은 짐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짐이 재위한 지도 이미 삼 년이 지났습니다. 과거사 역시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지 않으면 조정에 가득한 신하 중에 몇이나 남아있을까요?”

    강왕세자는 황제를 다시 보고 있었다.

    황제는 익숙한 얼굴로 익숙하지 않은 기도(*氣度: 기백, 기개 등 정신적 기세가 느껴지는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를 지닌 동생은 이제 다른 어투로 말하는 자가 되었다.

    닳을 대로 닳은 관료 같은 황제의 모습에서, 죽어도 도성으론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제 아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강왕세자는 상황을 이해하였다.

    ‘이 녀석이 머리가 굵어졌구나.’

    * * *

    지온이 조방궁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능양진인도 돌아와 함께 조방궁의 문을 지나게 되었다.

    능양진인이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며칠 만에 보는구나.”

    지온이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사숙을 보지 못하여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능양진인은 무척이나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다. 요즘 무에 그리 바쁜 것이야? 사방전도 자주 찾지 않는다고 들었다.”

    “요즘은 난택산방에 자주 가는 터라 사방전에는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습니다.”

    대답하던 지온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모르셨던 건가요, 사숙? 지난번에 사숙 문하의 제자가 물어보기까지 하였는데…….”

    능양진인은 민망함에 순간 얼굴을 굳혔다.

    ‘천한 계집이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야?!’

    자신은 이미 꽤 오래 대장공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본인은 제 전을 들리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 바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신경을 쓰지 못했나 보구나.”

    능양진인이 말했다.

    “요즘 수련에 정진하느라 다른 잡다한 것들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온이 마치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처럼 경지가 높은 고인(高人)들은, 당연히 높으신 귀인들을 모시는 일에 신경을 쓰실 리가 없으시겠지요. 사숙, 앞으로 그런 잡다한 일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제게 넘기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는 출가를 하지 않은 속가 사람이니, 수행을 그르칠 염려도 없지요.”

    “…….”

    진지한 얼굴을 하는 지온의 모습에 능양진인은 내심 저 가면 같은 얼굴을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능양진인은 애써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감정을 추슬렀다.

    지온을 향한 원한이 가득한 능양진인이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 보이지 않은 채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과 함께 세상을 떠돌아다니느라 사질이 법(法)을 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겠단 생각이 이제야 드는구나. 이제 사방전의 주인인 전주까지 되었으니 아무래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사숙, 어찌 그리 말씀을 하시는지요? 전주라지만 저는 그저 이름만 걸어 놨을 뿐 사방전의 진짜 일들은 청옥 사매가 하는 것을요. 더구나 상을 모두 치르고 나면 집안에서 혼인 이야기가 나올 텐데, 저 같은 규방의 규수가 다른 이들에게 법까지 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른 이들이 들으면 비웃을 이야기지요.”

    지온의 대답에 능양진인은 이가 갈렸다.

    ‘이런 몹쓸 것이 있나! 날 압박해 사방전의 전주 자리를 꿰찰 땐 자신이 규방의 규수란 사실을 잊었던 게야? 신분을 들먹이며 본인이 그런 일까지 하면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라 하다니. 이는 날 무시하는 게 아니냐!’

    비구니나 승려가 높은 신분은 아니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소리도 할 사람이 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제 집에서 살기 어렵다고 조방궁으로 뽀르르, 달려와 덕을 보려던 게 누구던가! 이젠 대장공주에게 빌붙어 있는 주제에, 지금 조방궁의 주지인 날 두고 이리 비웃어?!’

    그러나 깊게 숨을 들이마신 능양진인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이젠 사질이 자주 대장공주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그래도 기본적인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의 말씀이 도리에 맞습니다.”

    그제야 내심 안도한 능양진인이 말을 이었다.

    “다음 법 때, 사숙과 함께 가 배워보는 것이 어떠냐? 그리하면 대장공주께서 궁금하신 것이 생기시더라도, 굳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맞습니다. 절 이리 생각해 주시다니 사숙, 참으로 감사합니다.”

    목적을 달성한 능양진인은 더는 지온과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여 먼저 가봐야겠다. 너도 들어가 쉬어라. 날이 뜨거우니 더위 먹지 않게 조심하고.”

    “조심해서 가세요, 사숙.”

    고개를 끄덕인 능양진인은 제자들을 이끌고 낙영각으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본 지온이 그제야 몸을 돌렸다.

    서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가씨, 주지가 무슨 생각인 걸까요? 전엔 아가씨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어떻게 해서든 아가씨를 멀리 떨어뜨리려 하더니, 왜 갑자기 아가씨께 이리 관심을 보이는 거죠?”

    “그러게, 나도 왜 이러는지 알고 싶네.”

    지온이 아무 말이나 던졌다.

    “갑자기 양심을 찾으셨나 보지, 뭐.”

    그러나 서아는 지온과 달리 무척이나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을 때도 아닌데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면 분명 뭔가 변고가 있는 거예요. 아가씨, 주지가 설마 아가씨께 뭔가 나쁜 일을 벌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지온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씨 가문에서 보낸 세 명의 시녀 중 의운은 단순하고 직설적인 편으로, 생각 역시 깊지 않고 단순한 편이었다. 하로는 눈치가 좋고 예리했지만, 반대로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에 비해 서아는 머리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이지. 충심이 깊단 것이 장점이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던 아이였는데…….’

    그런데 그랬던 서아가 이런 것을 느끼고 생각하다니, 서아 역시 발전한 것이다.

    지온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래도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대장공주께서 계시는 한 다른 이들이 대놓고 일을 벌이긴 어려울 테니까.”

    이게 바로 뒷배가 있는 것의 장점이었다.

    윗물에서 지내는 이들은 다들 세상만사에 훤한 이들이었다. 요즘 들어 그녀가 자주 대장공주를 모시고 있고, 지난번엔 대장공주를 대신해 정국공부에 선물까지 전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그녀를 대할 때, 전처럼 부모와 스승을 모두 잃고 기댈 곳 하나 없는 고아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들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날 두고 일을 벌여도 몰래 벌이려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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