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5)화 (125/385)
  • 125화. 유모지의 소설, 산해검협전

    “모지, 자네 지금 뭘 보나?”

    ‘모지? 내 전 약혼남, 유씨 가문의 바보 같은 둘째 공자?’

    지온의 귀가 쫑긋 섰다.

    역시나 유모지의 음성이 뒤이어 들려왔다.

    “아무, 아무것도 아니네.”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자 유모지에게 말을 걸었던 이가 그를 잡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긴, 내가 이미 봤다네. 어서 꺼내보시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유모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알겠네, 알겠어. 주기 싫으면 말게! 내가 뭐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며 그는 유모지를 붙들었던 손을 풀어주며 돌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유모지가 경계를 늦춘 사이, 돌아서는 듯 하던 그가 유모지의 손에 들린 원고를 순식간에 잡아채곤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뭐라고 그리 숨기나? 어디 보세. 뭘 썼는지 내 좀 읽어봐야겠네! 산해검협전(山海劍俠傳)? 소설인가? 이보게들, 와서 이것 좀 보시게나! 유모지 공자께서 소설을 쓰셨네!”

    그가 크게 소리치며 떠벌리자, 유모지의 소설을 보겠다고 주변에 있던 동창들이 달려드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크게 당황한 유모지가 다시 원고를 잡아채려 손을 뻗었다.

    “어서 돌려주게!”

    “소설을 썼거들랑 다 같이 봐야지, 숨기긴 왜 숨긴단 말인가! 이보게들, 어서 와 모지가 쓴 작품을 감상하세!”

    금세 서생들이 유모지를 둘러싸더니 너도나도 한 장씩 손에 든 채 서로 돌려가며 읽기 시작했다.

    “모지, 향시가 8월인데 자네는 소설을 쓰는 것인가? 참으로 한가하이!”

    누군가 혀를 차며 무안을 주는 가운데 다른 서생이 과장되게 유모지가 쓴 글을 읽었다.

    “밝은 빛줄기 하나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빛줄기 주변을 둘러싼 산들이 진동하며, 해수(海水)마저 뒤집혀 역류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 단 일검의 힘이 이리도 두려울 수가…… 하하하! 자네 대체 이런 문체는 어디서 배운 것인가?”

    “충산 아래에 있는 서원에서 쫓겨난 가난뱅이가 검으로 일대 종사(宗師)가 된단 말인가? 이게 무슨 해괴한 내용인가?”

    “맞네! 내 지금 여러 장을 봤는데 하나같이 서로 붙어 싸우는 내용밖에 없는 것이, 하나도 재미가 없구먼. 구미호 같은 요괴도 좀 나오고 그래야 재미가 확 살지!”

    서생들이 떠드는 이때, 한 서생이 진지한 목소리로 훈계하듯이 말했다. 

    “자네들은 다들 진짜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구먼. 우리 같은 이들이 이런 소설 따위나 쓸 군번인가? 몰락한 문인들이나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 쓰는 것이지! 시나 글을 열심히 쓸 생각은 안 하고 이런 체면치레도 못 하는 것이나 쓰고 있으면, 창피하지 않겠나?”

    이에 동조하듯이 여러 서생이 한마디씩 던졌다. 

    “이런 황당한 글은 어리석은 부녀자들이나 촌부 나부랭이들이나 읽는 것일세.”

    “우리 같은 이들이 이런 소설을 읽는 것만 보아도 비웃음을 당할 판에 직접 쓰다니…….”

    “이 친구는 태사부의 공자니 시험에 떨어져도 상관이 없지 않은가? 집안에 가업을 이어 갈 능력 있는 형님도 버티고 계시니 우리와는 상황이 다르지.”

    “하긴 그렇기도 하구먼…….”

    유모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보라고 했는가? 어서 돌려주게!”

    그러자 서생들이 기분이 상한 듯 대답했다.

    “좋은 마음으로 해준 이야기에 뭘 그리 화를 내고 그러나?”

    “맞네, 선생께서 보시기라도 하면 분명 자네 집안에 이 일을 전할 텐데, 그때 어르신들께는 뭐라 하려고?”

    “사람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군!”

    수정고를 꿀꺽, 삼킨 지온이 의운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활 연습 싫다고 새총 가지고 연습을 했었지?”

    그러자 의운이 금방 잘못했다며 빌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아가씨! 몰래 잔꾀 안 부리고 앞으론 활 연습 열심히 할게요!”

    “뭐라고 하는 거 아냐. 새총 좀 줘봐.”

    의운은 지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새총을 꺼냈다.

    새총을 들고 탄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한 지온이 화단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고 새총에 걸더니 조준을 하고 손을 놓았다.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돌은 서생 하나에게 맞고 떨어졌다.

    “아야! 누가 날 때린 거냐!”

    유모지를 나무라던 서생이 펄쩍 놀라 제 주변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변엔 다들 학자들이요, 문사뿐이었고 화단 쪽에 너울을 한 소저 한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울을 쓴 소저는 어찌나 조신한지, 곁에 시녀들도 무척이나 얌전한 모습이었다.

    ‘착각인가?’

    제 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고개를 돌리자 지온은 다시 작은 돌멩이를 주웠다.

    “아야! 아파라!”

    처음 유모지의 원고를 빼앗아 갔던 사내는 순간 무릎에 격한 통증이 찾아오자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아픈지 그는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단번에 두 사람이나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자, 모여 있던 서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방궁의 꽃과 나무들은 다들 신령스러운 기운을 가졌다던데, 설마하니 무슨 요괴는 아니겠지?’

    이런 생각이 든 서생 중 하나가 황급히 말했다. 

    “그만 가세. 괜히 이상한 곳에 더 머무를 필요 없을 것 같네.”

    “마침 점심때니 다들 배고프지 않은가? 주루로 가세나!”

    “나도 배가 고프군, 가세!”

    유모지의 원고를 팽개치고 서생들은 우르르 나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유모지는 문득 슬픈 마음이 들었다.

    탁자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원고 몇 장이 불어온 바람에 바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한 장씩 줍던 유모지 앞에 문득 오밀조밀, 꽃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꽃신 한 쌍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들자, 너울을 벗은 지온이 그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이런 우연이 있다니요.”

    기분이 좋지 않았던 탓에 그저 음, 하고 간단하게 대답만 한 유모지는 떨어진 원고를 계속 주웠다.

    그가 원고를 모두 주워 일어났을 때, 지온은 이미 석탁 위에 있던 원고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매우 놀란 유모지는 당장 원고를 빼앗으려고 지온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보지 마시오! 당장 이리 주시오!”

    이미 들은 비웃음으로 충분했기에, 그는 또다시 비웃음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온은 그가 원고를 가져갈 수 없도록 냉큼 뒤로 돌아앉았다.

    유모지가 다시금 손을 뻗었으나 서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의운마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그를 향해 말했다.

    “공자님, 지금 저희 아가씨를 건드리려 하시는 것입니까?”

    유모지는 황당해졌다.

    ‘지금 이게 뭔 소리야? 내 것을 빼앗아 놓고 누구한테 뒤집어씌우려고?’

    그러나 이런 부분은 다퉈봐야 사내가 여인을 어찌 이긴단 말인가?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 봤자 비웃음이 아닌가? 이미 산 비웃음, 한 사람이 더 비웃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유모지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지온은 그의 원고를 한 장, 또 한 장 계속 읽어가더니 끝내 마지막 한 장까지 모두 읽고서야 그에게 말했다.

    “공자님 손에 든 원고도 이리 줘보세요.”

    뭐라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유모지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원고를 건넸다.

    가져간 나머지 원고 역시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모두 읽었다.

    시간이 흘러 유모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지온은 원고를 다 읽고 정리까지 한 상황이었다. 지온이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유모지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나도 이런 것을 쓰는 것이 황당하단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나도 소일거리 삼아 써볼 수 있는 거 아니오? 매일 하는 일이라고 경서 해독, 파제, 시사 논하기 따위밖에 없는 인생이 재미가 있겠소, 없겠소?

    맞소, 난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님 같지는 않단 말이오. 가볍게 탐화를 거머쥐고, 손쉽게 대리시에 들어가서는, 평생을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 말이오! 난 그렇게 내 평생을 남들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삶을 사느라 흘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오, 알겠소?!”

    유모지의 일장연설을 들은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 참으로 자신을 잘 아시는 분이시네요.”

    유모지는 더욱 우울해졌다.

    “당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소. 당신네들은 왜 다들…….”

    “하지만 하나는 틀렸어요.”

    “음?”

    지온이 그의 말을 끊자 유모지가 멈칫했다.

    “대공자께서 언제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사셨나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유 대부인께서 이미 오랫동안 혼인을 하라 말씀을 하셨던 것 같은데, 혼인하셨어요?”

    “으음?”

    “나이가 제법 드시는 동안 계속 홀로 지내는 건, 집안의 장자로서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자각조차 안 하신다는 뜻이죠. 공자님이 소설을 쓰시는 것보다 더 말을 안 듣고 계신 거라고요.”

    “…….”

    생각할수록 맞는 말에 그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그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난 몰래 소설이나 쓴 것뿐인데, 이게 뭐 별거라고! 내가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학업도 꽤 잘하고 있는 편이오. 선생님께서 이번 향시에서 반드시 내가 붙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단 말이오. 그래서 내년엔 회시도 한 번 도전해 볼 수 있을 거라 하셨소.”

    “그것 보세요!”

    지온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이 소설도 아주 재미있는걸요? 서책방에서 파는 소설들은 하나 같이 가랑과 가인이 등장하고, 구미호 같은 요괴들이 나오는데, 너무 식상하죠. 어디 이 소설처럼 피가 끓겠어요? 그나저나 뒤에 더 있나요? 보다 중간에서 멈추니 너무 괴로워서…….”

    “오? 계속 보고 싶소?”

    유신지는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의심스러웠다.

    “일부러 날 위로하려 그런 소릴 하는 건 아니겠지? 내용도 엉망이고, 체면 깎인다고 다들 난리였소.”

    “제가 공자님을 위로해요? 아직 잠이 덜 깨신 건가?”

    지온이 손에 든 원고를 그의 얼굴 앞에 대고 흔들며, 방자하게 입을 열었다.

    “제 점심시간 그만 축내시고, 빨리 내놓으시면 좋겠는데?”

    * * *

    이 각(二刻)쯤 지나 두 사람은 주루에 앉아 있었다.

    유모지가 제 시종이 가져온 나머지 원고 반을 건네며 말했다.

    “웃지 마시오, 웃으면 바로 폭발할 거니까!”

    지온이 그를 향해 이까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웃었으니 폭발하시면 될 것 같네요.”

    “…….”

    유모지는 비분강개한 마음을 먹을 것으로 풀겠다는 듯,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에 거위 기름을 발라 돌돌 말아 쪄낸 아유권(鵝油卷)을 입에 밀어 넣고 찰지게 씹어댔다.

    원고를 손에 든 지온이 글을 읽기 시작하자, 유모지는 간식을 먹어가며 그녀의 표정을 몰래몰래 살폈다. 자신이 쓴 소설을 정식으로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동창들의 반응은 이미 확인했지만,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들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소설들은 그저, 시정(市井)에 사는 우매한 백성들이나 하릴없이 보는 것이라 여겼기에 드러내놓고 소설을 쓰기는 어려웠다.

    굶을 순 없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몰락한 문인들이나 이런 소설을 썼기 때문에, 나온 소설 중 대다수는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승님이 알게 되어 창피를 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유모지 역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몰래 소설을 썼을 뿐, 누군가에게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다른 이들에게 원고가 들켜버린 이번 일이 그는 무척 괴로웠다. 그런데 다른 이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인 지온 덕분에 그는 지금 기대도 되면서 한 편으론 아주 불안한 마음이었다.

    ‘정말 잘 썼다고 생각하는 건가? 요즘 서책방에서 유행하는 소설들과는 궤가 다른 소설인데, 정말 이게 좋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접시 위에 있던 간식들을 모두 먹어치운 유모지는 배가 불렀다.

    “어후…….”

    그제야 지온이 그의 원고를 내려놓자, 유모지가 당장 들고 있던 젓가락을 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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