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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24)화 (124/385)
  • 124화. 와병 중인 강왕비

    강왕부의 대문 옆에 있는 행랑에서는 능양진인이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나와서 그녀를 맞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능양진인은 간신히 얼굴이 눈에 익은 시녀를 만나, 급히 그녀를 붙들고 물었다.

    “이보게, 왕비마마께선 어떠신가?”

    시녀가 그녀를 살피다 물었다.

    “조방궁의 진인이 아니신지요?”

    능양진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대답했다.

    아무리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능양진인이라지만, 강왕부에 들어온 이상 얼굴을 아는 시녀에게조차 꼭 예의를 갖춰야 했다.

    “왕비마마께선 아마 진인을 뵙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지금은 쉬고 계시지요.”

    시녀의 대답에 능양진인이 물었다.

    “빈도는 더 기다려도 괜찮네만……. 마마의 상심이 너무 크지는 않으신 것인지…….”

    시녀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 일은 저희 아랫것들이 드릴 말씀은 아니지요. 그럼 저는 주인을 모시러 가야 하여…….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진인.”

    “아니…….”

    다시 덩그러니 버려진 능양진인의 가슴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지만, 풀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때 그녀 옆에 있던 제자가 분한 듯 입을 열었다.

    “어쩜 시녀조차 이리 예의가 없을 수 있는 것입니까? 스승님, 저희는…….”

    “닥치거라!”

    능양진인이 꽥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입을 놀려! 조용히 기다리거라!”

    “네…….”

    제자가 우물쭈물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능양진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 계속 기다렸다.

    ‘오늘이 안 되면, 내일 다시 올 것이야. 그럼 반드시 만나주는 날이 오겠지.’

    그녀는 이미 너무 여러 번 우려내어 향이 모두 날아간 차를 다시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曹)씨 가문의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능양진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조씨 가문의 부인 중, 강왕부에서 이리 예를 갖출 사람이라면 딱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강왕비의 오라버니인 조 장군(曹將軍), 조경(曹慶)의 부인이었다.

    자신은 강왕비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조 장군의 부인이라면 분명 강왕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능양진인은, 일어나 옷차림을 정돈하고는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마차에서 내린 귀부인이 가마로 갈아타려 할 때였다.

    그보다 한발 먼저 누군가 귀부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게 아닌가?

    “오랜만에 뵙는 듯하여 빈도가 인사를 드립니다.”

    멈칫한 부인은 고개를 돌려 인사를 건넨 이를 보았다.

    인사를 한 이는 당연히 아는 얼굴이었다. 대장공주가 조방궁에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궁에서 자주 얼굴을 보기도 했거니와, 그래도 도성에선 나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능양진인이신가,”

    부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방궁에서 대장공주님이나 잘 모시지 않고 어찌 강왕부까지 온 건가?”

    능양진인도 조 장군의 부인이 자신을 왜 이리 차갑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청명에 있던 법회 날, 화옥이 지온을 모함하려던 일에 조 공자까지 함께 연루되었었기 때문이었다.

    조 공자가 지온과 상관없이 그 일에 엮였던 게 증명은 되었다. 그러나 소문은 이미 바람을 타고 도성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던가.

    부인은 그 일로 조방궁에 원한을 가진 상태였다.

    속으론 욕을 쏟았지만, 그래도 능양진인은 미소를 보였다.

    “최근 강왕비마마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여 빈도가 문안 차 특별히 방문하였지요.”

    “오? 꽤 마음을 썼구먼.”

    덤덤한 어투로 대답한 부인이 그대로 가마에 오르려고 하자 이대로 눈앞에서 기회를 놓칠까 조바심이 난 능양진인은, 마음이 급한 와중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부인! 빈도가 왕비마마의 병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마에 타려고 문을 잡았던 부인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강왕비의 병은 요의의 ‘죽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도움이 될 거란 말은 죽은 사람을 살려 돌아오게 한단 말인가?’

    능양진인이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말을 이었다.

    “마음의 병에도 고칠 의원이 필요하다지 않습니까? 왕비마마의 가슴에 맺힌 것을 밖으로 뺄 수 있다면 분명 마마께서도 좋아질 것입니다.”

    ‘말이야 맞다만…….’

    “귀한 분들께선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겠지만, 온갖 것들을 접하는 자리에 있는 빈도가 우연한 기회에 작은 속사정을 알게 된 것도 있고 하여…….”

    조 장군의 부인은 능양진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강왕비는 조씨 가문이 의지하는 기둥이었다. 만약 이대로 계속 누워있게 된다면 조씨 가문에는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왕부에 있는 큰 생질인 강왕세자는 외삼촌 가문의 체면 따위 챙겨 주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능양진인이 사람을 두루뭉술하게 대하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은 조금 있는 사람이지.’

    부인은 다소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진인도 나와 함께 들어가 강왕비의 마음을 풀어주면 좋겠군.”

    능양진인이 환하게 웃으며 공손히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부인.”

    * * *

    이윽고 강왕비의 거처에 도착한 조경 장군의 부인은, 능양진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강왕비는 역시 자고 있지 않았다. 평상처럼 넓은 침상에 기운 없이 기대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세자비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님, 외숙모님 댁에서 찾아오셨습니다.”

    강왕비가 슬쩍 바라보긴 했으나, 여전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저는 별일 없습니다.”

    조경 장군의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십니다. 그래서 살펴보러 이리 찾아왔지요.”

    그렇게 부인은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물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자비가 옆에 있다가 입을 열었다.

    “태의가 와서 보고 갔습니다. 상심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시는 것이라고 약방문을 써주었지요. 다만 일이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어머님께서 금방 떨치기 어려우실 것이라 했습니다. 앞으로 며칠 푹 쉬시면 다시 천천히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조경 장군의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세자비께서 고생이 많으시네. 얼굴이 다 파란 것을 보니 많이 피곤한 것 같네. 매일 곁에서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쉬지도 못했나 보구먼.”

    세자비가 연신 힘들지 않다고 했지만,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가서 좀 쉬세요. 내가 여기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것이…….”

    “가봐.”

    강왕비가 다소 짜증을 섞어 말했다.

    “아이도 챙겨야 할 게 아니냐? 매일 여기서 지킬 필요 없다.”

    이에 세자비는 감사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강왕비가 옆에 있던, 가운데가 뚫린 동그란 베개를 냅다 집어 던졌다.

    “저딴 것이!”

    그녀의 음성에 분이 철철 흘러넘쳤다.

    “겉으론 효심 지극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날 두고 무슨 저주를 퍼부을지, 내가 어찌 알아!”

    그녀의 성질에 이미 익숙한 조경 장군의 부인은 아무렇지 않게 옆에 있던 시녀를 향해 새로운 베개를 가져오라 시키곤 다시 깔아 주었다.

    “세자비가 효심이 지극해 보이던데, 어찌 이리 화가 난 겁니까?”

    “효심? 흥!”

    강왕비가 콧방귀를 크게 뀌었다.

    “저게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지요. 여덟째에게 일이 터졌을 때 사람을 데리고 매일 같이 내 방을 지키고 섰던 것이 저것입니다! 겉으론 날 챙긴다면서 실은 날 감시하고 있었던 거예요! 얼마 전엔 내가 옆에 두고 있던 왕씨 유모가 그 꼴을 보다 못해 저것의 시녀 하나를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날로 가서 큰아들 담이에게 고자질을 해서, 며칠 못가 왕씨 유모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더니, 그때 맞았던 시녀를 담이 시중으로 들어앉히더이다.”

    강왕비가 연신 냉소를 뿜어댔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시어머니 뺨을 치는 게 아니고 뭐냔 말이에요! 범이 없으면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제 옆에 있는 것들도 다 저것 말만 듣고, 정말이지 미치겠습니다! 난 아직 죽지 않았단 말입니다!”

    조경 장군의 부인이 그녀를 달랬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와서 곁을 지키는 것도 다 세자가 아가씨를 걱정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강왕세자 이야기가 나오자 강왕비는 더 화가 치솟았다.

    “담이 그 몹쓸 것이, 부인을 들이더니 어미를 잊었습니다! 도성에 돌아오자마자 이 어미 체면을 쓰레기처럼 뭉개더니, 우리 여덟째까지…….”

    순간 강왕비의 음성이 슬픔에 잠겼다.

    “대체 내가 무슨 천벌 받을 죄를 지어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입니까. 낳은 아들이 셋인데 하나는 날 신경조차 쓰지 않고, 다른 하나는 다른 이를 어미라 따르고, 그래도 막내는 살뜰하게 챙겨 주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여덟째를 저것들이 쫓아 보냈으니 앞으로는 누가 날 신경 쓴단 말입니까! 엉엉…….”

    조경 장군의 부인은 그저 조용한 음성으로 그녀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뒤편 주렴 뒤에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능양진인은 매우 놀라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쫓아 보내다니 무슨 말이야? 설마 팔공자가 아직 안 죽은 게야?!’

    그래도 높은 이들과 어울려 온 지 스무 해쯤 된 능양진인은 고관대작이나 귀한 가문에 숨겨진 비사들에 대해서도 제법 들어온지라, 금방 어찌 된 사정인지 대충 알아차렸다.

    ‘강왕부의 팔공자가 다친 곳이 사내의 중요한 부위라지?’

    만약 치료되지 않는다면, 황족 가문의 체면을 위해 그를 ‘하직’ 시키는 것도 영 흔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가문에 내시가 나오면, 가문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팔공자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황가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확실한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살아 있는 것이 죽기보다 괴로운 삶이 되었으니, 강왕비는 분명 그에게 상처를 입힌 범인을 죽도록 미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럼 거기서부터 말을 풀어봐야겠구나…….’

    능양진인이 입을 열었다.

    “왕비마마, 빈도 능양이 문안을 드립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상태였던 강왕비는 갑자기 들린 소리에 화부터 냈다.

    “자네가 왜 왔어?! 당장 꺼지시게!”

    시녀가 그녀를 보내려 다가오는 것을 본 능양진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마마, 빈도가 어쩌면 누가 팔공자를 해친 것인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청옥과 함옥이 사방전을 맡으며 지온은 조금씩 사방전에 가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대장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를 제외하고는, 지온은 요즘 비림에 열리는 문회를 찾아가 자주 문회를 듣고 있었다.

    이 역시 화신점의 명성이 커진 연유라 할 수 있었다.

    원 재상이 직접 쓴 부(賦)가 있었고, 거기에 공몽의 일로 화신점의 명성이 증명되자 조방궁에 찾아온 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이다.

    향을 올리러 왔으면 겸사겸사 주변을 구경하게 되지 않던가?

    조방궁에서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있다면 바로 비림이었다.

    비림의 장사(掌事)는 인기를 위해 규율을 수정하여 매일 문을 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문회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너울을 쓴 지온은 화단 근처에 앉아, 투명하고 하얀 수정고(水晶餻)를 먹으며 서생들이 벌이는 논쟁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우물우물, 수정고를 먹고 있자니 옆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모지, 자네 지금 뭘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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