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3)화 (123/385)
  • 123화. 요즘 일을 제대로 하고 있군요?

    “지 사저가 워낙에 수완이 좋은 게 문제입니다, 스승님.”

    수제자가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

    “듣자니 지난달에 화신첨을 뽑은 이는 천수서원 원생이었습니다. 그 원생이 화신첨을 뽑고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던 여 장원 선생의 눈에 들어, 여 장원 선생 옆에서 공부하게 되었다더라고요.

    그리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매달 치르는 월 시험 점수가 을점에서 갑점으로 변했다지요? 여 장원 선생의 가르침이 있으니, 8월에 있는 향시에 합격하는 것도 거의 따놓은 당상이랍니다.

    그 후로 원생들이 정신이 나간 사람들처럼 매일같이 찾아와 화신점을 보러 오는 바람에, 명성만 더 널리 퍼졌습니다.”

    “맞습니다, 스승님!”

    다른 제자가 거들고 나섰다.

    “지금까지 세 번의 화신첨의 주인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자식을 원했고, 두 번째는 재물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청운의 꿈을 원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조방궁에 와서 공을 들이는 이유 대부분이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요.

    그런데 화신첨을 뽑은 세 사람 모두, 하나 같이 사방전의 화신마마는 진짜 화신의 현신이라 입을 모아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그런 이들과 어찌 비교될 수 있겠어요, 스승님!”

    그러고는 이야기를 하던 제자들이 고개를 떨궜다.

    “조방궁 밖의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궁 안에 제자들조차 사방전에 있는 화신마마는 진짜라고 그리로 달려가 비는 상황입니다.”

    말을 하다가 능양진인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제자가 얼른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연히 저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다른 진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이라 저희가 나서서 관리하기도 힘들고…….”

    부채를 점점 빨리 흔드는 능양진인의 얼굴은 더없이 좋지 않았다.

    ‘천하에 몹쓸 것……! 내 잠시 정신을 판 사이에 조방궁이 그 계집의 것이 되어버렸어!’

    향객들은 모두 그 계집이 있는 사방전으로 향하고, 조방궁 제자들의 마음 역시 그 계집이 사로잡은 상황이 아닌가? 더구나 대장공주마저 그 계집만 불러, 경 강의를 시키고 있으니!

    ‘주지인 난 내팽개쳐진 게 아닌가!’

    더욱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황궁에서 이미 능양진인 자신을 부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계집 때문에 지난번에 일을 그르치고, 더는 능양진인이 대장공주에게 향환을 가져다주지 않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황궁에선 능양진인을 불만스러워했었다.

    능양진인도 다시 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뭔가 수를 내, 황궁에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공주 곁에 있는 이들은 경계심도 크고 눈치도 빨랐다. 요즘은 난택산방에 갈 일이 없으니 더욱이 손을 쓸 곳 자체가 마땅치 않은 상황인데,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안되지,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이 주지 자리도 빼앗기게 될 것이야!’

    대장공주 쪽은 더는 뚫기가 어렵고, 황궁은 자신을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럼 어디를 찾는다?’

    속으로 사람들을 떠올리던 능양진인이 돌연 번쩍, 눈을 빛냈다.

    “강왕부! 팔공자가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제를 지내겠단 말이 없더냐?”

    제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맞췄지만,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던 중 제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강왕비께서 너무 큰 상심에 병을 얻어 쓰러졌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보석이며 희귀한 것들을 파는 상인들도 강왕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병으로 쓰러졌다니, 좋구나!”

    순간 말실수를 깨달은 능양진인이 얼른 정정했다.

    “내 말은 강왕비를 다시 일으킬 방도가 있어 좋단 의미였다. 어서 채비하거라! 강왕부에 문안을 가야겠다!”

    * * *

    “안녕하세요, 사저!”

    “선고님 오셨습니까!”

    “청옥선장께서 오셨다!”

    불진(佛塵)을 팔에 걸친 채 미소 띤 청옥이 고개를 끄덕여주며 사방전을 향해 걸어갔다.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한 날을 보내는 요즘이었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들도 없고, 다들 존경 어린 눈빛으로 바라봐주지 않던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고, 심지어 공손한 태도로 자신을 선장이라 불러주는 이들마저 있었다.

    조방궁 전체를 통틀어 진인들은 몇 사람 되지 않았는데, 진인 중 일부만이 듣는 존경 어린 호칭이 바로 선장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청옥은 진인 사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청옥은 이에 만족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보답할 줄 아는 그녀였기에, 오늘 누리는 행복을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요즘처럼 좋은 날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야. 대사저가 우리를 이끌고 한 걸음씩 철저하게 계산했기 때문에 누리고 있는 거야.’

    이미 많은 일을 행한 사저가 아닌가!

    계속 사저 홀로 동분서주하게 할 순 없었다. 지금과 같은 날들을 계속해서 누리려면, 함옥과 자신 두 사람 역시 어서 성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함옥은 사방전 뒤에 있는 전(殿)에서 향을 내는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약경(藥經)을 봐가며 재료의 성질을 확인하던 함옥은, 청옥이 오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불렀다.

    “사저!”

    고개를 끄덕여준 청옥이 함옥에게 물었다.

    “어때? 좀 외워져?”

    함옥이 까르르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약의 성질들은 이미 싹 다 외웠어! 나 무시하지 마!”

    함옥의 대답에 청옥이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대로 살펴서 공부를 끝내면, 우리가 직접 평안부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럼 대사저가 우리 대신 나서지 않아도 될 테고 말이야.”

    “응!”

    대답하는 함옥은 의욕이 넘쳤다.

    * * *

    연구를 마저 할 수 있도록 함옥을 뒷전에 남겨둔 청옥은 앞전으로 건너가 이런저런 일들을 보았다.

    청옥은 자신이 그리 똑똑하지 않아 공부에 재능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향에 관한 공부와 연구를 함옥에게 맡기고 청옥 자신은 사방전 총무 일을 보며, 향객의 이야기를 듣고 향객의 표정을 보아 그들의 마음을 살피는 일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업무를 분담하면, 사방전을 제대로 이끌고 건사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터였다.

    “청옥 사저.”

    이때, 다른 전의 어린 선고가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조아리더니 말했다.

    “어제 향객 한 분께서 모봉차(毛峰茶)를 한 상자 주셨는데, 사저께 귀빈들이 자주 오시는 게 생각나서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여기 받으세요!”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한 청옥이 대답했다.

    “네가 마시지 않고……. 정말 고맙구나.”

    그러자 어린 선고가 대답했다.

    “마셔도 뭐가 좋은지 모르는 입인 것을요. 조방궁에서 매일 마시는 차로 저는 충분합니다! 사저께 드리는 게 차의 값어치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저께서 자주 저를 챙겨 주셨는걸요. 좋은 것이 들어왔는데 당연히 사저께 드려야죠.”

    웃음을 지은 청옥이 제자에게 작은 함을 하나 가져오라 시켰다.

    함 안에는 향낭이 달린 평안부 몇 개가 들어있었다.

    “이건 여기서 막 만든 것이니, 네가 가지고 있다가 향객께 답례로 드리거라.”

    그리고 청옥이 다시 간식이 든 상자를 펼쳤다.

    “그리고 이건 후부에서 보내온 간식이다. 듣자니 이곳 주방 숙수가 궁에서 은퇴하고 온 분이라더구나. 다들 맛있다고 하니, 가져가 맛을 보아라.”

    어린 선고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저!”

    ‘겨우 모봉차 한 상자에 도로 이렇게나 선물을 많이 주시다니! 청옥 사저가 이리 호방한 사람인 줄 내가 진작 알아봤다니까!’

    간식은 그렇다 치더라도 평안부가 담긴 이 함은, 밖에서는 구하려야 구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던가! 향낭의 향이 특별한 방법으로 조향한 것이라 밖에선 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부귀한 집안의 분이 향객으로 오셨을 때, 이것을 선물로 건네면 마음에 들어 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가져가 우리 장사께 드리면 분명 내게 큰 상을 주시겠지!’

    너무도 감사했던 어린 선고는 작은 것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말을 전했다.

    “청옥 사저, 제가 올 때 보니 주지께서 밖으로 나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출타하시려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청옥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를 가신다더냐?”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연히 들은 말이 있는 데요.”

    어린 선고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낙영각에서 사저들 몇 명이 주지께 크게 욕을 들었다더라고요…….”

    * * *

    청옥이 전한 이야기에 지온이 웃음을 흘렸다.

    “우리 사숙께서는 성격이 안 좋으시네요.”

    “본래 성격이 무척 좋으신 분이셨어요. 그래서 외부 사람 중에 주지를 두고 고인이 아니라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로요.”

    청옥 역시 그리 생각했었다.

    언제나 온화한 모습이었던 사숙이었기에 그녀 역시 자신과 함옥을 못살게 구는 것은 그저 화옥, 혼자만의 문제라고만 생각해왔었다.

    그러다 대사저가 돌아오고, 그동안 당해왔던 것에 하나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청옥과 함옥, 두 사람 역시 조방궁에 점차 적응하고 깊이 뿌리를 내리며, 조금씩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갔다. 

    화옥이 그런 일을 벌이는데, 능양진인이 모를 수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용인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신과 함옥은 그녀의 눈에 개미만도 못한 존재들이었기에, 화옥이 데리고 놀고 싶은 만큼 놀아도 능양진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전엔 아무 일도 없었으니 성격이 좋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지온이 말했다.

    “무사평안한 시기엔 누구나 호인이에요. 그러다 문제가 생기고,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이 벗겨지면 그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거죠.”

    청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자매인 두 사람이 힘겨운 시기를 보낼 때 손을 내밀어 도와준 이는 대사저 하나뿐이지 않았던가.

    ‘누가 좋은 사람인지 말로 할 필요가 있을까?’

    지온이 말했다.

    “낙영각에서 있었던 일을 다 알아 오고, 요즘 일을 제대로 하고 있군요?”

    지온에게 칭찬을 들은 청옥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타고난 자질이 둔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 일도 그렇게 어렵게 했던 건 아니었고, 다른 이들과 관계를 잘 쌓아가니 길이 넓어지더라고요.”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진짜 둔한 이가 어디 있겠어요. 다들 가진 장점이 다른 것일 뿐이에요. 마음을 쓰고 노력만 한다면, 분명 잘할 수 있어요.”

    부끄러운 듯 헤실헤실 웃음을 지은 청옥이 그녀에게 물었다.

    “주지가 뭔가 다른 마음을 먹은 것 같은데 저희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온이 고개를 저었다.

    “특별히 나서서 뭔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자신이 맡은 일을 다른 이가 채가지 않도록 열심히 하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자기의 일을 잘하고 있으면, 다른 이가 아무리 수를 내도 쉽게 손을 쓰지 못하죠.”

    “네, 사저.”

    “그만 글을 써야 할 것 같네요. 이만 가보세요.”

    “네.”

    * * *

    청옥이 나가고 지온은 한 장 한 장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붓을 내려놓고 다시 꼼꼼하게 확인했다.

    ‘여전히 지난 생에 쓰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아.’

    서체에는 여전히 지난 생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래서는 아니 되었다. 이제 자신은 지씨 가문의 큰아가씨인 지온이 아니던가?

    ‘옥종화와 비슷해선 안 되지, 바꿔야 해. 고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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