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2)화 (122/385)
  • 122화. 난 역시 꼭두각시로구나

    올라온 상소를 덮은 황제가 후궁으로 갈 채비를 하고 막 어가에 올랐을 때였다.

    급한 걸음으로 달려온 내시 하나가 말을 전했다.

    “강왕세자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멈칫한 그가 대답했다.

    “들라 하게.”

    ‘이리 다 늦은 저녁에 큰형님께서 무슨 일로 찾아왔단 말인가?’

    어서방에 들어온 강왕세자는 황제를 향해 손을 모아 공수하며 예를 갖췄다.

    “폐하.”

    그는 완전한 예를 갖추지 않았지만, 황제 역시 그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큰형님이 아닌가. 조정 대신들이 모두 모인 조강에서라면 모를까,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예절을 몹시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형님, 이리 늦은 시간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저 오래 폐하의 용안을 뵙지 못한 듯하여, 우애도 다질 겸, 식사라도 함께하고자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짐도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다만 도성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이 많으리라 염려하여 연락하지 않고 있었는데, 기왕 이리 왔으니 형제끼리 술이라도 한잔하지요.”

    그리고 얼마 후 황제의 말에 금방 술상이 준비되어 올라왔다.

    함께 자리에 앉은 형제가, 술잔을 부딪쳤다.

    자연스러운 동작에서부터 점점 제왕의 태를 드러내는 황제를 보며 강왕세자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참으로 많이 발전하셨습니다. 제가 도성을 떠날 때만 해도 황제로서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요. 태자 형님도 계시지 않으신데, 선제께서도 너무 갑작스레 붕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백부와 형님께서 도성을 떠나면 짐의 곁엔 함께 믿고 마음을 나눌만한 이 하나 없는 상태였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지요.”

    강왕세자가 고개를 주억였다.

    “집안 형제 중에서도 중간에 계셨고, 입궁하신 후에도 선태자가 더욱 중하셨으니 직접 일을 감당한 일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당황하셨을 법도 하지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던 강왕세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제 백부, 숙모란 말이 참으로 자연스러우십니다.”

    황제가 담담히 대답했다.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다른 이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신 것은 형님이셨습니다.”

    침묵하던 강왕세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제가 그리 말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술잔이 다시 부딪쳤다. 강왕세자가 말을 했다.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황제가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루안은 어찌 된 일입니까?”

    강왕세자가 미간에 골을 잡았다.

    “지난 삼 년간 그를 믿고 중히 쓰셨다 들었습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 있어 일을 잘하는지라……. 그라면 어떤 일을 맡겨도 믿을 만합니다.”

    강왕세자가 차갑게 웃었다.

    “믿을 만하십니까? 그가 루씨 집안사람이란 걸 잊으신 것입니까?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나 어떻게 그를 믿는단 말입니까?”

    황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왜 안 된다는 것입니까? 루씨 가문은 언제나 황실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선제께서 살아계실 때도 그들을 신뢰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제이니까요!”

    강왕세자가 작게 역정을 내자 황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형님, 이는 형님이 짐에게 했던 말입니다. 선제께서 황위에 계실 때 일 처리에 능하셨으니, 짐이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땐 선제께서 어찌하셨는지 생각해보라 했지요. 짐은 형님의 말에 따랐을 뿐입니다.”

    “이 일은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황제가 따지고 들었다.

    “형님, 짐에게 말 한마디로 신하를 버리라 하시면 되겠습니까? 까닭이 있어야지요.”

    강왕세자의 가슴에 불이 솟았다. 전엔 눈앞의 아우가 도무지 제대로 따라오질 못해 속이 탔는데, 이젠 제 주장을 내세우니 그것도 무척 귀찮은 일이었던 것이다.

    “어찌 그를 신뢰하신단 말입니까?”

    제 성질을 내리누른 강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잊지 마십시오. 그는 제 가문과 척을 지고 도망친 자입니다.”

    “짐도 알고 있습니다.”

    황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짐이 그를 데려다 쓰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가문에서 내쳐져 짐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는 자입니다. 바로 그런 자이기 때문에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

    강왕세자는 문득 자신이 그를 말로 이길 수 없단 것을 발견했다.

    ‘아우가 삼 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더니, 환골탈태했구나.’

    답답한 속에 술을 들이마시던 그가 결국 토설하듯 입을 열었다.

    “북양에서 있었던 그 일이 왜 벌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가 조금의 단서라도 발견한다면, 도리어 폐하를 물려 달려들 수도 있습니다.”

    흠칫 놀란 황제가 목소리를 낮췄다.

    “북양왕, 그 일도 설마 집안에서……. 그런 뜻입니까?”

    담담한 목소리로 강왕세자가 대답했다.

    “루씨 가문은 선제를 향한 충심이 높은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루씨 가문을 흔들지 않고 저희가 어찌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어찌 된 상황인지 알게 되셨으니, 앞으로 하실 바를 하시겠지요?”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그제야 안심한 강왕세자가 다시 황제와 잔을 맞댔다.

    “이해하셨으면 되었습니다.”

    * * *

    깊은 밤, 황제가 영수궁에 도착했다.

    “폐하!”

    옥비가 그를 맞으러 모습을 드러냈다.

    술을 마신 황제는 온몸에 진한 주향을 풍기고 있었다. 이미 반쯤 취한 듯한 황제가 주변에 자신을 모시는 자들을 모두 내보냈다.

    둘뿐인 궁 안에서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참이나 말이 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종화야, 난 역시 꼭두각시로구나…….”

    음울한 음성이 작게 궁을 울렸다.

    * * *

    진득한 주향과 함께 강왕세자가 강왕부로 돌아왔다.

    나와 그를 맞이한 세자비가 직접 그의 소세 시중을 들며 불만을 토로했다.

    “요즘 너무 접대가 많으신 게 아닙니까? 매일 이리 늦게 돌아오시면서 술 냄새까지 풍기시니.”

    입을 헹궈낸 강왕세자가 대충 대답했다.

    “도성에 돌아온 것이 삼 년만이오. 여기저기 챙길 곳이 많을 수밖에.”

    그러고는 세자비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께선 어떠시오?”

    세자비가 얼굴에 수심을 띄웠다.

    “어떠시겠습니까? 매일 같이 도련님을 보러 가시겠다고 성화를 부리시고, 저만 보면 그리 욕을 하십니다. 어차피 며느리인 제가 어머니와 싸울 수도 없으니 욕만 하시면 좋을 텐데, 오늘은 손까지 쓰셔서 큰일입니다. 벽지가 제 앞을 막아 저는 피했지만, 그 바람에 벽지는 얼굴이 퉁퉁하게 부어올랐어요.”

    강왕세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가 때린 것이오?”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는 왕씨 유모가 그랬어요.”

    “알겠소.”

    고자질에 성공한 세자비는 내심 흐뭇함을 느끼며 물었다.

    “이제 앞으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머니께서도 성격이 상당하시지 않습니까. 이러다 몸이라도 상하실까 저는 걱정이에요.”

    강왕세자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 듯 대답했다.

    “내 사람을 시켜 매일 어머니께 여덟째의 소식을 전하라 하겠소. 상세가 좋아졌다던가, 무슨 일을 했다는 좋은 이야기만 골라 전하라 하면 되겠지.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한 것들을 찾아 다른 생각을 하실 수 있게 해드리면 될 것이오.”

    그의 말을 금방 이해한 세자비였다.

    “어머니께서 도련님이 요양 가셨다고 여기게끔 하시려는 것이군요. 몸이 좋아지면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게요.”

    강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의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어차피 그에겐 말 한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던가?

    앞으로 어찌할지 대략적인 내용을 들은 세자비가 사람을 시켜 술 깨는 탕인 성주탕(醒酒湯)을 들라 일렀다.

    이윽고 정성으로 꾸민 어여쁜 시녀 하나가 강왕세자 앞에 무릎을 꿇고 탕을 올렸다. 고개를 뜨는 시녀의 뺨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붓기는 이미 가라앉아 있었지만, 붉은 기운은 보는 이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의아한 듯, 그 모습을 흘긋거리던 강왕세자가 물었다.

    “네가 벽지냐?”

    그러자 시녀, 벽지가 수줍은 것인지, 겁을 먹은 것인지 모를 얼굴로 대답했다.

    “네, 세자 전하.”

    “음.”

    강왕세자의 태도에 금방 그의 뜻을 알아들은 세자비가 말했다.

    “오늘 제가 몸이 좋지 않은데, 벽지에게 당신의 시중을 들라 해도 되겠지요?”

    * * *

    어느새 6월에 접어들어,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능양진인은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제자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장공주께서 그 여자를 곁을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찾으십니다. 전에는 그래도 이삼일에 한 번씩 대장공주님을 찾아뵙더니, 이젠 하루가 멀다 않고 들락이는데 한 번 찾아가면 하루, 반나절은 머물러 있습니다. 스승님, 난택산방에서 스승님을 불러 경 강의를 요청하지 않은 지도 벌써 보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거 설마…….”

    “설마, 무엇이냐?”

    미간에 골을 잡은 능양진인의 음성이 저도 모르게 날카로이 올라갔다.

    “대장공주께서 이제 내게 질리셨단 말이냐? 그 아이가 나보다 더 잘하니 이제 그 아이만 부르고 날 찾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말이야?”

    그녀가 벌컥 화를 내자, 놀란 제자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능양진인이 주리를 틀 듯, 제자를 추궁했다.

    “왜 말은 반만 하다 마는 것이야? 더듬거리는 것이 속에 음흉스럽게 감춰둔 생각이라도 있는 것 같구나!”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말에, 제자가 당장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부채를 흔들 던 능양진인이 제가 생각해도 과하게 화를 냈다 싶었는지, 다소 누그러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이 스승은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다만…….”

    수제자가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굴려 그녀의 뒷말을 제가 먼저 말을 이었다.

    “지 사저에게 화가 나셨던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

    그 말에 능양진인은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게야! 내 속이 터지는구나! 내가 그 아이에게 화를 낼 급이야? 그럼 그 미천한 것이 나만큼 대단하단 소리가 아니냐!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멍청한 것을 제자라고 받은 것이야?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것을!’

    화옥이 더욱 그리워지는 능양진인이었다. 그 아이가 비록 제 마음대로 일을 치긴 했지만 그래도 눈치 하나는 참으로 빠르지 않았던가.

    화옥을 떠올리자 결국 그녀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고 말았다.

    ‘그 계집이 그딴 계략을 만들지만 않았어도, 내가 화옥을 죽일 일이 있었겠나!’

    “그렇긴 뭐가 그래?!”

    능양진인이 차갑게 일갈했다.

    “내 제자들이 못난 것을, 내가 왜 그 아이에게 화를 낸단 말이야! 요즘 향객이 없어 궁이 썰렁해진 것이 오래다. 그런데 어찌, 그걸 걱정하는 모습을 본 일이 없어!”

    제자들은 억울했다.

    ‘우리가 왜 걱정을 안 해! 언제 우리가 궁에 소홀한 적이 있다고!’

    더구나 요즘 향객이 없기는커녕, 도리어 전보다 많아진 참이었다. 조방궁 앞이 도떼기시장처럼 시끌시끌할 지경이 아니던가? 심지어는 저 먼 지방에서 굳이 조방궁을 찾아오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하기야, 그 사람들이 조방궁을 찾는 것도 다 화신점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온 김에 다른 전도 찾아 향을 올리고, 시주도 하는 바람에 돈도 더 벌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저 1등을 모두 사방전이 가져갈 뿐이었다.

    전에는 경을 듣기 위해 스승님을 찾아오는 귀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도 전 같지 않아서 이젠 사방전을 많이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청옥, 옛날엔 거지나 다름없던 게……!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우리만 보면 눈부터 깔던 것이, 요즘은 아주 제까짓 게 무슨 세상 높은 고인이라도 된 것처럼 귀인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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