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1)화 (121/385)
  • 121화. 루안의 소원

    웃음을 머금은 지온이 물었다.

    “루 대인께서 저를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해도 되겠는지요?”

    흠칫, 놀란 루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올랐던 홍조는 미처 걷히기 전이었지만, 그는 이미 냉정함을 찾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혼사를 말하기엔 아직 너무 이릅니다. 앞으로 반년 후면 스승님의 상이 끝나니…….”

    그러다 루안의 좁혀진 미간을 본 지온이 눈을 깜박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루 대인께선 책임지지 않으실 생각이신 것인지요? 루 대인, 정녕 이런 분이셨습니까?”

    “그런 소리 마시오.”

    루안의 난감한 얼굴을 본 지온이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드린 돈이 아직 부족했군요.”

    “…….”

    잠시 후, 루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아직 북양에 계시오.”

    ‘그것 때문이었어?’

    지온은 생각했다. 

    혼인과 같은 중차대한 일은 당연히 부모께 말씀을 드려야 했다. 그의 아버지께선 이미 돌아가신 터라 더더욱 어머니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온이 방긋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난 기다릴 수 있어요.”

    ‘수년이나 날 기다려 준 사람이야. 내가 기다리는 게 뭐가 문제가 될까.’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자 서원의 등에도 불이 밝혀졌다.

    문회는 원생들에겐 축제와 같은 날이라, 어둠은 원생들을 더욱 흥분시킬 뿐이었다.

    어떤 이는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고, 누군가는 늑대처럼 긴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을 때, 누군가는 호숫가에서 등을 띄우고 있었다.

    배 옆을 스치는 연등을 낚아 올린 지온이 안에 쪽지를 꺼내 읽었다.

    “과거합격, 동방화촉(*洞房華燭: 신랑이 첫날밤에 신부 방에서 자는 일, 혼인을 원하는 의미)

    짧게 웃음을 흘린 지온이 쪽지를 도로 안에 넣었다.

    과거 무애해각에서도 매년 절기마다 등을 물에 띄웠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금벽이와 강가에 몰래 숨어 있다가 다른 이들의 소원을 몰래 훔쳐보았었다.

    무애해각 사람들은 대부분 학업에 성취가 있길 빌거나, 과거합격을 기원했다. 그러나 일부는 옥종화와 이루어지길 빌었다.

    ‘그러고 보니…….’

    “등을 띄운 적이 있었던가요?”

    그녀가 묻자 지온을 슬쩍 바라본 루안이 대답했다.

    “있소.”

    그의 대답에 답답해진 것은 지온이었다.

    “그럼 제가 왜 당신의 쪽지를 보지 못한 거죠?”

    그의 글씨체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지 않던가?

    잠시 말이 없던 루안이 입을 열었다.

    “쓰지 않았소.”

    “아……!”

    지온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던 그 쪽지가 당신 것이었군요? 난 또 누군가 실수로 잘못 넣은 건 줄 알았어요.”

    호기심이 발동한 그녀가 물었다.

    “왜 쓰지 않았나요? 소원이 너무 많았어요?”

    “……소용이 없으니까.”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모두들 소원을 비는 행위가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어떤 일은 그걸 알면서도 하는 거예요. 하고 나면 그게 이루어질 거란 믿음이 생기니까요. 그게 바로 의식(儀式)이란 거죠.”

    루안은 그저 묵묵히 생각했다.

    당시 자신에게 소원이 이루어지리란 믿음이 있을 수가 있었을까?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던 것을…….

    지온이 선실 밖에 있는 노복을 향해 물었다.

    “이곳에 연등 파는 곳이 있는가?”

    노복이 웃으며 대답했다.

    “있습지요. 게으른 원생들이 직접 등을 만들겠습니까? 다들 산 것이지요.”

    “그럼 우리도 살 수 있게 데려가 주게.”

    “알겠습니다!”

    대답한 노복이 금방 배를 물가에 대자, 연등을 파는 아낙이 지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낙과 가격을 흥정한 지온은, 열 닢에 연등 열 개를 사고 거기에 하나를 더 얹어 받았다.

    그러고는 값을 치를 땐 동전이 없다며 은 조각을 건네 아낙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낙은 은 조각을 받으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돈도 있으면서 이리 흥정을 하다니, 이자가 이 늙은이를 놀리는 게지!’

    연등을 가지고 배로 돌아온 지온은 노복에게 다시 호수 중간으로 가달라고 말한 뒤 루안과 얘기를 나누었다.

    “열하나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지온이 쪽지에 글을 쓰며 묻자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지온이 답했다.

    “일생(一生)을, 평생토록이란 뜻이래요.”

    루안은 순간 가슴으로 번지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누군가와 일생을 평생토록 함께하는 것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무애해각에서는 감히 할 수 없던 생각이었고, 그 일 후에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하늘이 참 신령하죠.”

    지온이 천천히 소원을 써 내리며 말했다.

    “바다에 떨어지며,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요. 이렇게 짧은 인생, 아직 해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하면서……. 그리고 눈을 뜨니 정말 다시 살아났더라고요.”

    쪽지를 접던 루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붓을 내려놓은 그녀가 접은 쪽지를 하나씩 연등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연등은 당신에게 줄게요.”

    지온이 억지로 손에 쥐여준 쪽지를 보며 루안은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이윽고 그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쪽지를 연등에 넣자 지온의 눈썹이 쑥하고 올라갔다.

    “왜요? 또 아무것도 안 쓰려고요?”

    “다 쓸 수가 없소.”

    지온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일찍 알았으면 몇 개 더 남겨놓을 걸 그랬네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모두 내 마음에 있으니까.”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소원이었으나,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던 소원이었다.

    무애해각에 남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었고, 선생님을 따라 학문을 연구하여 제자를 길러내고 싶었으며, 옥종화가 시름을 모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루안의 소원은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삶에선 이룰 수 없을 소원이라 생각했는데, 하늘이 루안에게 다시금 기회를 준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잃지 않겠다.’

    무애해각은 사라졌으나 다시 지으면 되었고. 선생님께선 세상을 떠나셨으나, 자신이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가면 되었다.

    그리고 옥종화가 지온이 되어 이곳에 나타났으니, 모든 것을 되돌리기에 아직 늦지 않은 것이다.

    연등이 하나씩 호수의 수면 위로 떠내려갔다.

    점점이 불을 밝힌 연등 빛이 마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만 같았다.

    제 옆에 두 손을 모은 소녀의 경건한 얼굴을 바라보는 루안의 가슴에,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평안함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 * *

    노를 저으며 배를 쫓는 야우가 한등과 불만을 쏟았다.

    “날이 다 저물었는데, 사공자님은 왜 안 돌아가시는 거냐? 배가 뒤집힐까 걱정도 안 되신데?”

    선수에 누워 별을 보던 한등이 귀찮은 듯 뇌까렸다.

    “공자님 수영하세요. 안 빠진다고요.”

    “이게 지금 빠지고 안 빠지고의 문제냐?”

    야우의 잔소리 포격이 이어졌다.

    “대체 넌 사공자님을 어떻게 모시는 거야? 위험한 곳에 가시면 말릴 생각을 해야지! 아주 얘가 진심도 없고, 건성이야, 건성!”

    한등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네, 야우 선배께선 참 진심이시죠. 그래서 왕야께서 쫓아내셨나?”

    워낙 비수처럼 날아 꽂힌 한등의 말에 야우는 순간 피를 토할 뻔했다.

    “어, 공자님 연등 놓으시네?”

    금방 자리에 앉은 한등이 루안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우,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야우가 고개를 들어보자 늘 차가운 얼굴을 하던 냉미남 청년, 루안이 지금은 무척이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준수한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연등이 배 주변을 휘돌아 밝히자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얽히는 것이 아닌가!

    숨이 턱 막힌 야우는 꺽꺽대며 외쳤다.

    “두, 둘이……. 공자님 안 됩니다! 으악!”

    머릿속에 가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 찼던 야우는 결국 자기가 배 위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대로 호수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풍덩 소리를 들은 지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물에 빠진 거 아니에요?”

    야우가 빠진 쪽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루안이 시선을 거둔 후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잘못 들은 것 같군.”

    * * *

    다시 뭍으로 돌아온 지온은 한참을 찾은 끝에 다시 지장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안전하게 돌아온 것을 본 지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더 늦게 돌아왔으면 소리 지르면서 찾아다닐 뻔했어.”

    지온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지어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지장은 의심은커녕 도리어 부러운 기색마저 보였다.

    “여 선생님이 정말 네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네가 사내였으면 분명 널 문하로 들이셨을걸! 그렇게 몇 년 열심히 공부하고 나면, 네가 장원급제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럼 진짜 가문의 영광인데!”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도 하시면 되지요! 여 선생님께서 서재로 오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오라버니께서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선생님의 마음을 돌리실 수 있으실 거예요.”

    지장이 가만히 생각하니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원에 있는 원생들만 해도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 그중에서 자신과 공몽만이 선생의 눈에 들었단 생각이 들자 지장은 순간,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정진해야겠다. 과거의 장원은 안 되더라도 진사는 돼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지!”

    “저도 그럴 겁니다, 저도!”

    공몽이 끼어들었다.

    “저보고 늘 멍청하다 비웃지 않습니까? 앞으로 절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할 겁니다!”

    그러자 대희가 느긋하게 말을 보탰다.

    “두 사람 잘나가게 되면 나 끌어주는 거나 잊지 말라고. 두 사람만 믿는다!”

    그러자 지장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소리! 넌 시험에 떨어져도 갈 곳 많잖아. 우리가 십 년, 이십 년씩 버텨도 너보다 잘 풀릴지 알 수 없는 거 아니냐? 너나 우리 잊어버리지 마라!”

    대희의 집안인 대씨 가문은 황실의 외척이었다. 궁에 있는 신비가 대희의 누님이 아니던가? 사실 그의 집안에선 대희가 과거에 합격해서 청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이미 포기하고 있었기에 추후, 대희의 나이가 차면 그에게 따로 일을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대희 역시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제대로 잘 풀리기만 하면 두 사람은 꼭 챙겨 주마!”

    소년들은 낄낄거리며 함께 지온을 배웅하기 위해 서원을 나섰다.

    한편, 땔감창고에서 서로를 의지한 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서원 숙소에서 이를 빠득빠득 갈아대며 욕을 쏟고 있었다.

    “지장, 그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안면몰수를 할 수가 있어? 사촌 동생에게 질문 몇 개 던졌다고 사람을 이렇게 똘똘 묶어놔?”

    “그러니까! 아무렴 우리가 제 사촌 동생한테 무슨 더러운 짓이라도 할까 봐?”

    “오기만 해봐라, 아주 혼쭐을 내야지!”

    “오기만 해봐!”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숙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지장과 친우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서로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장!”

    가만히 자리에 선 지장이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뭐?”

    “너 지금…….”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돌돌 굴리던 환봉이 갑자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왔어? 지온 소저는? 오늘 오셨고?”

    상우가 재빨리 말을 보탰다.

    “너도 참, 서원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다 지염이랑 마주치면 어쩌려고? 우리라도 불러서 같이 가지 않고.”

    낮게 웃음을 흘린 지장이 상대조차 하기 싫다는 듯 가버리자 환봉과 상우가 그의 뒤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어, 야! 잠깐만! 그래서 지온 소저는 오신 거야 안 오신 거야?”

    무슨 상황인가 싶어 황당한 얼굴이 된 대희가 공몽에게 물었다.

    “저 두 놈 미친 거냐? 여자 처음 본데?”

    지온 소저가 예쁜 얼굴이긴 했다만, 저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던가?

    공몽은 대답 없이 그저 얼굴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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