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20)화 (120/385)
  • 120화. 다른 길이 하나 더 있지 않으십니까?

    “지련 아우?”

    손을 내저은 지온의 시선은 여강의 배가 있는 곳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강왕세자의 방문이었으니 거드름을 피울 상황이 아니었다.

    금방 배에서 내려온 여강과 루안이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두 사람을 일으키는 강왕세자의 모습은 어질고 선한 모습 그 자체였다.

    이윽고 강왕세자는 대부분의 시위와 수행원들을 그대로 뭍에 남겨두고 산장을 비롯한 몇 사람과 배에 올랐다.

    지온의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으로 엉키는 가운데 지온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루안의 무공 실력이 나쁘지 않잖아. 차라리 이 기회에 강왕세자를 죽이면 다 해결이 될 수도…….’

    “지련아, 우리 방으로 가서 경치나 볼까?”

    지장의 목소리에 지온이 생각에서 빠져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서원의 풍수가 무척 좋아서 더는 경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계속 호수에서 물놀이하는 게 어때요?”

    그러자고 대답한 지장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희와 공몽과 함께 작은 배에 올랐다.

    “화신첨이 정말 용하지 않습니까? 선생님께 배움을 청할 수 있게 되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인데요.”

    공몽이 계속 같은 소리를 떠들어 대자, 듣다 못한 대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말은 바로 해라. 지온 소저가 대단한 거지! 여 선생님은 지온 소저를 생각해서 너희 둘을 받아 준 거야, 알겠냐!”

    비록 자신이 글재주는 없을지언정,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인간사에 대해서는 바삭했다. 공몽 열 사람을 데려다 놓아도 자신 한 사람에 비교할 바가 아니지 않겠는가!

    지장은 조금 전 여건에게 대답하던 지온의 대답을 떠올렸다. 그 역시 지온에게 탄복한 상태였다.

    “지온아, 네 학문이 그리 뛰어날 줄은 전혀 몰랐다. 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둘째 숙모님께서 전에 너더러 예도 모르고, 사람 대할 줄도 모른다 했던 걸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나온다.”

    그러나 지온의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지장과 그의 친우들이, 앞으로 어찌 될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흘려들으며, 지온은 계속해서 여강의 배를 바라보았다.

    강왕세자는 배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대략 반 시진 후 그는 그곳을 떠났다.

    그를 배웅한 루안은 여전히 선수에 고요하게 서 있었다. 호수를 훑어보던 그가 멀리 있는 지온과 시선을 맞췄다.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린 지온이 지장에게 말했다.

    “갑자기 떠오른 일이 있는데, 여 선생께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지장과 친우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노를 저어 지온을 배로 데려다주었다.

    지온은 여강의 배에 오를 때 자연스레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잡아 준 루안과 선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대희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 가장 친한 친우인 지장에게 물었다.

    “남녀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 법이라 했는데, 루 대인이라는 자가 저렇게 네 사촌 동생의 손을 덥석덥석 잡아도 되는 거냐? 어? 이건 아니지 않아?”

    “배가 흔들리니 잠깐 잡아준 게 다인데, 뭘……. 더구나 루 대인이다, 루 대인! 지온에게 몹쓸 생각을 하겠냐?”

    “하긴 그렇네. 눈에 돈 밖에 안 보이는 사람이니…….”

    지난번 취태평에서 루안이 남긴 인상이 너무나 강하게 박혀버린 두 사람은, 잠깐 이 상황을 괴이쩍게 여겼으나 특별히 마음에 두진 않았다.

    * * *

    지온이 다시 선실로 들어오자, 답답한 마음으로 있던 여강의 굳은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오, 지온 소저!”

    루안이 지온의 진짜 신분에 관해 이야기한 탓인지, 이번엔 여강이 지온의 이름을 불렀다.

    지온이 다시 예를 올렸다.

    “소녀, 편히 출타하기 위해 남장을 하였습니다. 실례하였습니다, 선생님.”

    여강이 웃음을 지었다.

    “어떤 차림을 하던 자네의 자유인데, 내게 실례일 것이 무엇인가? 앉으시게.”

    지온이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는 둘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나이도 가장 어리고 배분도 가장 낮았던 그녀는 자연스레 차 우리는 일을 맡았다.

    그녀가 우린 차를 두 사람 앞에 놔두자, 그제야 여강이 입을 열었다.

    “옛사람들이 홍수첨향(*紅袖添香: 공부하는데 미녀가 짝이 되어준다는 뜻)이라더니, 역시 기꺼운 일이로구먼. 그저 물을 끓이고 차를 내는 것도 이리 아름다우니 어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루안이 마치 그에게 적당히 하라는 듯 헛기침을 하자 여강이 두 손을 들었다.

    “알겠네, 알겠어. 그만하겠네. 내가 주책을 떨었다 치세.”

    잠시 차를 마시던 루안이 물었다.

    “사형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여강이 곁눈질로 지온을 보았지만 루안은 마치 이를 보지 못한 듯 계속 물었다.

    “강왕세자가 이리 나오는 것은 분명 경고의 의미입니다. 사형이 다시 전처럼 재기하실 생각이라면, 자기 아래로 들어오란 의미일 것입니다.”

    여강은 그제야 이해했다.

    지금 사제 녀석은 일부러 지온 소저더러 들으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사제가 왜 이리 지온 소저를 믿는 것이야? 경솔한 아이가 아닌데…….’

    여강은 마음에 떠오르는 의심을 누르며 대답했다.

    “당연히 강왕부 아래로 들어갈 순 없네. 그리하는 것은 스스로 그물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야.”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왕세자 역시 사형을 진짜 신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사형을 옭아매고 싶은 것이겠지요.”

    여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닐 말인가? 내 도성에 돌아오면 힘들겠지만, 한 번은 일을 치러야 할 거라 여겼네. 그러나 이리 빠를 줄은 몰랐지. 더구나 처음부터 이리 강한 수를 던질 줄은 더더욱 생각지 못했네.”

    사실 여강은 모친상을 치른 후에 경성에 돌아와 연줄을 이용해 다시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왕세자가 이리 세상 이들이 다 알도록 패기 넘치게 자신을 찾아왔으니, 다른 이들이 감히 자신에게 연줄을 대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강왕부의 체면을 깎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강왕세자가 여강을 이리 찾아옴으로써, 인맥을 이용해 재기할 길은 여강에게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되면 우선 교수 일이라도 하여야지. 그나마 중앙권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도성에라도 있는 것이 낫네.”

    당장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루안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둘은 답답한 마음에 차만 들이켰다.

    지온이 두 사람의 빈 찻잔에 차를 채우며 물었다.

    “선생님께는 다른 길이 하나 더 있지 않으십니까?”

    큰 기대 없는 얼굴로 여강이 되물었다.

    “어떤 길인가?”

    지온에게 묘수가 있을 거라는 큰 기대가 없던 그였다. 그런데 지온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강왕부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딱 한 사람이 있지 않은지요?”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의 시선을 마주한 지온의 입술이 나지막이 열렸다.

    “황제.”

    멈칫한 여강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분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온의 입이 다시 열렸다.

    “선생께선 이미 도성을 수년간 떠나계셨습니다. 그러니 도성의 형세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시겠지요?”

    루안이 침음을 흘리며 동조했다.

    “확실히…….”

    의아해진 것은 여강이었다.

    “무슨 뜻인가? 사제 생각에도 가능할 것 같단 말인가? 설마 작금의 황제를 그 자리에 밀어 올린 곳이 강왕부란 것을 사제가 모른다는 말인가?”

    금상이 즉위하던 해, 사실 황위를 빼앗은 자는 강왕이었다. 그저 스스로 그 자리에 앉기엔 어려움이 많으니, 제 아들을 대신 밀어 그 자리에 앉힌 것뿐이었다.

    심지어 강왕세자만 하더라도 지금의 황제보다 더 강한 자가 아니던가?

    이미 그것을 뚫어보았던 여강이었기에, 빠르게 관직에서 사직하여 물러났던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자신을 높게 평가하던 황제를 놔두고 자신이 왜 떠났겠는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일찍 자리에서 물러나 떠났기에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또 다르지요.”

    루안이 말했다.

    “삼 년이 지났습니다. 강왕과 강왕세자가 모두 저들에게 내려진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 용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지금의 황제입니다. 부족하지도, 바보도 아닌 황제가 그동안 발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습니까?”

    생각에 잠겼던 여강이 물었다.

    “옳은 말이네. 그러나, 그가 제 형의 체면에 먹칠을 할 수 있겠나?”

    루안이 웃음을 지었다.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란 본래 싸우길 좋아하지요. 선제가 계실 적에는 공동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천하에 지존은 단 한 사람인데, 그들에겐 셋이나 있으니 누가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그 자리를 위해 형제가 반목하고 부자(父子)가 멀어지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형은 폐하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여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입니다.”

    루안의 말이 이어졌다.

    “자질이 아무리 평범한 자라더라도 제왕이 되는 것을 배울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확실한 명분이 그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젊고 힘이 넘치는 나이라는 것은, 그가 가진 확실한 힘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 외에 다른 방도도 없지 않으신지요?”

    지온이 덧붙였다.

    “한 번 해보시지요. 성공할지 모를 일입니다.”

    깊은 생각에 잠겼던 여강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두 사람에게 설득당했구먼!”

    그러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제, 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말을 해보시게. 지온 소저가 어찌 이런 일을 손바닥 보듯 잘 아는 것인가?”

    질문을 던진 여강은 진짜 묻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두 사람, 대체 무슨 관계인가? 응?’

    * * *

    해가 서쪽으로 저물자 날이 쌀쌀해졌다.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었던 여강이, 기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산장이로군. 가서 손님들을 맞고 오겠네.”

    서원에 적을 두고 있으니, 여강이 이런 의례적인 행사에 빠지기는 어려웠다.

    장원급제자인 여 장원은 구시렁거리며 제 도포를 정리하더니 배를 뭍에 대라 시켰다.

    배가 서자 루안이 배를 움직이던 노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형, 저는 그런 자리에 나서면 저들 속을 뒤집기나 할 겁니다. 괜히 사형만 피곤하실 테니, 잠깐 노복만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그러시게. 내가 배웅은 못 할 것 같으니 알아서 돌아가게.”

    손을 흔들고 그만 떠나려던 여강은 돌연, 행사에 참석하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그가 돌아섰을 땐 이미 노복이 배를 밀어 호수로 떠난 뒤였다. 그가 제 머리를 치며 침음을 토했다.

    “아니, 소저랑 뱃놀이할 생각이었으면서 사형을 돕는 척했구먼!”

    다시 서원으로 돌아가던 여강이 답답한 듯이 읊조렸다.

    “그런데 그 소저가 어찌 이리 눈에 익을꼬? 내 분명 본 일이 없는데…….”

    * * *

    루안이 연잎을 따다 그녀에게 건넸다.

    화병에 꽂힌 연꽃을 본 지온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형에겐 꽃송이를 건네고 제게는 꽃잎을 주는 거예요?”

    루안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형의 꽃은 소똥 위에 핀 꽃이었지.”

    지온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사형 앞에서도 그리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루안 역시 미소를 얼굴에 비추며 말했다.

    “어차피 자리에 없지 않소?”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지온이 손에 든 연잎을 들며 물었다.

    “그럼 내게 준 건요?”

    “그것은…….”

    그의 시선이 흐르는 물에 가 머물렀다.

    “꽃에는 그를 받쳐 줄 푸른 잎이 필요한 법이오.”

    지온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과거의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들이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는 언제나 태자였다.

    물론 태자도 이렇게 말은 하지 않았다. 태자는 마치 가족을 대하듯 지온에게 친절했고, 스스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루안은 바깥 풍경을 보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새빨개진 그의 두 귀가 두근거리는 그의 가슴을 보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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