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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19)화 (119/385)
  • 119화. 이 아이가 여아란 말인가!

    뽑힌 다른 원생들은 이미 여강을 보고 떠난 후였다.

    배에 오른 세 사람은, 뱃전에 기댄 루안을 볼 수 있었다.

    지온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지만, 루안은 평소와 다름없이 시선을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정말 연기도 잘한다니까.’

    이리 생각한 지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과제를 펴든 여강이 먼저 지장과 공몽을 향해 물었다.

    “두 사람의 답안은 비록 신선하긴 하나, 공인된 해석법과는 다른 내용이네. 이런 내용을 냈다가 시험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을 것이 걱정되지는 않았는가?”

    지장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만약 진짜 시험이었다면 이리 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

    여강이 은근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스스로 내게 잘 보이려 일부러 이리 했다 인정한 것인가?”

    지장이 빠르게 그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험을 보는 것은 일생일대의 큰일입니다. 저 혼자만의 인생이 아니라, 집안에 계신 부모님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마음이 가는 대로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정당하구나.”

    그리고 다시 공몽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떠한가?”

    잠시 멍하게 있던 공몽이 대답했다.

    “저는 그리 많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강이 실소했다.

    “그럼 시험에서도 이리 답을 할 거란 말인가?”

    공몽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시험이었다면 아마 저는 그 부분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린지 이해한 여강은, 공몽이 참 솔직한 녀석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누가 옆에서 한마디 해준 말에 도움을 받아 사고가 이리로 흘렀나 보구먼.’

    두 사람에게 질문을 마친 그의 시선이 지온에게로 옮겨갔다.

    “자네는 우리 서원의 원생이 아닌가?”

    지온이 예를 올렸다.

    “저는 형님을 보러 왔다가 함께 과제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여강이 물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인가? 난 이 그림이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네. 자네가 설명을 해주겠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린 그림의 의미는, 군자와 소인은 본래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강이 웃으며 물었다.

    “어찌 구분이 없다 하는가? 군자의 마음은 너그럽고 평탄하나, 소인의 마음은 늘 근심에 차 있다 했고. 군자는 사람과 두루 친밀히 사귀나 사적으로 무리를 이루지 않으나, 소인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닐지언정, 사람과 친밀히 사귀지 않는다 했네. 설마 자네는 이러한 성현의 말씀이 틀렸다고 말하는 건가?”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그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가?”

    제 그림을 가져온 지온이 하나씩 손으로 가리켜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조정의 여러 군신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림의 문사들이고, 이들은 상인, 이들은 장인들이며, 이들은 농부들이지요. 조정의 군신들은 국책을 정하고, 문사들은 세인을 교화합니다. 상인은 장사를 하고, 장인은 물건을 만들며, 농부들은 논밭을 일구지요. 이들이 모두 모여 대순(*大舜: 나라 이름)을 이룹니다.”

    잠시 말을 멈춘 지온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한 사람의 농부는 당연히 제 배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굴 것입니다. 그것은 장인이나 상인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익이라는 달콤한 고삐에 조인 그들이 더욱 열심히 일해야 비로소 저희가 걸친 옷가지나, 손에 든 붓, 입으로 들어가는 차가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군자 역시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아가며, 가정을 돌봐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도의를 해하지 않는 선이라면, 이익을 쫓더라도 그것이 지적받을만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온이 그림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는, 있는 그대로의 대순일 것입니다. 군자가 없다면 백성을 교화할 수 없을 것이고, 소인이 없다면 저희는 아마 이토록 아름답고 정교한 비단들과 다기들을 사용할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저는 성현이신 공자께서는 그저 한 가지 현상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신 것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군자와 소인이 모두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 안에서는 비난이나 배척이 일지 않으니, 군자와 소인의 구분이랄 것이 없는 것이지요.”

    톡톡.

    서탁을 두드리는 여강의 얼굴 위로 미소인 듯 아닌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는 아무래도 선배들의 주해(*注解: 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구먼.”

    지온은 그에 부정하지 않았다.

    “말도 많이 했는데, 차라도 한 잔 마시게.”

    그리고 제 노복에게 손짓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보리차일세. 자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먼.”

    감사를 표한 지온이 앞으로 나가 노복이 건네는 차를 받아 들었다.

    지장과 공몽은 부러워 죽을 맛이었다.

    여 선생이 주는 차를 마시다니. 배에서 나가면 허풍 한번 거하게 할 수 있는 건수가 아닌가!

    루안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위로 올라갔다. 그는 조금 전 지온이 낸 답이 여강의 속을 정확하게 긁어주는 답이었단 것을 알고 있었다.

    ‘옥종화는 사형의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지 오래다. 사형이 어떤 관점을 견지하는지 모를 리가 없지.’

    대장장이 출신인 그는, 이제 다른 이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가진 생각마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파격적이다 보니, 당연히 그런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제 생각을 소리 내어 떠들어 주는, 귀하디귀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어찌나 속이 시원할까!

    여강이 부들부채를 두어 번 흔들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자네는 올해 나이가 몇인가? 동생시(*童生試: 서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는 보았고?”

    지온이 대답했다.

    “저는 올해 이미 열여섯으로, 과거는 응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여강이 의아하여 되물었다.

    “과거엔 어찌 응시할 생각이 없는가?”

    이런 자가 과거를 치르고 들어와 같이 관리 일을 하면서 조정에 퍼진 낡아빠진 관념들을 같이 바꿔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루안이 이미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크흠, 사형…….”

    “뭐! 왜!”

    여강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루안은 어쩔 수 없이 제 울대를 가리키며 그에게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됐으니 울대는 안 보이는 게 정상이지 않냐고 여강이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

    휙 하고 지온에게 시선을 돌린 여강은, 그녀의 귀에서 귀걸이 구멍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목소리가…….’

    여강은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아이가 여아란 말인가! 그래서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는다 했던 것이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 여강이 부들부채를 벅벅 흔들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제자로 삼고 싶은 놈을 하나 만났다 했더니만, 어찌하여 여아란 말인가? 여아는 왜 또 서원까지 달려와 이리 과제까지 제출한 것이고? 포기하자니, 이렇게까지 마음에 쏙 드는 싹을 가진 녀석이 없어 아쉽고 그렇다고 받자니, 애초에 데려다 기를 수 있는 싹이 아니라 받을 수가 없으니!’

    여강이 혼란에 빠진 사이 루안이 물었다.

    “서원으로 나들이를 나온 건가?”

    지온이 대답했다.

    “나들이는 겸사겸사 한 것이고, 사실은 풍수를 보러 왔어요.”

    “풍수?”

    그녀가 공몽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여기 공몽 오라버니께서 화신첨을 뽑으셨거든요.”

    그제야 루안은 어찌 된 상황인지 이해했다.

    “향시에 붙는 것이 소원이로군.”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여강이 놀라 물었다.

    “두 사람, 아는 사인가?”

    루안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몇 번 본 사이입니다.”

    여강은 몇 번 본 사이의 말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로구먼. 사제가 어찌…….’

    “사형, 제가 보니 제자는 받기 힘드실 것 같고 차라리 서동(*書偅: 글을 받아쓰게 하는 등 잡무를 보는 소년) 둘을 들이시는 게 어떠십니까?”

    “하?”

    루안이 지장과 공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사람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형께서는 시녀도 두시지 않을 텐데, 옆에 두시고 먹이라도 갈게 하세요.”

    “아니, 잠깐…….”

    “자네 둘, 가만히 뭐 하는가?”

    루안이 여강의 말을 끊고는 지장과 공몽을 바라보자 지장과 공몽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달려들었다.

    “선생님, 차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여강은 강제로 서동(書偅) 둘을 들이게 되었다.

    아직도 이게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장원급제자인 여 장원도 관밥은 그만 축내야 하지 않겠는가!

    ‘저 여아 한 마디에 사제라는 놈이 제 사형 머리 꼭대기에 앉아 아래로 서동을 밀어 넣어? 나는 심지어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했는데……!’

    부글부글 끓는 화를 삭이며 부들부채만 팡팡 휘두르던 여강은, 뭐라 불만이라도 토할 생각으로 지장과 공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안절부절 불안 가득한 얼굴을 보자 여강은 자신이 힘들게 공부하던 소년 시절이 떠올라 그만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다.

    “하아…….”

    한숨을 내쉰 여강은 두 사람이 올리는 차를 받아 들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니, 자네들은 수업받기 한 시진 전에 내 서재로 오게.”

    환희에 찬 두 사람이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기운이 빠진 듯한 여강이 손을 내저었다.

    “좋은 날이니, 그만들 가보게.”

    “네, 선생님!”

    지장과 공몽이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나가자 지온 역시 더 남아있기 어려운지라 그만 가보겠다는 말을 올렸다.

    여강은 지온과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여아라는 생각에 그녀만 남겨둘 수가 없어 보내고, 치솟은 짜증을 모두 루안에게 쏟았다.

    “사제. 몇 년 안 본 사이에 여인네 방심도 흔들 줄 알고, 아주 훌륭하게 자라셨구먼! 그런데 방심을 흔들면 흔드는 것이지, 사형은 왜 내다 팔고 그러시는가?”

    * * *

    원생들은 긴 정자에서 아직 흩어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여 선생께서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진짜 두 사람을 제자로 삼을지가 너무도 궁금했던 것이다.

    세 사람이 배에서 나오자마자 원생들이 우르르 둘러싸더니 와글와글 질문을 쏟아부었다.

    “지장, 여 선생께서 뭐라셔?”

    “선생께서 공멍청이, 네 글도 평가해주시더냐?”

    공몽은 바보 같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해주셨죠.”

    “뭐라고 하셨는데! 빨리 말해봐, 빨리!”

    “신선해서 재미있긴 하지만, 시험에서 이렇게 쓰면 떨어질 거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원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안심했다.

    ‘제자가 된 게 아니구먼! 그럼 부러워 할 것도 없겠어!’

    지염도 도로 안심했다.

    ‘그러면 그렇지. 지장이 나보다 나을 리가 없지!’

    “대신 선생께서 우리 둘에게 내일 아침 일찍, 서재로 찾아와 서동 일을 하라고 하셨다!”

    지장이 크게 소리쳤다.

    “뭐, 뭐라고?!”

    원생들이 다시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그럼 뭐야? 앞으로 너희들이 여 선생님을 따르게 됐단 거야?”

    “오오!”

    제자로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자로 받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지염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했다.

    모인 소년들은 시기와 질투, 부러움이 뒤섞인 얼굴로 저들끼리 쉼 없이 떠들어댔다.

    그때, 한 무리 일행이 긴 정자를 따라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 서서 걸어오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사내는 화려한 복색에 금관을 쓰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서는 거만한 기색이 뚝뚝 떨어졌다.

    그의 뒤를 서원의 산장과 초청된 명사, 그리고 그를 지키는 시위와 수행인들이 뒤따랐다.

    한쪽으로 물러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던 원생들은 나중에야 물었다.

    “누구냐?”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지만, 지온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황제와 너무 닮았어.’

    뒤를 따른 시위에게는 강왕부의 비밀표식도 있지 않던가.

    ‘나이대를 보면, 아마도 저 사람이 그 강왕세자?’

    역시나 그들은 여강의 배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배에 올라 말했다.

    “여 선생, 강왕세자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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