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18)화 (118/385)
  • 118화. 왜 이리 눈에 익지?

    서원에는 호수를 따라 길게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대략 이에서 삼 리 정도 길이의 정자였는데, 문회가 열리면 서원에서는 정자 안에 탁자와 의자를 배치해두고 붓과 먹을 준비해두었다. 정자는 시원하면서도 운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자 구석에 자리를 잡은 지장과 공몽, 대희는 열변을 토하며 의견을 쏟아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있던 지온이 손을 뻗어 차가운 호숫물을 그들에게 슬쩍 뿌려 대화를 끊었다.

    “제가 한 번 이야기해 볼 테니, 들어보실래요?”

    세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여 선생님의 출신은 다들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본래 선생께선 대장장이 출신으로 시정에서 사셨던 분이에요. 민초들이 처한 환경을 직접 겪으셨던 분이란 거죠. 만약 다들 군자와 소인을 단순히 신분으로만 구분한다면, 여 선생께선 분명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실 거예요.”

    멈칫한 지장은 순간 커다란 깨달음을 느끼고는 외쳤다.

    “아, 나 알 것 같아! 품성으로 구분을 하는 거구나! 교육하는데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했으니까!”

    파제(破題)의 실마리를 얻은 세 사람은 금방 구상을 마치고 각자 지필묵을 챙겨 글을 써 내리기 시작했다.

    지온 역시 한 벌을 챙기는 것을 본 지장이 지온의 화선지를 흘끔 살폈다. 지온은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붓질 몇 번 오간 것이 전부였지만 그림은 생동감이 넘쳤다.

    지온은 시정의 백태만상을 그리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강과 강을 가로지른 대교(大橋), 그리고 다리 위를 행인들이 오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길거리엔 점포들이 자리했다. 저 먼 곳엔 농부가 밭을 경작하고 목동이 소를 치는 모습까지…….

    지장은 내심 탄성을 토했다.

    ‘지온이 그림 솜씨가 화가 뺨치네!’

    하지만 제 글을 완성하는 것에 마음이 바빴던 탓에 그렇게 탄성만 한 번 뱉었을 뿐, 지장은 다시 제 글에 집중했다.

    지온은 그림을 무척이나 빠르게 그렸기 때문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지온의 시선이, 일순 한 곳에서 멈추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조각배에 탄 인영이 어딘지 익숙했다.

    * * *

    손에 잡히는 연꽃을 딴 루안이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연꽃을 건넸다.

    여강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사제. 꽃은 아리따운 미모를 가진 여인에게나 주는 것이지, 나처럼 털이 부숭부숭한 사내에게 주면 낭비일세.”

    “그럼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여강이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루안을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확실히 그건 그렇네. 사제가 손에 꼽히는 갑(甲)급 미모를 갖고 있긴 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루안은 그저 입만 삐죽거렸을 뿐이었다.

    무애해각에 있을 적에 사형들이 얼마나 자신을 두고 놀려댔었는지, 이미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사형께서 상을 치르느라 고향으로 가셨을 때 저도 목숨이 위태로웠었던 지라 미처 묻질 못했습니다.”

    루안이 입을 열었다.

    “상을 당하셨을 때, 새로운 황제가 탈정(*奪情: 부모의 상 중에 출사를 명하는 일)의 뜻이 있었는데 왜 남지 않으셨습니까? 벌써 삼 년이 흘러 지금은 조정의 형세도 크게 바뀌어, 다시 일어서시려면 쉽지 않으실 겁니다.”

    루안이 말을 돌리지 않고 묻자 여강의 대답 역시 간결하게 돌아왔다.

    “그땐 남아있을 수가 없었네.”

    “왜입니까?”

    여강이 웃었다.

    “목숨을 잃을 것 같았네.”

    루안의 신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 말은 사형께서 남아계셨으면, 사형께서도 숙청당하셨을 거란 말입니까? 그러나, 지금의 폐하께선 사형에 대해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계실 텐데…….”

    “그런 건 소용없네.”

    여강이 고개를 저었다.

    “암중에서 칼을 가는 이가 있어.”

    루안이 생각에 잠기자 여강이 말을 덧붙였다.

    “사제가 도성으로 들어왔을 때는 마침 숙청이 끝나고 지금의 황제가 급히 제 심복을 찾고 있어, 때가 좋았지. 그러나 뒤에 숨어 검은 손을 휘두르는 이가 돌아왔네. 앞으로는 사제, 자네도 조심하는 게 좋아.”

    ‘사형이 말하는 이가…… 강왕부인가?’

    루안이 생각에 잠기자 여강은 화병에 연꽃을 꽂고는 말했다.

    “그만 뭍으로 가세. 우리 원생들의 과제를 받으러 가야지!” 

    * * *

    여 선생의 배가 돌아오자 이미 글을 완성한 원생들은 꼭 목이라도 잡힌 거위처럼, 머리를 배 쪽으로 향한 채 일제히 배만 바라보았다.

    이미 예전에 글을 완성한 지염이 여전히 제 글을 탈고 중인 지장을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동창들과 도발하듯 대화하기 시작했다.

    “주제가 너무 간단하지 않았냐? 여 선생께서 배려해주시느라 쉽게 내주신 것 같아.”

    “그건 형님께서 잘하시니 그러신 거고요. 어떤 놈들은 아직도 다 못 썼답니다!”

    “이렇게 쉬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리 오래 걸리는데, 그래도 여 선생님의 눈에 들고 싶을까?”

    “그러게나 말이야! 제 주제를 알아야지…….”

    왈칵 짜증이 난 지장이 대거리하려던 찰나, 지온이 탁자를 톡톡 쳤다.

    “목소리 크다고 다 맞는 말도 아닌데, 오라버니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말에 지장은 억지로 지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지장이 빠르게 검사를 마쳤을 때, 공몽과 대희 역시 대충 정리가 끝났다.

    대희가 지온을 보니 그림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림에 이름까지 적은 것은 보고 대희가 호기심에 물었다.

    “지련 아우, 아우 것도 제출하려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저는 서원의 원생이 아닌데, 그래도 제출할 수 있을까요?”

    지장이 대답했다.

    “오늘은 문회가 있는 날이라 외부에 개방된 날이잖아. 내고 싶으면 낼 수 있지.”

    대희가 궁금한 듯 그림을 펼쳐보았다.

    “근데 이게 주제랑 무슨 상관이지? 그림은 예쁘긴 한데…….”

    지온은 그저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여강 옆에 있던 노복이 찾아와 과제를 걷기 시작했다. 원생들은 늦게 내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제출이 늦어져 자신의 것이 아래로 깔리면, 선생님이 제대로 살피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지온과 다른 세 사람의 과제도 모두 제출됐다.

    지장과 공몽, 대희는 자신들의 실력이 그저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애초에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이들은 과제를 제출하고 배를 찾아 호수로 놀러 나갔다.

    배에 기대어 호수를 바라보던 루안은, 돌연 낄낄 웃으며 지나가는 소년들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배 선수에 앉은 남색 도포 소년……. 왜 이리 눈에 익지?’

    “자자, 사제. 과제 볼 시간일세!”

    여강이 그에게 과제를 한 뭉텅이 건넸다.

    그러나 루안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손으로는 과제를 뒤적거리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 테고……. 그녀가 서원엔 왜 온 것이지?’

    그 사이 여강은 과제 살피는 일에 푹 빠져, 가끔가다 껄껄 웃음까지 터트렸다.

    “재밌군, 재밌어!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내가 시험을 치를 때 보다 아는 것이 많구먼. 다들 나이들도 어린데, 이리 시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니.”

    그는 원생들의 실리주의적인 면모를 싫어하지 않았다.

    ‘과거야, 뭐, 출제와 파제가 모두 형식이 정해져 있는 것을.’

    다만 사고가 오래 제한되어 있다 보면 번득이는 총기를 가지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여기 몇 편은 재밌으니, 남겨두고……. 아니, 이건…….”

    여강이 그림을 손에 들고 한 장씩 살피다 점점 빠져들었다.

    마지막 장을 펼친 그가 위에 쓰인 이름을 보고 물었다.

    “지련(池璉)? 어떤 원생인가?”

    원생명부를 뒤적이던 노복이 대답했다.

    “대인, 명부에 이름이 없습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인가?”

    여강은 지련이란 이에게 흥미가 일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돌아본 루안이 이름을 떠올리며 중얼댔다.

    “지련……?”

    “왜, 사제가 아는 이름인가?”

    여강이 손에 든 그림을 건네며 묻자, 루안이 받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알 수도 있겠습니다.”

    화선지 위에 적힌 이름 위에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거의 확신했다.

    “역시 그 사람입니다.”

    “음?”

    루안이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림 속 선 하나하나가 모두 기억에서 걸어 나온 것 같구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의 그림이다.’

    루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미소를 본 여강은 순간 정색을 했다.

    “사제, 그 표정은 소름 끼치네.”

    순식간에 미소를 거둔 루안이 다시 여강을 바라보자 여강이 말했다.

    “그래, 그게 옳지.”

    여강이 루안의 가슴께를 툭툭 쳤다.

    “멀쩡하면서 왜 그리 웃고 그러나? 난 또 자네 가슴에 봄이라도 온 줄 알았잖은가.”

    입을 씰룩거린 루안이, 노복을 향해 물었다.

    “서원에 지씨가 있는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염이고, 다른 하나는 지장인데, 같은 혈연지간으로 보입니다.”

    지씨는 흔한 성이 아니었다.

    서원에 원생이라고 해봐야 수백 명 밖에 되질 않으니 우연이라기엔 확률이 너무 낮았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겠군. 그들 집안사람입니다.”

    지련은 지가의 삼공자로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가 제 사촌 동생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아는 사람인가?”

    “지 재상은 사형께서도 아시지요?”

    “오, 그 집안인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여강이 과제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지염은 시험의 형식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원생이네. 내 생각에 조금만 다듬으면 거인이 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야. 지장은, 내 보니 문장 수준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나, 사고가 아주 신선한 구석이 있더구먼. 그래서 조금 전에 내 만나보려고 빼놓은 참일세.”

    * * *

    노복이 명부를 가지고 배에서 내리자 서로 의견을 나누던 원생들이 그를 둘러쌌다.

    특히나 지염은 제가 생각하기에 제출한 과제로 낸 글이 아주 정교하게 잘 써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이미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다.

    호수에서 물놀이하는 지장 일행을 흘긋거린 지염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스쳤다.

    과제를 내자마자 호수로 물놀이를 갔다는 건 애초에 뽑힐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정말이지 기개가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저딴 인간들과 싸우다니, 내 수준만 떨어지지!’

    지염은 오만함을 갈아 빚은 듯한 얼굴로 노복이 부르는 이름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이름이 호명되는 중에 계속 제 이름은 들려오질 않고 있었다.

    명부의 마지막 장인 것을 본 지염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공몽, 지장, 지련.”

    말을 마친 노복이 명부를 덮고 말했다.

    “이상 원생들은 저를 따라오십시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지염은 곧 자신은 선택받지 못한 명부에 지장 일행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리가 없지 않은가! 지장의 수준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찌 이럴 수가 있어! 더구나 지련은 이제 막 돌아온 지온이 이름을 사칭한 것 같은데, 여아가 어찌 글을 안단 말이야!’

    지염과 함께 놀라 자빠진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지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공몽의 수준이 어떻게 여 선생의 눈에 들 수가 있단 말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지염이 노복을 불렀다.

    “다 부른 것인가? 잘못 부른 것이 아니고?”

    노복이 미소와 함께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인께서 보고자 하신 분들은 방금 호명한 분들이 전부이십니다.”

    지염의 속내를 눈치챈 그의 친우들이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네! 지염이 없는데 지장이 있다니! 지염은 언제나 지장보다 글을 더 잘 썼다네. 이보게들, 안 그런가!”

    적잖은 이들이 그에 화답했다. 그러나 노복이 공손하게 말했다.

    “저는 모르옵고, 대인께서 주신 명단에는 그분들이 다입니다.”

    그때 누군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말했다.

    “근데 그놈들 어디 갔어? 왜 없지?”

    “아까 배를 빌리는 것 같던데?”

    호수 위를 확인한 원생들은, 역시나 물놀이를 하는 지장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원생들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 돌아와! 여 선생께서 부르신다!”

    신나게 놀고 있던 지장 일행은 갑자기 뭍에서 제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

    당황한 공몽이 물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그러자 대희가 대범하게 대꾸했다.

    “돌아가 보면 알게 되겠지!”

    배를 저어 네 사람이 돌아왔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대희가 꽥 소리를 질렀다.

    “농이지? 저 두 놈이 진짜 뽑혔다고?!”

    그와 친한 다른 친우가 그를 놀렸다.

    “그래! 딱 너만 빼고 다 뽑혔는데, 실망 안 하냐?”

    대희는 그런 것엔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내가 안 뽑히는 건 당연한 건데, 뭐! 야야, 빨리 가서 선생님 뵙고 와라!”

    꿈만 같은 상황에 놀란 것은 공몽도 마찬가지인지라, 두 번 세 번, 계속 물으며 확인했다.

    “정말 내가 맞는 겁니까? 확실한 게 맞습니까?”

    “맞다니까! 대답만 벌써 몇 번이냐!”

    공몽의 그런 바보 같은 모습에 소년들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던 지장은, 지염의 얼굴이 우울하게 굳은 것을 보고는 일부러 도발하듯 그를 쳐다보았다.

    ‘뭐, 인마! 이럴 줄 몰랐지?’

    지염의 얼굴이 더 시꺼멓게 죽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받지 못한 것은, 선택받지 못한 것! 그저 두 눈 멀쩡히 지장이 배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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