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17)화 (117/385)
  • 117화. 여 선생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와 지장 옆에 선 대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할 말 있냐?”

    대희를 보자 지장에게 따졌던 소년의 목소리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다 같은 동창들인데, 말을 너무 심하게 하니까 그렇지!”

    “너희보다 말을 심하게 한 것 같냐?”

    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몽은 그냥 착한 것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매일 공멍청이, 공멍청이라고 공몽을 불러대잖아?”

    “넌…….”

    누군가 대희와 입씨름을 하겠다고 나서자 금방 제 친우가 그를 잡아끌며 조용히 속삭였다.

    “야, 됐어, 그만 가자. 대씨 집안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집안이 아니다.”

    대씨 가문은 조정에서 새로이 떠오른 신흥 귀족 집안으로 신비(宸妃)의 친정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난 후 한쪽에서 제 성적을 확인하던 지염이 슬쩍 지장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마치 한 수 가르쳐주듯,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둘째야, 그래도 같은 서원 사람들인데 너무 모두와 척 지진 마라.”

    그러자 지장이 그를 향해 차갑게 비웃었다.

    “제 집안 추문으로 다른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단 낫죠.”

    그 소리에 지염은 금방 분노한 얼굴이 되었다.

    “그 추문도 너희들이 일을 워낙 추하게 저질러 생긴 게 아니냐! 집안 형제끼리 가산을 두고 싸움이 났다는 소문이 퍼져 가문이 망신을 사면, 그게 누구 탓이겠느냐?”

    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습니다. 형제끼리 가산을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된 건, 삼남가인 저희 집안 탓이라고 합시다. 그럼 사촌 동생인 지온이를 두고 말도 안 되는 험담을 해댄 건 어떻게 해명하실 겁니까? 한 집안의 오라버니면서 어떻게 제 사촌 동생에게 그렇게까지 합니까. 형님은 친동생인 지서까지 엮일 수도 있는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넌 내가 굳이 말을 안 하면, 다들 진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서원엔 이미 옛날에 소문이 다 돌았다! 네…….”

    “네! 형님 집안에서 장남가의 혼사를 훔치려 했다는, 그 소문 말이죠. 그래서 형님이 온갖 더러운 추문을 지온이에게 덮어씌우신 거고요.”

    “너, 너…….”

    “아닙니까?”

    지장이 차갑게 웃었다.

    “형님, 거짓말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거짓말에 속게 되는 법입니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냐?”

    지염이 기세가 등등하여 소리쳤다.

    “유씨 가문에서 그 아이를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 아니냐! 규방의 규수가 얌전히 집에 있다 시집갈 생각을 해야지, 어디 조방궁을 찾아가 무당 노릇이나 하다니! 창피해서, 원!”

    “큰오라버니께선 저를 그리 생각하고 계셨군요.”

    돌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오자 흠칫 놀란 지염이 고개를 돌렸다.

    남색 도포를 입은 소년이 걸어오고 있어 자세히 보니, 천만뜻밖에도 지온이 아닌가!

    “어떻게 네가……!”

    놀란 지염은 순간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지온이 공수하며 그에게 예를 갖췄다.

    “큰오라버니, 오랜만에 봬요.”

    급히 지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린 지염이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 대체 이런 옷차림을 하고 서원에는 왜 온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이냐!”

    “오지 않았으면 오라버니의 고견을 제가 들을 수나 있었을까요?”

    지온이 그를 향해 슬쩍 눈을 흘기며 말에 가시를 박았다.

    “큰오라버니, 옛말에 집안의 추문은 담장을 넘기지 말라 했다죠? 그런데 오라버니께서 제 험담을 이리 담장 밖에서 하고 다니시면, 둘째 동생인 지서도 추문을 피해가긴 힘들 듯싶은데, 어쩌죠? 지서가 또 혼담을 몇 군데 날린 모양이던데, 이리 가다간 저희 집안에 시집을 가지 못하는 이가 하나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논리에서 밀리고 있던 지염은 이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고 싶지 않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네 험담을 했단 말이냐? 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이잖아!”

    “그럼 제가 드리는 말씀도 모~두 사실이 되겠죠, 뭐.”

    지온이 방긋 웃었다.

    “저는 어차피 상을 치러야 해서 혼담이야 좀 더 늦어져도 괜찮지만, 지서가 계속 이렇게 혼담을 날려 먹다간 저보다 명성이 더 나빠지겠는데요? 이를 어쩌죠?”

    지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가 부러 말을 보탰다.

    “우리 집 지언이도 앞으로 이년은 더 있어야 시집갈 나이라, 급할 거 없습니다, 형님.”

    입이 하나였던 지염은, 어차피 두 사람을 이기지도 못할 테니 얼굴만 터질 듯이 붉힌 채로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러고는 애꿎은 소매만 떨치며 휙 돌아가 버렸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온과 지장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대희는 눈이 휘둥그레져 지장과 지온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지, 지장, 이, 이게 대체…….”

    “쉿!”

    지장이 그의 소매를 휙 잡아끌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내 사촌동생인 지온이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말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대희가 몇 번이나 지온을 흘끔거리다 부끄러운 듯 인사했다.

    “지온 소저였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지장의 친우, 대희라 합니다.”

    지온이 웃으며 마주 예를 갖췄다.

    공몽을 놀리던 이들도 이미 대희에게 쫓겨난 지 오래라, 공몽도 다가와 인사했다.

    “지온 소저!”

    지온이 조용히 하라는 손짓과 함께 목소리를 낮춰 지장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일단 셋째인 지련인 척할까요?”

    지장이 그러자며, 대희와 공몽에게도 다시 한번 주의를 시켰다.

    “두 사람, 절대 말실수하면 안 돼!”

    공몽과 대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방 이름을 바꿔 불렀다.

    “지련 아우.”

    그제야 지장이 지온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어디부터 갈까?”

    “다들 천수서원의 문회가 그리 좋다고 하니, 먼저 문회부터 가서 들어봐요.”

    “그래.”

    * * *

    일행은 함께 걸어가며 서로 나뉘어 대화를 나눴다.

    마침 공몽과 함께 걷던 지온이 그의 학업 수준에 관해 묻자, 공몽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러나 공몽은 이번에 본 달 시험 성적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공몽의 성적에 대해 들으며 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공몽의 학업 수준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천수서원에 들어왔다는 것은 본래 가진 자질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몽은 기초도 튼튼했고, 여전히 오경(五經)도 막힘없이 잘 외우고 있었다.

    다만, 단순히 외우는 것만 잘해서는 거인이 될 수 없었다. 공몽의 약점은 바로 글의 첫 단락에서 한두 문장으로 제목의 뜻을 밝히는, 파제(破題)였다.

    파제를 정확하게 하지를 못 하니 늘 답이 한쪽으로 쏠리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갑점을 항상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온과 공몽이 그런 대화를 하는 동안 뒤에서는 대희가 지장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지장, 이 자식! 어쩐지 며칠 전부터 이상해 보이더니, 여동생을 데려오려고 했던 거였냐? 근데 왜 일찍 이야기 안 했냐? 말을 했으면 내가 정리라도 하고, 꾸미고 나왔을 거 아냐! 그럼 더 좋은 인상이라도 남겼을 텐데!”

    지장이 눈을 부라렸다.

    “환봉이나 상우처럼 할 생각하지 마라! 무슨 먹음직스러운 고기 보듯이 우리 지온이를 보고 침이나 흘릴 것 같으면, 연 끊자, 연 끊어!”

    “내가 미쳤냐!”

    대희가 얼른 소리쳤다.

    “내가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미 네 여동생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겠지!”

    가만히 생각하니, 지장도 대희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대희가 말을 이어 나갔다.

    “환봉이랑 상우 놈들이 안 그래도 요 며칠, 네 옆에서 빙글빙글 돌기에, 난 또 그놈들이 갑자기 새로운 취향에 눈이라도 뜬 건가 했다. 흐흐흐, 그런데 이게 이유였다 이거구먼. 그놈들은 어디로 갔냐?”

    “헛소리 작작 해라!”

    거칠게 손사래를 친 지장이 차갑게 말했다.

    “어젯밤에 잔뜩 취하도록 먹인 뒤에 묶어서 땔감 창고에 처박아 뒀지.”

    안 그러면 파리 마냥 귀찮게 따라다닐 게 아닌가?

    대희가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그렇게 재밌는 일을 날 안 부르고 혼자 했단 말이야? 큭, 그런데 지온 소저는 서원에 진짜 왜 오신 거냐? 설마 진짜 남편감 찾으러 오신 건 아니지?”

    “꺼져, 꺼져!”

    지장은 대꾸도 하기 싫었다.

    “연 끊자, 연 끊어!”

    * * *

    그렇게 네 사람은 문회가 열린 곳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춘 지온이 단상 위에 오른 강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흥미를 보이자 공몽이 작게 그녀에게 강사를 소개했다.

    “우리 서원에 얼마 전에 오신 선생이야. 성함은 여강(吕康)이시고, 선생께선…….”

    “……경원년 정묘과(丁卯科) 장원(壯元).”

    지온의 나지막한 음성에 공몽이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어?”

    지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여강은 대장장이 출신으로 스물이 넘어 글을 배웠으나 단번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천하에 이름을 알렸던 제자였다.

    “오래전에 이미 한림학사가 되었는데, 왜 천수서원에 선생으로 온 거지?”

    지온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공몽이 멀뚱멀뚱하니 대답했다.

    “그건 나도 잘…….”

    지온이 갑자기 물었다.

    “혹시 따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러자 공몽이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 선생께선 학식이 워낙 뛰어나셔서, 주변에 늘 가르침을 청하는 분들이 많아.”

    * * *

    서른다섯 살에 장원으로 급제한 여강은 곧장 청운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지온은 선제가 그를 무척 좋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제가 자주 그를 불러 일을 시켰기 때문에, 수많은 조서(詔書)들이 그의 손을 거쳐 내려졌었다.

    ‘그럼 새로운 황제가 황위에 올랐어도 그에겐 영향이 없었어야 맞아. 그런데 왜 갑자기 서원에 와서 선생을 하는 거지? 관직은?’

    대희가 끼어들었다.

    “상을 치르셨다는 같아.”

    지온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대희가 머리를 긁적였다.

    “여 선생님의 노모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관직에서 물러나셨다 들었다. 얼마 전에 도성으로 돌아오셨는데 산장(*山長: 서원 학자에 대한 경칭)께서 찾아가 교수 일을 겸직해 달라고 부탁하셨대.”

    “그랬군요.”

    단상 위에선 여강이 경서 강해를 마치고 있었다.

    “…오늘 문회는 과제가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앞에 있던 많은 원생은 당연히 글을 지어내라 하겠거니 생각하며, 이미 자신이 쓸 글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때 여강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말씀을 주제로 글을 써도 좋고, 시사를 내도 좋습니다. 그림도 상관없고 원하는 것은 뭐든 해보세요. 그리고 제출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말을 마친 여강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단상을 내려갔다.

    곧 원생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여 선생께서 제자를 받으시려고 한다던데, 설마 이게 시험인가?”

    “그럼 무조건 내야지! 근데 뭘 쓰지?”

    “이런 주제는 대부분 문장을 많이 쓰지.”

    “근데 문장을 쓸 사람이 많을 거란 말이야. 그럼 돋보일 수가 없다고!”

    조용히 생각을 거듭하던 지장도 입을 열었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해에 밝다…… 이건 군자와 소인이 서로 대립하는 구도잖아. 글이야 나도 쓴다지만 너무 평범하지 않을까?”

    공몽과 대희는 모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귀한 집 공자님이었던 대희는 처음부터 서원의 이름값에나 묻혀 갈 요량으로 서원에 온 터라 학업은 영 잘하질 못했고, 공몽은 워낙 단순하다 못해 그저 생각이 올곧기만 하여, 도저히 옆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게 문제였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지염과 그의 동창들은 열띤 의견을 나누는 듯했는데, 아무래도 복안이 있는 듯 웃으며 이들 옆을 지나쳐 갔다.

    지염 일행들은 지장 일행을 지나치며 잔뜩 무시하는 눈빛을 던지고 사라졌다.

    지온이 물었다.

    “큰오라버니의 성적이 좋은가요?”

    지장이 짜증난다는 듯 대답했다.

    “나보다 좀 나아. 난 겨우 갑점을 받는 등급에 끼어 있는 수준이라 종종 을점을 받기도 하는데, 큰형은 을점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거든. 선생께서도, 나보다는 형님이 향시에 붙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시고.”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염이 우리 네 사람을 무슨 벌레 보듯 쳐다봤구나.’

    대희가 호수에 있는 한적한 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더운데 저쪽에 가서 계속 이야기하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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