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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16)화 (116/385)
  • 116화. 천수서원

    제 동창들의 상태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채지 못한 지장은 지온과 대화를 시작했다.

    “집에 안 온 지 꽤 됐지? 어제도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더라.”

    지온이 빙긋 웃었다.

    “제가 보고 싶으시거들랑 조방궁으로 한 번 찾아오시라 전해주시지요. 시원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다른 동생들과 함께 며칠 묵어가실 수도 있고요.”

    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겠어. 그런데 내가 요즘 보니 어머니께서는 점포 살피는 일에 완전히 빠져 계셔서 아마 손을 놓지 못하실 거야.”

    그러더니 지장이 궁금한 얼굴로 지온에게 물었다.

    “여기 계신 선고께서 네가 점괘를 봐주실 거라던데, 그게 진짜냐?”

    “당연하지요.”

    지온이 대답했다.

    “제가 전주이니, 화신점 점괘는 제가 풀어드려야죠.”

    “그럼 정말 네가 능운진인의 진전을 이어받은 것이야?”

    지온이 웃음을 지었다.

    “진전을 이었다기에는 부족하고, 조금 아는 수준입니다.”

    그러고는 지온이 공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공자님께서 화신첨을 뽑으신 것이지요?”

    누군가 공몽을 쿡,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공몽이 새빨간 얼굴로 손을 뻗어 화신첨을 내밀었다.

    “제, 제가 뽑았습니다.”

    방긋 웃음을 지으며 화신첨을 받아든 지온이 슬쩍 손가락을 비비며 첨을 문질렀다.

    ‘역시 내가 바꿔둔 무게가 맞아. 보아하니 진짜 운이 피었나 보구나. 막으려야, 막을 수도 없겠어.’

    생각을 마친 지온이 공몽에게 물었다.

    “공 공자님 맞으시지요? 공자께서는 어떤 소원이 있으십니까?”

    공몽은 주뼛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환봉이 선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달리 소원이 있겠습니까? 당연히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지요.”

    지온이 웃으며 공몽에게 물었다.

    “그렇습니까, 공자님?”

    고개를 끄덕이던 공몽이 다시 부끄러운 얼굴로 도로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벌써 과거급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이릅니다. 소생의 학업은 평범한 수준이라 먼저 향시에 붙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소년들은 이제 겨우 열여섯이나 일곱 살 밖에 안 된 나이들이라 아직 회시까지 보기에는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들이 앞둔 것은 향시로, 붙으면 거인(擧人)이 되는 시험이었다.

    유신지처럼 열아홉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을 보는 이는 소수였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지온이 대답하자 함옥이 지필묵을 가져왔다.

    소년들은 지온이 붓에 먹을 먹이고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글자가 생동감이 넘쳤다.

    ‘문체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붓을 내려놓고 먹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린 지온은 종이를 곱게 접고는, 서아가 건넨 향낭 속에 조심스레 넣었다.

    “이것은 문창부(文昌符)입니다. 심령을 밝게 하고, 글의 구상과 영감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공몽이 손을 내밀어 향낭을 받았다. 지온은 이미 향낭에서 손을 거뒀으나, 지온이 만졌던 향낭에 손이 닿자 공몽의 얼굴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붉게 달아올랐다.

    환봉과 상우는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몽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향낭이잖아, 향낭!’

    많은 소설 속 가랑(佳郞)과 가인(佳人)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확인하는 증표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신물(信物)이 무엇이던가!

    옥패, 손수건, 그리고 향낭이 아니던가!

    ‘저 멍청이, 운수도 좋지!’

    지온이 또 지장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요즘은 집에서 지내시나요? 아니면 서원에서 지내세요?”

    지장이 대답했다.

    “향시가 코앞이라 요즘엔 숙식을 전부 서원에서 하고 있어. 5일에 한 번씩 집에 다녀온다.”

    “공 공자님께서도 그러신지요?”

    공몽이 황급히 대답했다.

    “저와 지장 형님은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며칠 후에 서원에 한 번 들려 기운을 바꿔주어야 할 곳이 있는지 살펴보러 가겠습니다.”

    “오시지요! 좋습니다!”

    소년들이 단체로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지장은 좀 더 고민하여 머리를 썼다.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렸다 오는 게 어떠냐? 우리 서원이 매달 달 시험이 끝나고 문회(文會)를 열거든. 우리 서원 원생들만 참가하는 게 아니라 서원 밖의 사람들도 문회를 들으러 온다. 그때 지온이 네가 나랑 같이 가면 사람들 눈에 안 띄고 괜찮을 것 같다.”

    지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라버니 정말 세심하세요. 그럼 더 좋지요.”

    그렇게 차를 마시며 서로 만날 날을 정한 후, 지온은 소년들을 사방전 밖까지 배웅했다.

    * * *

    소년들은 팔이 떨어져라, 한참을 손을 흔들고도 아쉬운 듯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뗐다.

    환봉이 득달같이 지장에게 물었다.

    “지장, 지온 소저와 혼약한 사람이 있어?”

    상우와 공몽, 두 사람 역시 귀가 쫑긋 섰다.

    지장이 환봉을 향해 흘긋 눈을 흘기고는 입을 열었다.

    “큰형님이 지온이가 혼약을 파기한 일을 가지고 서원에서 몇 번이나 떠들어 댔는데, 다들 잊었어?”

    “아, 그렇지?”

    소년들은 그제야 떠오른 듯했다.

    가문에서 벌어졌던 난리로 지장과 지염의 사이도 크게 벌어져, 두 사람 역시 서원 안에서도 몇 번이나 말다툼을 벌이지 않았던가.

    같은 반인 소년들은 지씨 가문에서 벌어졌던 일도 그렇고, 이런 자잘한 문제들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아, 기억났다. 지온 소저가 유씨 가문과 맺었던 혼약을 파기해 버린 거…….”

    “맞네, 맞아! 지염은 유씨 가문에서 지온 소저가 불학무식해서 싫어했다고 했는데…….”

    “지온 소저가 어디가 불학무식해? 점괘도 술술 내시고, 부적도 일필휘지로 쓰시는 거 봤지? 거기에 다도(茶道)에도 조예가 있으시더구먼! 재색을 겸비한 요조숙녀가 따로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동창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리 떠들어 대는지가 빤했던 지장은 통쾌했지만, 그들이 하는 말들에 어울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네까짓 놈들이 우리 지온이를……? 꿈들 깨시게!’

    * * *

    눈 깜짝하는 사이, 어느덧 문회 날이 밝았다.

    제 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한 지장이 지온을 데리러 찾아왔다.

    지온은 본 그가 깜짝 놀랐다.

    “지온아, 너 이게 대체…….”

    남색 도포에, 작은 관을 쓰고, 손엔 접선까지 들고 있는 지온의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서아까지 시녀가 아니라 시종처럼 분장한 상태였다.

    방긋 미소를 지은 지온이 지장 앞을 몇 번 왔다 갔다 움직이더니, 그에게 물었다.

    “어디 이상한 곳 없죠, 오라버니?”

    “어? 어! 어, 없다!”

    지장은 정신이 다 쏙 빠질 것 같았다.

    ‘분명 똑같은 그 얼굴인데……. 대체 눈썹 좀 굵어지고, 입술 색 좀 옅어졌다고 어떻게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을 수가 있지?’

    걷는 자세에서도 전혀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고, 다만 목소리만 비슷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원이니 오가는 이들이 전부 사내들뿐이잖아요. 여인의 복색을 하고 나타나면 너무 시선을 끌 것 같아서요, 오라버니.”

    지온의 설명에 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 말이 옳아. 우리 서원의 문회가 상당히 유명해서 외부에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오는데, 그중에 풍류 꽤나 즐긴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기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날 수도 있어. 괜히 여인의 복색으로 갔다가 뭇 사람들의 오해를 받는다면 큰일이다.”

    대갓집 규수가 그러한 장소에 나타나는 경우는 실로 드물어,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해명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사촌 남매는 정리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 서원으로 향했다.

    * * *

    서원은 조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이각(二刻)쯤 가자 서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지온의 눈앞에 거대한 호수가 들어왔다. 호숫가에는 거대한 돌이 세워져 있었는데, 돌에는 천수서원(天水書院)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수서원은 자주 이름난 명사(名士)들을 초청하여 강의도 하는, 도성에서 굉장히 유명한 서원이었다. 항간에는 그 유명한 원 재상까지 와서 강의했었다는데, 그 때문에 천수서원의 문회가 이토록 열기가 대단하단 소문이 있었다.

    지장과 지온은 별 탈 없이 움직였다.

    길에서 지온을 보고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긴 했지만, 그들 역시 몇 번 흘끔거리다 말았을 뿐, 누구도 지온을 여인이라 의심하진 않았다.

    패루(*牌樓: 길을 가로질러 세우던 아치형 장식용 건물)에 도착하자 그 앞에는 소년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옷차림과 나이대를 보아하니 다들 서원에서 수학하고 있는 원생들인 듯 보였다.

    “어? 점수가 붙었나 보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지장이 지온에게 말했다.

    “지온아, 시험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만 보고 올 테니,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어…….”

    지온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지장은 이미 바글바글한 소년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이마를 긁적이던 그녀의 눈에 마침 희희낙락 웃으며 빠져나오는 소년 일행이 걸려들었다.

    그녀가 물었다.

    “말씀 좀 묻겠소, 저기 뭐가 붙은 것이오?”

    그러자 그녀에게 질문을 받은 소년 중 하나가 이상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서원 사람이 아니오?”

    지온이 고개를 흔들자, 그가 설명해주었다.

    “달 시험의 점수가 붙은 것이오. 우리 서원은 매월 달 시험을 보는데, 시권을 퇴직한 한림께서 보시고 채점을 하고 있소. 그래서 달 시험에서 갑(甲)점을 받으면 실제 시험에서도 대부분 통과가 된다고 보는 거요.”

    “그런 거였소? 고맙소!”

    “뭘, 이런 거로…….”

    그러고는 그녀를 몇 번 더 흘끔거리던 소년은 제 친우들과 다시 떠났다. 서아는 소년들이, 저 형님 준수하게도 생겼다며 저들끼리 수군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점수를 확인한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이, 지온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또 을(乙)점이냐, 공이(孔二)?”

    “향시까지 이제 겨우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이번에 통과하지 못하면 3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노력 좀 해야겠다.”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이야. 시험은 타고난 재능에 따라서 붙고, 안 붙고 가 결정이 되는 건데……. 내가 볼 때 공이, 넌 삼 년 더 공부하는 게 좋겠다. 사실 3년 더 있다가 붙어도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다.”

    “야, 우리 천수서원 출신들이랑, 다른 늙다리 기재들이랑 비교가 되냐? 선생께서도 그러셨잖아, 시험도 젊고 힘 있을 때 보는 게 좋지, 나이 들어서 봐야 좋을 게 없다고.”

    “근데 시험에 붙지를 못하는 걸 어쩌냐? 올해 봤던 달 시험에선, 갑점은 한 번도 못 받았지?”

    “공이,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마. 그래 봤자 겨우 3년이다. 네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니 그 정도는 기다릴 만하지.”

    “그래, 그래! 괜히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할 필요 없어.”

    지온이 보니, 공몽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다른 동창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빙자한 조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너희들 그만두지 못해?”

    으르렁거리며 지장이 나타났다.

    “얘가 진짜 너희가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지 못 알아듣는 바보인 줄 알아? 다 꺼져, 이놈들아! 그렇게 할 일들이 없으면, 가서 글이나 한 자 더 읽으라고!”

    그러자 기분이 상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지금 누구한테 꺼지라 말라 하는 거냐, 지장?”

    “너보고 꺼지라는 거지, 누구겠냐?”

    또 다른 소년 하나가 앞으로 나섰는데, 소년들이 보니 지장의 가장 친한 친우 대희(戴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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