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15)화 (115/385)
  • 115화. 세 번째 화신첨

    “됐네.”

    대장공주가 상관없다는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큰일도 아니야. 재밌는 일이 조금 줄어드는 것뿐인 게지.”

    ‘확실히 큰일은 아니야. 그래도 강왕세자란 사람은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미소를 지은 지온이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앵두 씨를 빼기 시작했을 때, 돌연 대장공주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온아, 그런데 여덟째 일에 네가 관여한 게 있는 것이야? 아무래도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많은 것 같구나.”

    대장공주는 이제 지온을 온이라 부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씨를 발라낸 앵두를 작은 바구니에 옮겨 담은 지온이 고개를 들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예끼, 요 녀석…….”

    대장공주가 막 허리에 손을 올려보려던 찰나,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서아였다.

    “함옥선고께서 찾으세요! 누가 화신첨을 뽑았다고 하셨어요!”

    그 소리에 지온은 아연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전과 달리 사방전에 향객이 넘쳐나게 된 요즘, 지온은 원래의 화신첨을 조금 무거운 화신첨으로 바꿔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말 지금은 화신첨을 뽑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5월이 거의 다 가도록 아직 화신첨을 뽑은 이가 나오지 않고 있어, 그녀 역시 이번 달은 이대로 흐지부지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 화신첨을 뽑다니, 진짜 대운이 트였네.’

    대장공주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엔 어떤 사람이라 하던가? 무얼 빌러 온 게야?”

    서아가 대답했다.

    “서생으로, 과거 급제를 위해 왔다 합니다.”

    멈칫했던 대장공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엔 삼신할미에, 두 번째는 재신 노릇을 하더니 이번엔 문창제군(*文昌帝君: 과거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수신)까지 되어야 하는 것이냐? 재미있구나, 내 네가 어찌 해결하는지 지켜보마!”

    지온이 한껏 진지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신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궁금하시겠지만, 마마. 다음에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장공주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가보거라. 본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 * *

    지온이 난택산방에서 나오자 초조한지 서성거리는 함옥이 보였다.

    지온을 본 함옥은 마치 구세주라도 발견한 듯 금방 달려왔다.

    “대사저! 이를 어쩌면 좋아요? 과거라뇨?! 그걸 저희가 어떻게 해줘요!”

    “너무 걱정부터 하지 말고, 먼저 사람부터 만나보고 다시 이야기하죠.”

    빠르게 사방전으로 돌아온 그들을 본 청옥은 그제야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듯 한쪽을 가리켰다.

    “안에 계세요.”

    지온이 사방전 뒤에 있는 전(殿)으로 들어가자 뜻밖에도 소년 서생, 네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손님석의 두 사람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공 형.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나? 공자께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한 것은 언급하지도 않으셨는데, 지금이라도 그냥 가는 게 좋겠어.”

    “그러니까! 화신은 꽃들이나 호령하는 거지 과거시험이랑 뭔 상관이냐. 차라리 문창제군께 참배하러 가는 게 맞지.”

    “더구나 과거에 급제하고 못 하고는, 이 머리에 학식이 얼마나 들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니까?”

    “거야, 당연하지! 문장이 별론데 신한테 빈다고 그게 소용이 있겠어?”

    언뜻 듣기엔 권면하는 말처럼 들려도, 그들의 말투에서는 조롱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른 두 사람은 주인석에 앉아 있었다.

    순박하고 착한 얼굴의 한 소년은 안 그래도 어색한 상황에 손님석에 앉은 두 사람이 이리 채근하자 더욱 불안해하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접선만 부서질 듯이 붙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온이 그 광경을 보고 생각에 잠겨있을 때 함옥이 나서서 말했다. 

    “선인들, 전주께서 오셨습니다.”

    네 명의 소년들의 시선이 날아왔다.

    나이든 늙은 선고가 나타날 줄 알았던 손님석의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지온을 보고는 정신을 놓고 지온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렇게 잠시 조용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정신을 차린 문가 쪽 소년이 놀라 물었다.

    “저, 저분이 여기 전주란 말입니까?”

    청옥의 확인을 받은 소년들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이 ‘괴력난신’ 같은 것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아리따운 소녀가 나타나자 손님석의 두 사람은 지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부랴부랴 제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주인석에 앉아 있던 하나가 냅다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지온아!”

    “응?”

    순박하고 착해보이는 소년과 함께 앉아 있던 이는, 바로 지씨 가문의 둘째 공자인 지장(池璋)이었다.

    서원의 방학을 맞아 동창과 함께 나들이를 나왔던 그는, 조방궁의 비림(碑林)을 본 김에 사방전에도 들려 화신점도 보았던 것이었다.

    요즘 화신점이 워낙 유명하니 조방궁에 들렸다 그냥 가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지장도 사방전의 전주가 지온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그는 과거시험을 앞두고 힘겹게 학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매일 서원에 등원하고, 가끔 동창들과 함께 나가 술을 한 잔 마치고 시회나 글모임을 하거나 격구를 치는 일이 전부인 삶…….

    오가며 만나는 이들 전부가 문인들뿐이라 화신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원 재상이 사방전에 전한 부(賦)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래서 지장은 사방전의 전주에 대해 알고 있었고, 지온이 조방궁에 살고 있단 것도 알고 있었지만, 지온이 사방전의 전주란 것은 알지 못했었다.

    심지어 그는 동창의 화신첨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선고에게 물어 제 사촌 동생을 찾아 안부를 물을 생각까지 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묻기도 전에 지온이 먼저 나타난 것이다.

    “둘째 오라버니.”

    지온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라버니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자 손님석의 두 소년이 놀라 서로 눈을 마주쳤다.

    소년 하나는 조용히 제 입가의 축축한 침을 닦고, 다른 한 명은 옷소매에 묻은 해바라기 껍질을 털어내며 암암리에 미소를 지었다.

    “지장, 어떤 분이신지…….”

    다른 입들에서 동시에 말들이 튀어나왔다.

    지장이 어쩔 수 없이 지온을 소개했다.

    “내 사촌 여동생이네.”

    그리고 다시 지온을 보며 말했다.

    “여긴 내 동창들. 환봉(桓峰), 상우(常禹), 공몽(孔蒙).”

    환봉과 상우가 손님석에 앉아 부창부수로 사람 속을 긁던 두 사람이었고, 공몽이 바로 화신첨을 뽑은 순박하고 착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지온이 웃으며 예를 갖추자, 소년들은 감격하여 서로 앞다투어 경쟁하듯이 마주 예를 갖췄다.

    “지 소저이셨습니까! 백문(百聞)하였으나, 참으로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지 소저께서 품행이 그리 방정하고 고아하단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뵈니 들었던 것이 참으로 부족합니다.”

    “맞습니다, 지장이 늘 제 집에 꽃처럼 화사하고, 옥처럼 빛나는 여동생이 있다더니…….”

    그러자 순박하게 착하게 생긴 소년, 공몽이 중얼거렸다.

    “지장 형님이 말한 소저는 셋째 소저잖아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환봉과 상우가 공몽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공몽, 이 새끼가……! 평소에 눈치 없는 건 넘어가도, 지금 초치면 안 되지!’

    하지만, 공몽은 진짜 눈치코치 없는 바보인지라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지장을 향해 확인까지 하였다.

    “지장 형님,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바보가 아닌 지장은, 지온만 바라보는 환봉과 상우를 바라보며 내심 낄낄 웃음을 흘렸지만, 겉으로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말이 맞아! 지온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여태 말한 사람은 내 셋째 동생이다.”

    “역시 제가 잘못 기억했을 리가 없습니다!”

    공몽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제 기억력은 여전히 좋거든요!”

    환봉과 상우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누가 네 기억력 좋은 거 궁금하대?’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염 형님이 큰집에 사촌 동생이 돌아오고부터 아주 바람 잘 날이 없다고 떠들면, 두 사람도 옆에서 같이 맞장구쳤었지요!”

    “…….”

    공몽이 제 말이 맞지 않느냐며 또 물었다.

    “지장 형님, 그래서 형님이 그때 그들이랑 싸울 뻔했었습니다. 그렇죠?”

    환봉과 상우는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지장은 여전히 엄숙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아니겠어? 내 사촌 형님이야 본래 지온이에게 편견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너희 두 사람은 내 동생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형님 편에 서서, 내 동생이 제 분수를 모르고 설친다느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느니, 불학무식하여 시집도 못갈 거라느니…….”

    “지장! 지장 형님!”

    더 말이 이어졌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았던 환봉이 얼른 말을 끊었다.

    상우는 더욱 간절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그냥 말만 그리했을 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

    “맞아, 맞아. 그래도 동창인데 지염이 그리 말을 하는데 우리도 옆에서 맞장구라도 쳐줘야 해서 그랬던 거지.”

    “아, 그랬던 것이냐?”

    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너희를 오해했던 것이로구나.”

    두 소년이 부들거리며 짓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고 있으니, 공몽보다 더 멍청해 보였다.

    지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아직 자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자기들끼리 극 한 편을 찍은 것이다.

    ‘제 속내를 감추지 못하는 소년들은, 정말이지 너무도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즐거워하는 그녀는, 사실 자신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의 소녀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에게 일어났던 그 참혹한 일이 없었다면, 올해 그녀는 열여덟 살로 저 소년들보다 두 살 정도 더 많았을 것이다.

    소년들이 또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자 지장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지온아, 네가 이곳의 전주인 것이냐?”

    지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스승님께서 능운진인이신 것은 오라버니께서도 아시잖아요.”

    그녀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모두 자리에 앉으시지요. 사매, 차를 가져다주세요.”

    “네.”

    함옥이 대답했다.

    그 말에 소년들은 한편으로는 민망하면서도 뛸 뜻이 기뻤다. 소년들은 저마다 앉아 있는 자세에 유난히 신경을 쓰면서도, 시선을 저도 모르게 지온에게로 돌렸다.

    여유로운 몸짓으로 자리에 앉은 지온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돌 것만 같은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는 입술을 축이려는 듯,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 모습에 한 소년이 헉하고 숨을 들이쉬며 제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평소 마르고 닮도록 외워대며 공부했던 수많은 시와 수필들이 있었건만, 지금 지 소저의 모습을 형언할 수 있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 소년들은 그저 넋을 놓고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소년들은 눈으로 들어오는 모든 장면, 장면들이 그린 것처럼 아름답다 느꼈다.

    마침 가장 혈기가 왕성한 나이대의 소년들이 아니던가!

    이들의 이성에 대한 갈망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하필 그 혈기를 채울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집안이 풍족하다 해도 통방(*通房: 하녀이자 첩을 겸하는 여자)을 들여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소년들은 평소 여인을 마주하면,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워하긴 했었다. 그러며 소년들은 저마다 제가 듣거나, 보았던 것 중 가장 좋았던 것만을 추려, 가슴에 품은 이상형에게 이입했었다.

    그러나 꿈에나 나올 법한 가슴 속 이상형은, 대부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소년들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 희망하던 것들을 내려놓게 될 테고,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터였다.

    그런데 돌연 나타난 지온이 소년들의 가슴 속에 있던 이상적인 규수의 모든 조건을 만족하고 만 것이다.

    외모를 말하자면, 지 소저는 이미 보기 드문 미인인 데다, 아름답지만 나약하거나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서책 속 모든 시구를 들어 지 소저의 아름다움을 형용해도 과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자태는 또 어떠한가? 그저 차를 음미하는 단순한 몸짓도 아름답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여기에 지 소저가 시문까지 알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터였다.

    소년들이 이러한 생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지온은 이미 차 맛을 본 참이었다.

    지온이 찻잔을 다시 탁자에 올려놓자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지장을 제외한 다른 소년들은 마치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하나같이 얼굴부터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들을 들지 못했다.

    지온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무애해각에서도 이랬었지.’

    이상할 정도로 자신은 학업에 정진하고 있는 소년 서생들에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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