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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14)화 (114/385)
  • 114화. 너 스스로 선택하거라!

    방문이 닫히자마자 강왕세자가 곧 입을 열었다.

    “잘못하셨습니다, 폐하.”

    멈칫한 황제가 물었다.

    “형님,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짐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입니까?”

    “여덟째를 살리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강왕세자가 말했다.

    “제가 하루를 늦은 것이 너무 아쉽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제 녀석의 그것을 잘라내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라내지 않았다면 여덟째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말에도 강왕세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살아남지 못했다면 그것이 녀석의 명인 것이지요!”

    “형님……!”

    충격을 받은 듯 황제가 저를 바라보자 강왕세자가 조금이나마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그가 황제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폐하. 여덟째의 목숨과 황가의 위엄 중 어느 것이 더 중하겠습니까?”

    황제는 침묵했다.

    강왕세자가 말을 이었다.

    “폐하의 혈육인 친아우가 민가의 소녀를 희롱하다 그 부위를 다쳐 부족한 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내시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선조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부모와 친척들에게도 버림받아 가문의 장지에 들어갈 자격조차 박탈당한 이들이란 말입니다! 여덟째가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는데, 저희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냔 말입니까!”

    흥분을 가라앉히듯 숨을 내쉰 뒤, 강왕세자의 말투가 다소나마 누그러졌다.

    “혈육인데 저라고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만…… 폐하도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와 같은 일을 당하셨다면, 폐하께선 자르셨겠습니까?”

    요의의 모습을 떠올린 황제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며 머리털이 쭈뼛 섰다.

    “폐하께서도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리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리 목숨이 끊어졌더라면 폐하께서 왕작에 추서했을 테고, 그랬더라면 가는 뒷모습이나마 당당했을 것입니다.”

    황제는 설득당하고 말았다.

    ‘그래, 내시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황족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집안의 사내였더라도 그리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왕세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폐하께서는 여덟째의 목숨을 살리셨지요. 형이 되어 다시 아우의 목숨을 취하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니 그 아이를 왕부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필 사람과 함께 황실의 한갓진 장원으로 보내어 여생을 걱정 없이 살게 하는 것이지요.”

    강왕세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저희는 여덟째의 상처가 깊어 치료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공표해야 할 것입니다.”

    강왕세자의 말에 황제가 소스라쳤다.

    “허, 그러나…… 그리하면 요의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게 됩니다!”

    “아니지요, 그래야 여덟째의 이름을 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강왕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훗날 여덟째가 세상을 떠나면 그때 조용히 능묘로 넣어주면 됩니다. 이리 하지 않으면 폐하께서 그 아이를 황릉에 묻어 장사하는 것을 종정 어른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이리 하십시오.”

    말을 이어 나가는 강왕세자의 얼굴에 피로가 비쳤다.

    “그만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꼬박 하루를 나와 계셨습니다. 대신들도 모두 알고 있겠지요? 괜히 폐하가 강왕부에 마음을 쏟느라 정무에 소홀하다고 대신들이 여기게끔 하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고단한 얼굴로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도 이제 막 도성에 들어왔을 텐데 이런 일을 겪게 됐습니다. 먼저 돌아가 쉬세요.”

    강왕세자가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린 그가 감개가 무량한 듯 입을 열었다.

    “여섯째 아우께서 점점 위엄이 늘어, 제왕의 모습이 되어 가십니다. 부왕(父王)께서 보셨으면 분명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강왕세자의 말에 황제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나가시지요.”

    강왕세자가 방문을 열며 말했고, 황제는 그가 방을 나서고서야 조용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 * *

    두 사람이 강왕부를 나서자 황제의 탈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호 공공이 몸을 깊이 숙이며 나타났다.

    “폐하, 오르시지요.”

    황제가 어가에 오르고 휘장이 내려지자 어가는 천천히 황성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강왕부를 바라보는 황제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는 가만히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조금 전 강왕세자의 모습은 황제로 하여금 삼 년 전을 떠올리게끔 했다.

    * * *

    갑작스레 무애해각을 공격한 해구 때문에 그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곧장 뛰쳐나가려 했지만, 시위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자신을 잡았던 시위대장이 말했다.

    “군왕 전하,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왕야(王爺)의 명이십니다!”

    그는 잠시 굳어 있었지만, 곧 기뻐 소리쳤다.

    “부왕께서 오셨는가! 어디 계시지?”

    그러나 시위대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시위대장이 자신을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도 아니었고, 밖은 그토록 혼란하기만 한데 이곳으로는 그 어떤 해구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그의 귀에 한 여인의 비명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가씨가, 아가씨가 바다에 빠지셨어요!”

    당장 방을 뛰쳐나간 그는 소리를 지른 이를 찾기 시작했다.

    “종화!”

    그는 찾고 또 찾았다.

    전쟁의 칼날이 멈추고 해구마저 퇴각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른 땅에 오르길 거부하며 배를 타고 오직 옥종화만을 찾아다녔던 그때의 그는, 미친놈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미친놈을 찾아온 그의 큰 형님은 철썩, 그의 따귀를 때렸다.

    “형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손찌검이 될 것이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는 큰 형님이 말했다.

    “네가 지금 위치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곧 만승지존(*萬乘之尊: 천자를 높여 이르는 말로 황제가 된다는 말)이 될 네가 여인 하나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하고 있느냔 말이다! 당장 정리하고 도성으로 가거라!”

    그러나 이미 모든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알아차렸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도성엔 안 갑니다. 가려거든 형님이나 가세요. 형님이 장자니, 나보다 형님이 더 자격이 되시겠지요!”

    “내가 가고 싶지 않아 이러고 있는 것 같으냐.”

    큰 형은 이를 갈았다.

    “할 수만 있었다면 갔어도 이미 오래전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 말처럼 장자이기 때문에 내가 강왕부에 남아야 하는 것이다. 부왕께서 널 십수 년이나 궁에 보내놓으셨던 이유가 바로 오늘을 기다리셨음을 어찌 모르는 것이냐!”

    “모릅니다!”

    그의 얼굴이 눈물로 덮였다.

    “다 필요 없어요, 전 종화만 있으면 된다고요!”

    그러자 큰 형님이 돌연 배 끝으로 그를 끌고 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알겠다. 그럼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여기서 뛰어내려 그 여아와 함께하든지, 아니면 당장 정리하고 도성으로 들어가든지, 너 스스로 선택하거라!”

    * * *

    요의가 다친 지 3일째 되던 날, 강왕부에서는 팔공자가 결국 치료가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자 이틀간 온갖 말들로 곰삭게 익어가던 추잡한 소문들도 뚝 끊겼다.

    ‘죽음’은 많은 것들을 미화시키지 않던가.

    요의가 그토록 백정 같은 일들을 저질렀지만, 그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말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잖은가! 그래 봤자 민가의 소녀인데, 그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이미 명을 재촉했으니 더 어쩌겠는가?”

    “부모가 제 자식을 가슴에 묻었으니, 그것참 안타깝게 됐구먼…….”

    * * *

    지온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난택산방에서 매고고를 도와 과포(*果脯: 설탕이나 꿀에 절인 과일)를 만들던 때였다.

    5월.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씻긴 제철 맞은 앵두가 당(堂) 중에 펼쳐져 있었다.

    매고고는 지온을 데려와 젓가락으로 한 알 한 알 씨를 뺐다.

    대장공주가 씨를 제거한 앵두 하나를 주워 입으로 쏙 가져가며 말했다.

    “네 예상과 다르구나! 그 녀석이 죽어버렸다.”

    말하는 것만 들어서는 전혀 제 조카 이야기 같지 않았다.

    지온이 정국공부에서 요의를 골려준 이후로, 대장공주는 그녀 앞에서 더는 강왕부에 대한 악감정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앵두를 든 지온이 다른 손에 든 젓가락으로 앵두를 찌르며 대답했다.

    “사실 그곳이 다친다 해도 목숨까지 위태롭지는 않을 텐데, 보아하니 중간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러고는 앵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앵두로부터 흘러나온 자색의 붉은 즙이 어찌나 단지, 목이 칼칼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매고고가 두 사람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한 분은 그저 드시기만 하시고, 다른 하나는 씨를 빼는 족족 입으로 넣으시니, 이러다간 남는 앵두가 있을까 싶습니다!”

    대장공주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겨우 앵두 가지고 뭘 그러나. 오랜만에 재밌는데, 정 없으면 몇 광주리 더 보내라 하면 되는 게지.”

    “마마, 제가 앵두가 아까워 이러는 것이겠습니까? 저 혼자 일을 해서 속상합니다!”

    “알았네, 알았어. 같이 함세, 같이 해. 그러니 화내지 말게.”

    매고고를 달랜 대장공주가 진짜 젓가락을 들더니 앵두 씨를 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지온은 재미있기도 했지만, 기쁨을 더 크게 느꼈다.

    처음 난택산방에 방문했을 때 대장공주에게서는 죽음의 기운만이 느껴졌었다. 공주는 생기라곤 전혀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젠 조금이나마 과거의 모습을 회복한 것 같지 않은가.

    ‘하늘에 계실 태자께서 소자다면 분명 기뻐하시겠지?’

    “그런데 뭔가 문제가 생겼다니,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인가?”

    대장공주는 여전히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지온이 입을 열었다.

    “이를테면 누군가 그를 치료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상처를 입은 곳이 그 부위니까요. 평범한 사람이라도 창피하고 수치스러워할 만한 곳이니 말입니다.”

    대장공주가 앵두를 주위 들며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아닐 게야. 강왕비에게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이었어. 그리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거야.”

    대장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침 궁인이 서신을 가져왔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대장공주가 서신을 받아 펼치며 중얼거렸다.

    “뜬금없이 무슨…….”

    그리고 그녀의 뒷말은 서신의 내용을 확인함과 동시 그녀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본 지온이 물었다.

    “마마, 왜 그러십니까?”

    잠시 후, 숨을 몰아쉰 대장공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신을 화로 속에 집어넣었다. 서신을 모조리 태우고 나서야 그녀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악랄한 이리 새끼가 돌아왔구나.”

    지온이 깜짝 놀랐다.

    탁자를 붙잡은 대장공주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요의 그 녀석이 어찌 그리 쉽게 죽었는지, 이상했지. 그 아이가 돌아왔던 것이었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매고고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저, 마마 혹시……. 강왕세자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가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마차 한 대가 조용히 강왕부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고 하네. 안에선 병자가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고, 마차는 밤새 장원으로 갔다는구먼.”

    지온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안엔 요의가 있었겠네요.”

    대장공주가 그렇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간단하지 않은가? 그 녀석이 나타나 손을 쓰자마자 이리 전세를 바꿔버렸어.”

    지온은 강왕세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과거 무애해각에 있을 때 의안왕은 자신의 집안에 관해 거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강왕이든, 강왕세자든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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