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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13)화 (113/385)

113화. 부족한 몸이 된 여덟째

내실 밖으로 나온 원사가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폐하, 팔공자님의 열도 내리고 환부에서도 더는 피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제 목숨은 위험하지 않다고 여겨지옵니다.”

황제가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네.”

혼절했다 깨어난 강왕비는 원사의 보고에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저 조용히 그녀를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여덟째의 목숨을 붙들어 두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앞으로…….”

“앞으로가 있겠습니까?”

강왕비가 흐느꼈다.

“저리 불완전한 몸을 가지게 되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뭐라 비웃겠습니까. 도성으로 돌아와 혼처도 알아보려 했었는데 이제 어떤 집안의 규수가 시집을 오려 하겠습니까!”

명망 높은 대갓집 규수는 당연히 이런 신랑감을 원치 않을 터였다. 고관대작의 규수들은 모두 체면이 너무도 중한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반드시 고관대작의 규수와 혼인을 할 필요는 없지요. 평범한 가문의 금지옥엽이 오히려 더 따뜻하고 물정에 밝을 것입니다. 그러니 숙모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짐이 반드시 여덟째를 위해 좋은 여인을 붙여주어 남은 반평생을 챙길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안됩니다!”

강왕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덟째에게 어찌 한미한 집안의 여식을 붙여준단 말입니까! 우리 여덟째는 황족입니다! 천자(天子)의 친아우라고요! 그런 아이에게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집안의 여식을 붙여주면 다른 이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황제이신 폐하께서 혼례를 주선하시면 될 게 아닙니까!”

황제는 내심 혼인할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다.

‘그런데 짐더러 고관대작의 여식과의 혼례를 주선하라니……. 그럼 그들이 짐을 원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고도 내가 어찌 신하들의 충심을 바라겠는가!’

그러나 생각은 그럴지라도 말로는 계속 강왕비를 다독였다.

“고관대작의 규수들은 성격들이 다들 교만하고 횡포하여 좋은 이들이 없습니다. 신분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천하에서 제일로 존귀한 황실의 일원들이 아닙니까? 고관대작이든 작은 가문이든 모두 짐의 신하들이고, 그들이 가진 작위와 부귀 모두 황실에서 내린 것들이지요. 그러니 짐이 높여주면, 아무리 작은 가문이라도 그들의 위치가 높아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황제가 한참을 다독거리고서야 흥분을 가라앉힌 강왕비는, 황제를 붙들고 연신 눈물을 쏟았다.

“그럼 우리 여덟째가 부끄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좋은 이로 찾아 주셔야 합니다, 꼭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숙모님. 제 아우인데 제가 부끄럽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강왕비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굴에 떠올렸던 표정을 싹 바꾸었다.

“여덟째를 해친 놈들을 절대 가만둬선 아니 되십니다! 놈들은 반드시 잡아 능지처참에 처해주세요!”

“짐이 이미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범인들을 잡으면 반드시 목숨을 취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갔던 시위들도 있습니다. 그놈들은 대체 우리 여덟째를 어찌 보필한 것입니까! 천자의 눈 끝이 닿는 도성에서 겨우 몇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는데 이리 다치다니요!”

이번엔 황제가 어물쩍 넘어가려 대답했다.

“짐이 이미 모두에게 중한 벌을 내렸습니다. 그들을 믿고 이리 엄중한 임무를 맡겼더니, 도리어 짐의 믿음을 산산이 깨뜨리지 않았습니까.”

황 공공은 완의국(*浣衣局: 옷 세탁을 관장하는 관청 명)으로 쫓겨났고 시위들은 볼기에 곤장을 맞고 다들 힘든 주둔지로 내쫓긴 뒤였다.

그러나 황제가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착각한 강왕비는 그제야 조금 만족한 얼굴로 마지막 인물을 꺼냈다.

“그리고 엄 태의도 있습니다. 끊어졌던 손가락도 붙였다던 자가 우리 여덟째를 이리 치료하다니요! 그곳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뿐 아니라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폐하, 그자도 반드시 중히 벌하셔야 합니다!”

이번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기에 황제는 인내심을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숙모님, 그가 의술이 미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니, 어찌 그를 원망할 수 없단 말입니까!”

대번에 강왕비의 목소리에 날카롭게 날이 섰다.

“의술이 미진한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이지요! 그는 태의입니다!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이를 왜 남겨둬야 한단 말입니까!”

안 그래도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 황제였다. 거기에 이리 오래 인내하며 다독거리기까지 했으니 그도 점점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엄 태의가 이미 다시 이어 붙이면 도리어 썩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 이야기를 했는데 숙모께서 굳이 다시 이어놓으라 하셨지요? 그 상황에 그가 어찌 할 수 있었겠는지, 숙모께서 생각을 해보시지요!”

“그건 그놈이 치료하지 못할 것 같으니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 말입니다!”

강왕비가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자 황제가 담담히 대꾸했다.

“어제 상처를 봉합한 엄 태의가 곧장 짐에게 찾아와 무릎부터 꿇고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더구나 처음부터 접합이 어렵다고 진단한 내용이 진료 기록지에도 정확히 적혀있으니, 이는 사후에 책임을 피하고자 한 말이 아닙니다.”

“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습니까! 태의를 감싸기 위해 어찌 내게 이러실 수 있어요!”

결국, 황제가 왈칵 역정을 냈다.

“아무리 짐이 황제일지라도 함부로 목숨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진한 것도 아닌 태의를 짐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면 앞으로 누가 짐 밑에서 안심하고 일한단 말입니까? 이번 일은 이대로 마무리할 것이니, 숙모님께선 앞으로 요의나 잘 보살피도록 하세요!”

“아, 아니 어찌…….”

혼미한 와중에 황제와 강왕비의 다툼 소리를 들은 요의가 천천히 눈꺼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의를 보살피던 내시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금방 소리를 질렀다.

“팔공자께서 깨십니다! 깨어나고 계십니다!”

그 말에 황제와 강왕비 모두 다툼을 멈추고 그를 살피기 위해 금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요의야, 요의야 괜찮은 것이냐?”

아들을 보며 강왕비가 울음을 터트렸다.

“태의! 어서 와서 살피게!”

황제가 소리치자 후다닥 달려 들어온 원사가 맥을 짚고는 입을 열었다.

“폐하, 왕비마마, 팔공자께서는 이제 괜찮으실 것입니다. 당분간 잘 요양하시면 곧 회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큰 돌이 치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생했네.”

길게 허리를 굽혀 읍한 원사가 물러났다.

원사는 이번 사건도 무탈하게 넘겼다고 생각하며 조금 전 황제와 강왕비의 대화를 들으며 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앞으로 강왕부에는 최대한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 * *

요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마비산의 기운이 사라지고 통증이 느껴지자 그가 의아한 얼굴로 더듬더듬, 제 아랫도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파……. 왜 이렇게 아프지?”

그 소리에 강왕비가 다시 눈물을 훔치며 중얼댔다.

“요의야……. 가여운 내 아들…….”

자신이 어찌 아픈 까닭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요의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때, 요의의 머릿속에 의식이 끊기기 전의 기억이 스치며 모든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돌연 눈을 부릅뜬 그의 눈꺼풀이 사정없이 떨렸다. 가슴에 차오르는 공포가 아악, 하는 고함과 함께 밖으로 터져 나왔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가 제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요의야!”

강왕비의 울음이 터졌지만, 요의는 귀에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이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내시 싫어! 내시 안 할 거야!”

“요의야, 움직이면 안 된다! 그러다 다친단 말이다!”

강왕비가 그를 붙들려고 했지만, 이미 정신 줄을 놓아버린 요의는 그녀를 힘껏 밀어버렸다.

그 모습에 황제가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내렸다.

“팔공자를 붙들어 묶어라!”

* * *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겨우 상황을 정리한 황제가 강왕비를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황제가 위로의 말을 건네려던 찰나, 화려한 복색의 사내가 세자비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황제의 눈에 보였다.

“폐하, 왕비마마, 강왕세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는 강왕세자였다.

강왕비와 세자비가 도성으로 먼저 돌아왔고, 강왕세자는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아 다소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한 달 늦게 도성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비참한 슬픔에 휩싸여 있던 강왕비는 제 큰아들을 보고는 당장 달려들어 그에게 제 속상한 마음을 쏟아냈다.

“드디어 왔구나, 담(談)아! 네 아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것이냐?”

서른쯤 된 듯한 강왕세자는 황제와 비슷한 외모를 가졌지만 좀 더 엄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먼저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일어나라는 말을 하자 강왕세자는 곧장 일어나 강왕비를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사정은 저도 이미 들었습니다. 여덟째에게 이런 험한 일이 벌어지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르게 수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왕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역시 장자가 어미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생각했다.

‘우리 큰아들이 여덟째의 원한을 제대로 풀어주겠지!’

강왕세자의 말이 이어졌다.

“부족한 몸이 된 여덟째를 이대로 계속 왕부에 남겨두는 것이 옳지 않으니 최대한 빨리 왕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경악한 강왕비가 제 큰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한 게냐?”

그러나 강왕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소자, 여덟째를 지금 바로 봉지로 보내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여덟째가 왕부에 남아봐야 좋을 게 없습니다.”

강왕세자의 대답에 한참 넋을 놓았던 강왕비는 어렵사리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제가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불신 가득한 표정이었다.

“지금 네 친혈육인 아우를 멸시하는 것이야?”

“멸시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왕세자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덟째에게 이미 일은 벌어졌습니다. 소자가 도성에 들어오며 확인하니 도성에 이미 소문이 퍼져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찧어대는 소문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어머니께선 듣지 못하셨겠지요.”

강왕세자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고 평온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가문은 황가입니다. 황가에 부족한 몸이 된 아이를 남겨둔다면, 어찌 황가란 위엄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요의는 저희 강왕부의 체면을 상하게 할 것은 물론이요, 더 나아가 황족의 위엄마저 상하게 할 것입니다.”

“어찌 네가, 네가…….”

본래도 말재간이 부족했던 강왕비는 큰아들의 당당한 태도에 더욱 말문이 막혔다.

몸을 돌린 강왕세자가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도성에 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저희 모두가 여덟째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강왕세자의 말을 들은 황제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큰형님은 큰형님이시로구나. 오시자마자 이리 단번에 상황을 일사천리로 해결하시다니. 큰형님만 계신다면 강왕부도 안심할 수 있겠어.’

“담아, 네가 어찌…….”

여전히 할 말이 있는 듯한 강왕비였지만, 강왕세자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세자비를 나무랐다.

“당신은 며느리가 되어 대체 뭘 하는 것이오? 어머니께서 하루 꼬박 쉬지도 못하셨으니 어서 쉴 수 있게 모시고 가시오.”

그러자 세자비가 얼른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러고는 강왕비를 부축하듯 붙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제 세자 전하도 왔으니 걱정 놓으시지요. 제가 쉬실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가고 싶지 않았던 강왕비는 연신 제 아들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세자비의 손에 떠밀리고 말았다.

멀어지는 모친과 아내를 눈으로 배웅한 강왕세자가 한쪽에 자리한 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폐하, 잠시 안으로 드시겠는지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형님이 오시니 이리 마음이 편한 것을! 앞으로는 강왕부가 여덟째, 그 멍청이처럼 짐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내 힘이 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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