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다 죽은 목숨이로구나!
한편, 때가 무르익었다 판단한 루안은 점소이를 불러 방을 잡아 들어갔다.
“밖이 너무 번잡하군. 이곳에 상을 다시 봐주고 아까 노래를 불렀던 그들을 불러 주시게.”
“예, 나리.”
점소이가 대답을 하고 떠났다.
이곳 주루의 방들은 들어가면 문 앞이 병풍으로 가려진 구조로 무척 운치가 있었다. 루안은 병풍을 안으로 움직여 주안상을 가리듯 가까이 가져다 놓았다.
병풍을 돌아 자리에 앉은 루안이 입을 열었다.
“바로 옆방에 있는 놈이 과연 참을 수 있을까 모르겠군.”
지온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그를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을 계획한 거예요?”
루안은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점소이가 요리들을 가지고 올라오며 조손 두 사람도 함께 데려왔다.
할아버지와 손녀 두 사람은 병풍을 사이에 두고 예를 갖췄다.
어떤 곡을 듣고 싶은지 물어오자 루안이 대충 송별곡 중 하나를 택했다.
소녀의 목소리는 훌륭했다.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들이 다채롭게 선율을 타고 흘러 다녔다. 마치 깃털이 귓가를 간질이는 듯 마음을 간지럽게 만드는 노래였다.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갑자기 반대편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쿵쿵거리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요의가 문을 발로 뻥 차고 안으로 들어왔다.
“너희 두 사람! 지금 옆방으로 와서 노래하거라!”
그의 음성이 들려오자 루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걸려들었군.’
이호를 켜고 있던 소녀의 할아버지가 연신 사죄했다.
“손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여기서 노래를 다 부르면 바로 가겠습니다.”
요의가 어디 그런 인내를 발휘할 줄 아는 인간이던가? 그가 금엽자(*金葉子:금으로 된 고대 화폐, 금으로 된 종이 같이 생김) 몇 장을 꺼내 던졌다.
“하루 전세내면 되는 거 아냐? 그럼 되는 거지?”
마음이 크게 흔들린 소녀의 할아버지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럼 지금 부르는 곡만 마저 부르고 가겠습니다.”
요의는 그조차 못마땅했다.
“오라면 올 것이지!”
“손님…….”
그때 목소리를 깐 루안이 기분이 상한 듯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공자. 지금 뭐하는 것이오? 공자는 선착순의 도리도 모르시오?”
요의는 위세를 부리고, 갑질을 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강왕의 봉지에서 그가 사람을 내달라는데 감히 안 된다고 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래에 있는 황 공공을 떠올리며 그나마 제 성격을 죽인 요의가 다시 금엽자 몇 장을 더 꺼내 던지며 말했다.
“이 정도면 보상으로 충분하겠지?”
병풍을 넘어 온 금엽자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요의가 기고만장한 콧방귀를 뀌더니 조손, 두 사람을 향해 다시 말했다.
“저 둘도 이제 다른 소리 안하는데 이래도 본 공자와 안 갈 것이냐?”
그러자 소녀의 할아버지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더니 금엽자를 줍고는 손녀를 데리고 옆방으로 건너갔다.
이윽고 소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지온이 물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수작을 하는 건데요!”
루안이 웃음을 지었다.
“곧 알게 될 거요.”
점소이가 다시 왔을 때 루안은 기분 나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옆방에 대체 누구인가? 아직 한 곡도 다 부르지 않았는데, 어찌 사람을 이리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인지. 어찌 이리 횡포하단 말인가!”
그러자 점소이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공자님, 아마 높은 분이실겁니다. 곁에 모시는 시위들을 보니 왕공부분들이고 나이든 분은 목소리가 내시 같았습니다…….”
루안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눈을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미간을 좁혔다.
“어쩐지 그리 거만하고 횡포하다 했네. 어느 집안사람인지 모르겠군!”
그러자 점소이가 다독이듯 말했다.
“높은 분들이 움직이는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공자님. 소인이 주인어른께 말씀드려서 과일이라도 한 접시 더 올려드리겠습니다.”
루안이 손을 내저었다.
“됐네. 몇 순 더 술잔을 기울일까 했는데 흥이 다 깨졌네. 계산해주게.”
“알겠습니다.”
* * *
루안과 지온이 내려가 계산을 하는 것을 보며 점소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두 서생이 케케묵은 벽창호 같은 서생들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괜히 말다툼이 벌어졌다면 분명 일이 생겼을 상황이었다.
점소이가 돌아가 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들리던 음악 소리가 멈춰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다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작게 들려오는 소리에, 소녀가 지르는 안 된다는 비명과 나이든 사내의 살려달라며 비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점소이는 흠칫 놀랐다.
‘공자가 망측한 일이라도 하려는 건가? 이거 큰일 났구먼! 얼른 주인어른을 불러와야겠어!’
점소이의 동작은 충분히 빨랐으나, 뛰어 내려간 그가 주인장을 막 불렀을 땐, 이미 위층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 상태였다. 그리고는 그릇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단숨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주인장이 황 공공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제 옆에 맹수 같은 얼굴로 소리치고 있는 황 공공이 보였다.
“여봐라!”
시위들이 달려왔다.
황급히 별실 밖으로 뛰어나온 황 공공이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공자님! 팔공자님!”
급히 위층으로 올라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은 순간 놀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닥을 구르며 곡소리를 내고 있는 요의의 하반신이 피로 칠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상이 넘어져 깨진 그릇 파편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는데 창문이 휑하니 열려 있었다.
황 공공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어, 어서 의원을 불러와라! 팔공자! 팔공자님!”
시위대장이 창밖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범인이 저기 있다, 쫓아라!”
그렇게 모였던 이들이 둘로 나뉘어 황 공공은 남아 요의를 살폈고 시위대장은 범인을 쫓아갔다.
주인장은 그저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 *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지고 주인장이 어렵게 의원을 데려왔다. 그 뒤로 고개를 떨군 시위대장이 함께 돌아왔다.
“대체 어떤 자들인가! 겨우 노래 파는 자들이 어찌 무공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주루엔 강호인들도 있는지라 구경을 하러 왔던 이들이 입을 열었다.
“공(孔)씨 가문의 조손(祖孫)이었나보구먼? 나 참, 어쩐지…….”
골치가 아프던 찰나에 옳다구나 싶었던 시위대장이 그를 붙들고 물었다.
“공씨 가문의 조손이라니, 누군지 아는 건가?”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당연히 알다마다요. 공씨 가문의 할아버지와 그 손녀라면 강호에서 아주 유명한 이들이오. 공 노야는 음파공의 고수였는데 부인이 죽은 후에 아들과 며느리도 다 세상을 떠나면서 손녀만 데리고 강호 전체를 떠돌며 살고 있소.”
시위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강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역시 조금이나마 들어 알고 있지 않던가. 강호에는 확실히 실력이 뛰어난 고수가 분명하면서 평범한 이들처럼 살아가는 괴이한 이들이 있었다.
시위대장은 자신이 그런 이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요의가 그런 이들의 성질을 건드릴 것이라곤 더더욱 생각지 못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범인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고, 요의는 저렇게 상처를 입은 상태니 이 일을 대체 어떻게 가서 고한단 말인가!
시위대장이 공황상태에 빠진 사이, 황 공공은 의원을 붙들고 상황을 묻고 있었다.
“어떤가? 살릴 수 있겠는가?”
의원이 대번에 손을 내저었다.
“다 떨어지기 직전인데 이걸 어찌 살린단 말입니까? 돌아가 고명한 의원에게 다시 청하십시오!”
마음이 조급해진 황 공공의 목에서 태감,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분이 뉘신 줄 아시는가! 살리지 못하면 자네의 그 하찮은 목숨도 끝일세, 끝!”
시위대장이 살펴보니 요의의 그 부분이 피와 살덩이의 구분이 모호한 것이 거의 떨어질 것 같았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진 시위대장이 입을 열었다.
“황 공공, 벌써 저렇게까지 된 거면 태의가 와도 다시 붙이기 어려운 게 아닙니까?”
대체 자신들은 왜 이리 운이 없단 말인가? 도성을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소왕께 이리 변고가 생겼으니, 설사 폐하께서 중한 벌을 내리시지는 않는다 해도 강왕비가 자신들을 감히 살려두겠느냔 말이다!
요의의 신음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 아파 죽겠다고!”
모두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다 죽은 목숨이로구나!’
* * *
루안을 따라 나온 지온은 그와 함께 다시 마차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루에서 소동이 일었고, 황 공공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곧이어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주루에서 시위대가 튀어나왔다.
주루에서 송별하던 사람들은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인가 싶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지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요의가 다쳤네요?”
웃음을 지은 루안이 마부에게 말했다.
“이만 가지.”
“알겠습니다.”
* * *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가 서서히 장정(長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지온은 누가 속을 박박 긁는 것 마냥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요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말이지 너무 알고 싶었지만, 루안이 도통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갑자기 움직이는 마차의 문이 덜컥하고 열리더니 두 사람이 마치 고양이가 담을 타 넘듯, 유려한 몸짓으로 마차 안으로 쏙 들어왔다.
매우 놀란 지온이 뒤로 몸을 빼며 들썩이자, 루안이 그녀를 부축하듯 붙들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 사람이니 안심하시오.”
마차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의 자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차의 흔들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사공자를 뵙습니다.”
지온이 다시 보니 두 사람은 주루에서 기예를 팔던 할아버지와 손녀였다.
지온 역시 놀랐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찌된 까닭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정도까지 계획을 했다면 저 할아버지와 손녀는, 반드시 루안의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 예를 차리실 것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사공자님.”
입가를 쭉 찢으며 웃은 노인장이 곧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온은 손녀를 끌어와 제 옆자리에 앉게 해 주었다.
눈매가 덜 자라 어린 태가 가득한 열네댓 살의 소녀는 지온의 친절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고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보아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강호의 사람들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않던가.
“그는 어찌 되었습니까?”
루안이 물었다.
“분부하신 대로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노인장이 손짓을 곁들이며 대답했다.
“목숨엔 지장이 없겠지요?”
“저희가 정도를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인장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목숨은 위험하지 않겠으나 나을 수 있을지는……알 수 없지요.”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대답했다.
“고생하셨는데, 이 일 때문에 조정의 지명수배자가 되실 것 같습니다.”
노인장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강호인에게 지명수배가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명수배가 떨어지면 강호에서 저희 두 사람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겠지요.”
루안이 같이 미소를 지었다.
“어서 도성을 떠나십시오. 어디를 가시든 조심하시고 혹, 곤경에 처하신다면 주막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서 루안은 명패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