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8)화 (108/385)
  • 108화. 도성을 나가는 요의

    야우가 안을 볼 수 없도록 한등은 죽자사자 붙들고 매달렸다.

    야우는 몇 번이나 그를 밀쳐내려 해봤지만 한등이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않자,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도를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야기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사공자님이 대체 뭐하러 가신 건지는 내가 들어야겠다.”

    한등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주인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언제부터 서로 함부로 물어봤다고 이러십니까? 아무리…… 께서 야우님을 보내셨다 해도 함부로 선을 넘으시면 안 되지요!”

    혹시라도 서아가 들을세라, 한등은 ‘전하’라는 말을 뭉뚱그렸다.

    그 말에 야우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문지방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너 딱 그리 이야기할 줄 알았다. 넌 내가 이 먼 도성까지 온 게 고작 공자님께 좋은 여인이나 찾아주려고 온 줄 알아? 야 임마, 내가…….”

    그때 한등이 맹렬히 달려들어 야우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

    “어어어?! 너 왜 이래?!”

    한등은 하고픈 말을 속으로 삼켰다.

    ‘왜 이래? 왜 이래?! 거기서 입을 그렇게 마구 놀렸다가 서아 누님이 듣기라도 하면 비밀이 새어나가니까 그렇지, 이 인간아!’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푼 한등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선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도 있다고요! 걱정도 안 됩니까!”

    그 소리에 야우가 웃음을 지었다.

    한등은 그의 웃음에 멍해지고 말았다. 야우가 말했다. 

    “숨겨둔 시녀가 외부인이 맞긴 맞단 소리네? 그러니까 우리 공자님께서 지금 밖에서 온 여자 손님을 만나고 계신단거지?”

    “그렇든 아니든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야.”

    야우가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난 그냥 우리 공자님께서 여자 손님을 만나고 계시는 것만 알면 됐다!”

    적어도 사공자께서 그쪽 취향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그럼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가 부인을 얻어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단 소리였다.

    야우를 가만히 보던 한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자 손님이라고 어찌 생각하십니까? 남자 손님은 시녀를 못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설마 다른 집안 공자들도 다 우리 공자님처럼 시종들만 데리고 다니는 줄 아시는 건 아니죠?”

    “…….”

    순간 야우의 말문이 콱 막혔다.

    ‘아, 그렇지. 사공자님이 별종이었지, 참.’

    다른 고관대작가의 공자들은 대부분 시녀들이 있지 않던가! 야우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럼 지금 내가 헛물을 켜고 좋아하고 있었단 거네?’

    * * *

    “다 갈아입었어요.”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돌아선 루안은 문득 눈부심에 눈을 깜빡일 뻔하고 말았다.

    이미 청색 관복에 방건(方巾)까지 쓰고 있는 지온이었지만, 분도 바르지 않은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루안이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자 지온이 물었다.

    “문제가 있나요?”

    루안이 대답했다.

    “아닌 것 같군.”

    “뭐가 아닌 것 같단 거죠?”

    “사내가 아닌 것 같다는 거요.”

    “그 문제야 어렵지 않죠.”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은 지온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듯, 호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거울과 뚜껑이 덮인 작고 정교한 단지 모양의 다기들을 꺼냈다. 그러고는 탁자에 그것들을 늘어놓더니 지온은 새붓을 들었다. 그 뒤, 단지에 무언가를 붓에 쓱쓱 묻히더니 얼굴에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지온이 다시 고개를 들자 이목구비는 분명 아까 그 이목구비가 분명한데 얼굴의 상은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눈썹은 좀 더 두껍고 진해졌고, 입술은 바란 듯 색이 빠졌다. 피부 빛을 다소 그을린 듯 어둡게 만드니 사내들에게 느껴지는 활달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됐나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온이 분이며 연지들을 정리하는 것을 보던 루안이 결국 한 마디를 뱉었다.

    “그……역용술(*易容術: 분장술) 못지않군.”

    지온이 루안을 흘끔, 옆으로 보며 물었다.

    “제가 화장을 지우니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소린가요?”

    “아니오. 역시 당신은 그림에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오.”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었지만, 루안은 재주 좋게 빠져나갔다.

    ‘그래도 말은 참 잘해.’

    자리에서 일어난 지온은 서각 안에서 몇 걸음을 걸어 보았다.

    사내와 여인은 걷는 자세도 다르기 때문에 그저 겉모습만 분장으로 바꿔서는 안 되고 반드시 걸음걸이 습관까지 함께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연습을 하던 그녀가 물었다.

    “비슷해요?”

    루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늘 이렇게 영특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소홀히 하는 법이 없는 사람 말이다.

    “가지.”

    루안이 서각 문을 열자 한등과 야우가 서로 앙앙거리며 대거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지온을 데리고 조용히 반 바퀴 뒤로 돌아간 루안이 그녀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실례하겠소.”

    무언가 지온의 허리를 강하게 붙듦과 동시에 옅은 주향이 지온의 코끝을 맴돌았다. 곧이어 지온의 몸이 둥실하고 위로 날아올랐다.

    지온은 저도 모르게 루안을 꼭 붙들었다.

    땅에 내려선 후에도 두 사람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루안이 팔에서 힘을 풀었다.

    “뒷문으로 나가지.”

    “그래요.”

    지온의 마음이 조금 일렁거렸다.

    * * *

    후문에는 이미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부는 훈련을 제대로 받은 듯, 마차를 빠르면서도 흔들림 없이 몰았다.

    지온이 차창의 휘장을 걷었지만 보이는 것은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뿐이었다.

    대략 이각(二刻)쯤 지나고 마차가 멈추더니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공자님,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지온은 이곳이 도성 외곽에 있는 장정(長亭)이란 것을 깨달았다. 매 십리(十里)마다 세워놓은 송별지(送別地)였던 것이다.

    그녀를 데리고 가장 크고 화려해 보이는 주루로 들어간 루안은, 창가 자리를 요구해 앉았다. 관도가 제대로 보이는 자리였다.

    두 사람이 도착한 시간은 이미 정오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그렇게 한가로이 한참을 앉아있으려니,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 한 대가 시위대의 호송을 받으며 천천히 장정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에 새겨진 표식을 본 지온이 낮게 속삭였다.

    “요의인가요?”

    “음…….”

    루안이 찻잔을 쥔 채 천천히 대답했다.

    “강왕비가 배웅하는 것조차 폐하께서 막으셨으니 요의, 그자의 성격상 원망이 끊이지 않겠지. 겨우 이것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지금에서야 도착하다니, 시간을 끌고 싶은 것 같군.”

    시각이 이미 정오였으니 식사를 해야 했고, 소왕이라는 위세도 부려야 했으니 분명 가장 좋은 주루를 고를 것이 뻔했다.

    역시나 주루 앞에서 멈춘 강왕부의 마차에서 분에 찬 요의가 씩씩거리며 내리더니 시종들을 이끌고 주루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느냐? 소왕께서 행차하시는데 뭣들 하는 것이야!”

    그를 보필하던 내시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내쫓긴 상태라 지금 그를 모시는 이는 궁에서 보낸 늙은 내관뿐이었다.

    주변을 흘긋 살핀 늙은 내관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주인장, 별실 하나 준비해주게. 차가운 요리 네 개, 뜨거운 요리 네 개, 총 여덟 가지 요리를 준비해서 올려주고, 술은 됐으니 요리만 되는대로 바로 올려주게.”

    들어오는 이들의 수가 많은 것을 본 주인은, 일행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단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당연히 득달같이 달려 나온 주인은 공손한 모습으로 그들을 모셨다.

    내관이 주문하는 것을 듣던 요의가 불만을 토로했다.

    “겨우 요리도 여덟 가지 밖에 안 되는데 술도 안 된다니? 황 공공, 자네 너무 인색하게 구는 거 아닌가? 못해도 말린 과일이나, 과일 몇 접시 정도는 깔아 줘야지!”

    늙은 내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근신하려고 돌아가는 길이시니 과도한 향락을 즐겨서는 안 된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리가 여덟 가지면 다 드시지도 못하실 만큼 충분히 많으실 것입니다.”

    황 공공을 어쩌질 못해 씩씩거리던 요의는 어쩔 방법이 없으니 그저 화만 내며 이층에 있는 별실로 올라갔다.

    요의는 올라가고서도 요리가 맛이 없다는 둥, 방이 낡았다는 둥 온갖 생트집을 잡아댔지만, 늙은 내시인 황 공공은 요의에게 점소이를 불러주면서도 어떤 말은 어디서 개가 짖나 보다하며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황 공공이 이리 나오자 요의도 어쩔 도리 없이 그저 답답한 심정으로 밥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에 반주(飯酒)도 못하고, 옆에서 시중드는 시녀마저 없으니 정말이지 요의는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렇게 밖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와 손녀로 보이는 일행이 주루에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이호(*二胡: 현악기)가 들려 있었다. 열네댓 살쯤 된 듯한 손녀는 한참 꽃다운 나이의 소녀라 무척이나 예뻤다.

    본래 주루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제 기예를 파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인지라, 주인장도 그들이 손님들을 끌어모으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고 오히려 잘 되길 바랐다.

    누군가 조손, 두 사람을 불러 곡 하나를 부탁했다.

    그러자 소녀가 이호를 들더니 유유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고 고운 음색과 구성진 노랫가락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노래 소리에 요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나무 발 너머로 언 듯 언 듯 스치는 소녀의 가늘고 낭창한 허리가 그의 가슴을 한바탕 흔들었다.

    “어이, 가서 저들을 데려와 노래 한 곡 뽑아보게 하지.”

    그의 말에 황 공공의 얼굴이 굳었다.

    “팔공자님, 돌아가 근신을 하러 가시는 길이니 향락을 즐기셔 선 아니 되십니다.”

    화가 난 요의는 그릇이라도 던져 박살을 내고 싶었지만, 황 공공의 신분을 생각하니 또 그럴 용기까진 나지 않았다.

    억지로 화를 참아가며 식사를 마친 요의는 이번엔 곧장 떠나지 않겠다고 뻗대고 나서며 속으로 화를 삼켰다.

    ‘늙은이가 왜 자꾸 빨리 가자는 거야? 내가 왜 네 말대로 해야 하는데?’

    “팔공자님, 이제 움직이셔야 합니다.”

    황 공공이 재촉하고 나서자 요의는 되도 않는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졸리군. 오수를 해야겠다.”

    “마차에 오르신 후에 주무시지요. 가시는 길에 시간이 충분하니 원하시는 만큼 충분히 주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황 공공의 대답에 요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차가 그리 흔들리는데 날더러 어찌 자라고! 난 여기 있겠네! 주인장, 방 하나 내놓게!”

    요의가 진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자 황 공공도 방법이 없었다.

    “공공, 어찌합니까?”

    요의를 압송하고 있는 시위대의 대장이 다가와 묻자 한숨을 쉰 황 공공이 대답했다.

    “어쩌겠나? 팔공자께서 안 가시겠다는데 우리가 강제로 묶고 데려갈 수도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는 황제의 친아우였다. 지금이야 잠시 작위가 내려갔을지 몰라도 언제 다시 올라올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떠나기 직전에도 강왕비가 그들을 불러다 놓고 이야기까지 했었다. 만약 요의를 진짜 죄를 범한 종실로 대했다가는 다시 도성에 돌아와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경고였다.

    시위대장도 함께 한숨을 쉬었다.

    “그럼 마장은 수하들과 함께 아래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준 황 공공은 별실에 앉아 눈을 감고 편히 쉬며 요의가 충분히 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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