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서각
그렇게 네 사람은 양탕집으로 향했다.
한등을 끌고 슬쩍 뒤로 빠진 야우가 물었다.
“유씨 가문 둘째 공자의 약혼녀라고 하지 않았냐? 근데 왜 저 소저가 약혼자와 같이 안가고 우리 공자님이랑 같이 가는데? 지금, 제대로 말해라!”
한등이 그가 잡아끄는 제 옷을 도로 잡아 빼며 대답했다.
“아니, 아까 그 공자가 제 형님 들쳐 업고 돌아가는 거 못 봤습니까? 자기 약혼녀를 공자님께 부탁하신 거겠죠. 친우의 처가 될 사람인데 거절할 수가 있으려고요…….”
“그런 거야?”
야우는 굉장히 의심스러웠다.
한등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면요? 지온 소저의 미색이야 딱 봐도 큰일 나실 분인데, 그럼 우리 공자님께서 미색에 홀리실 그런 분이시란 말입니까?”
그 말에 야우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네. 미색에 홀려 다른 남자의 약혼녀를 빼앗는 건 공자님께서 하실 만한 행동은 확실히 아니지.’
야우는 확실히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고기탕을 먹는 동안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 소저는 본인만 예쁜 게 아니라 같이 있는 시녀들도 하나 같이 눈에 띄는 미인들이로구먼…….’
야우는 한심한 듯 한등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식사 내내 그녀들 주변을 뱅글뱅글 돌아다니기 바빴다. 탕을 채워주고, 뼈를 발라주느라 본인은 얼마 먹지도 못한 것이다.
‘저러고 다니는 걸 뭐라더라? 요즘 이를 일컫는 신조어가 있다던데? 아, 맞다. 호구…….’
* * *
성지(聖旨)는 금방 내려왔다. 황제가 내린 성지에는 기존에 요의에게 내렸던 벌보다 더욱 큰 벌이 적혀 있었다.
요의는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에 게을리 하였고, 음주 후 큰 추태를 보인 것 뿐 아니라, 태후께 불경을 저지르는 등, 여러 죄들을 범한 바 있다. 지은 여러 죄들을 일괄하여 벌하도록 한다.
요의의 신분을 진국장군(鎭國將軍)으로 격하하고 3년 감봉에 처하니, 봉지로 돌아가 두문불출, 죄를 뉘우치고 근신하도록 하라.
감봉? 어차피 강왕부가 봉록으로 먹고 사는 집안은 아니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작위를 격하시킨 것도 모자라, 도성에서까지 내쫓는 것은 체면 따윈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는 처사가 아닌가!
강왕비가 도성으로 돌아온 후, 궁에선 사실 그녀를 무척 예우하던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황제의 친부모니 황제의 마음이 그들에게 쏠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복의지쟁(*濮議之爭: 양자로서 황제가 된 북송 5대 황제 영종의 제위 기간 중 그의 생부인 복왕(濮王), 조윤양의 추증(追贈)을 두고 일어난 정치사건)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채 한 달밖에 안 된 차에 황제가 친혈육인 제 아우의 작위를 강등시킨 것도 모자라 도성에서 내쫓아버린 것이 아닌가!
‘그럼 폐하께서 강왕부의 뒷배가 되어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의미인 건가?’
‘이건 꽤나 신선하고만!’
신하들은 당연히 종실에 대한 일을 대놓고 왈가왈부 떠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친한 친우 서넛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이 사건에 관한 말이 안 나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찌됐건 폐하께선 선제 밑에서 자라시지 않았나. 여섯살에 입궁하여 배동으로 함께 수학을 하셔서 그런지 선(先)태자 전하의 분위기과 크게 다르지도 않고 말일세. 선제께서 워낙 후하게 베푸시는 분이 아니셨나. 선(先)태자 전하께 주시는 것이면, 폐하께도 빠짐없이 챙겨 주셨지. 정말 친자식처럼 대하셨어. 아마 폐하의 심중에 그런 선제폐하의 은혜를 향한 감사의 마음이 있으신 게 아니겠나.”
“그건 너무 이른 말일세. 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지 이제 겨우 삼년이네. 아직 조정을 온전히 정리하지 못하신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 강왕부편을 들고 나섰다가 노신들이 들고 일어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선제께서 폐하를 태자로 삼으실 때 폐하께 맹세하게 하지 않으셨나! 그때 얼마나 많은 노신들이 증인으로 있었는가 말이야. 그 때문에 강왕은 장례에 참석도 하지 않고 곧장 도성을 떠나 봉지로 가지 않았나.”
“맞네. 겨우 삼년 밖에 안됐는데, 너무 이르지! 노신들이 다 은퇴하고 조정이 모두 새로운 귀족들로 바뀐 후에 다시 정국을 살펴도 늦지 않다고 보네.”
“다들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닌가? 그리 인덕이 크셨던 선제가 아니신가. 그분과 함께 자란 분이신데 인품이 어디 가겠나?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난 삼년간 종실이고 노신이고 어느 누구하나 허투루 대하신 적이 없으시네.”
“허허, 왕위찬탈 전에는 왕망도 겸손했다네! (*백거이의 방언오수기삼 중 일부: 왕망겸공미찬시王莽谦恭未篡时) 지금은 이런 소리 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으니 기다려보세!”
“그래, 기다려보세! 난 아무튼 폐하를 믿네!”
* * *
채씨 가문의 안주인은 딸과 함께 은혜를 갚기 위해 조방궁에 방문했다.
그저 보기엔 조용히 온 듯 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실은 큰돈을 시주한 참이었다.
사방전의 뒤에 있는 전(殿)에 앉은 안주인은, 시름이 모두 가신 밝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지온 소저, 소저의 말대로 그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네. 그래도 자네가 좋은 일을 해주었는데 우리가 자네의 명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네.”
지온이 마주 미소를 지었다.
“부인,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저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 제가 도리어 강왕부에 미운 털이 박히게 되겠지요.”
채 소저의 모친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똑똑한 이들은 별처럼 많은 법이다.
원씨 가문의 며느리와 상인인 유삼이, 화신첨을 뽑아 어떻게 소원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금방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만약 채씨 가문의 소원이 이뤄진 것 역시 대대적으로 소문을 냈다가는, 설령 강왕부에서 증거를 찾아내진 못한다 해도, 지온이 뭔가 수를 썼을 거란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무리 대장공주와 관계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지온으로서는 절대 강왕부를 건드려선 안됐다.
어미 곁에 꼭 붙은 채 소저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온을 살피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물었다.
“소저, 정말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제게도 소저와 같은 능력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지온이 따뜻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일은 제가 한 일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무척 운이 좋게도 어떤 고인께서 도와주셨지요.”
채 소저는 다시 물으려던 찰나, 제 어미에 의미 제지당했다.
“다 끝난 일, 그만 캐묻거라. 밤에 심심할 일 없도록 이 어미가 바로 네 혼사부터 주선할게다.”
혼사를 주선한단 말이 나오자, 채 소저가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니!”
채 소저의 모친이 다정하게 제 여식을 보았다.
“어미가 꼭 좋은 사람으로 고를 테니 걱정 말거라. 네가 원해야 혼인도 하는 것이야.”
“네…….”
* * *
채씨 가문의 모녀가 떠나고 누군가 지온에게 전갈을 보냈다.
연락을 받은 지온이 서아를 불렀다.
“외출할 일이 생겼어.”
서아가 곧 마차를 준비시키기 위해 사람을 부르려 하자 지온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건 됐어.”
멈칫하긴 했지만, 지온을 따라 조방궁을 나선 서아는 곧 표식이 없는 마차 한 대가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온과 함께 마차에 오른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이건 어느 댁 마차인가요? 위험하진 않은 거죠?”
“응, 괜찮아.”
* * *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빠져나가 한적한 장원 앞에서 멈췄다.
서아는 가슴이 뛰는 것이 불안했다.
‘아가씨 행동이 꼭……. 누구랑 밀회라도 하시는 것 같네.’
그러다 서아는 금방 깨달았다.
이게 바로 밀회라는 것을 말이다!
장원은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심지어 돌아다니는 하인들도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나타나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등만 부지런히 길을 안내할 뿐이었다.
각루에 도착하자 한등이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위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서아가 그녀의 뒤를 따라 오르려하자 한등이 그녀를 붙들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당과를 샀는데, 누나 하나 드세요!”
* * *
층계를 오른 지온은 이곳이 서각(書閣)인 것을 깨달았다.
문이 있는 입구부터 깔린 두터운 융단은 실내 전체를 덮었고, 사방 가득한 책장에는 서책들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붓과 먹, 벼루와 종이가 정갈하고 깨끗했다.
지온의 마음에서 뭉클한 향수가 솟구쳤다.
‘이 서각……. 할아버지의 서재랑 비슷해.’
정말이지 너무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파란색 관복을 입은 루안은 책장 앞에 선 채 서책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담기자 꼭 시간이 삼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그 시절의 소년인 것이다.
소리가 들렸는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본 그가 서책을 내려놓았다.
“왔소?”
서각 안을 한 바퀴 돌아 본 지온은 마음이 복잡했다.
“고생 많이 했네요.”
루안은 담담했다.
“할 일이 없을 때 하나씩 했던 것이지, 고생이랄 것 없었소.”
지온은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계속 무애해각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로구나.’
서책 한 권을 뽑아든 지온이 멈칫하며 물었다.
“당신이 이 서책들을 어떻게 찾은 거예요?”
지온은 속으로 감탄했다.
‘심지어 서책마저 똑같다니…….’
루안이 대답했다.
“마음만 있으면 찾을 수 있소.”
“하지만 그 서책들 중엔 딱 한권밖에 없는 단권으로 된 책도 적지 않아요.”
“내가 내용을 기억하니까.”
그의 대답에 지온은 웃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아, 그랬지. 나도 기억하지, 참…….’
그는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내용을 복제하듯 적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날 불러낸 게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어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오.”
“그럼…….”
“다른 일을 하는 김에 여기도 보여 줄 겸,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것이오. 앞으로 갈 곳이 없거나, 조용히 있고 싶거나 할 때 여길 편하게 이용하시오.”
지온이 침묵했다.
“다른 이들에게 발견될 걱정은 할 필요 없소. 여긴 다 내 심복들뿐이고 나 역시 자주 안 오니까. 앞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배치를 바꾸는 것도 상관없고.”
‘지금…… 이 장원을 내게 준다는 뜻인가?’
말을 하고 난 루안이 어색하게 고개를 쓱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이 요의가 도성에서 나가는 날이오.”
멈칫한 지온이 그제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 이대로 놓아 줄 생각이 없었군요?”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 놈은 후회한다고 바뀌지 않지. 이대로 돌려보내는 건 그저 또 다른 규수에게 해를 끼치는 것뿐이오.”
그건 그랬다.
서랍장을 열고 이리저리 뒤지던 루안이 그가 입고 있던 청색 관복과 똑같은 옷을 그녀에게 던지며 말했다.
“갈아입고 나가지.”
* * *
야우는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사공자님이 어딜 가신거지?’
모든 장원을 이 잡듯 뒤진 야우는 끝내 한등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세월 좋구먼! 공자님은 안 모시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야우가 한등을 붙들고 말했다.
“오면서 보니까 여인네 치맛자락을 본 것 같은데, 너 이놈 그 시녀 속였지!”
그러나 한등은 야우를 보고 크게 놀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긴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야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이 장원을 우리 주인께서 사신 거다, 이놈아! 그런데 내가 모를 수가 있어?!”
“…….”
놀란 한등이 침묵하자 야우는 신이 났다.
“얼른 보여줘 봐라, 어떤 시녀를 속인 거냐?”
한등은 필사적으로 문을 막아섰다.
“안 된다고요! 절대 보면 안돼요!”
야우가 서아 누님을 보기라도 하면 공자께서 지온 소저와 함께 있단 것을 들키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