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더는 철든 어른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을 정한 유신지가 지온에게 권했다.
“녹두탕도 그저 그런데 내가 술이나 사면 어떻소?”
“네?”
지온이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건가요? 공자님께서 왜 이리 대범하시죠?”
유모지가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라고 합시다.”
“그러지요.”
고개를 끄덕인 지온은 내심 유모지 공자가 무슨 꿍꿍이속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모지가 지온을 이끌었다.
한등과 야우는 주루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유모지가 한 낭자를 데리고 주루를 오르는 것을 본 야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기린마냥 목을 쭉 빼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씨 가문의 둘째 공자 아냐? 공자와 같이 가는 소저가 혹시 유씨 집안 소저야?”
야우를 흘깃 바라본 한등은 금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월극(越劇), <양산백과 축영대> 중 ‘십팔상송(十八相送)’ 부분에서 축영대가 자신의 가문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며 양산백에서 그 아이와 혼인할 생각이 없냐며 묻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만 보아도 사내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이와 혼인하기 어렵다면 좋아하는 이의 여동생과 혼인하는 것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제가 모시는 공자가 유씨 가문의 공자를 좋아하고 있으니, 야우로서도 도무지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럼 유씨 가문의 소저와 혼례를 올리는 것도 괜찮잖아!’
넷째 공자님만 혼례를 올리면 자신의 임무도 끝나는 것이고, 그럼 북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홀로 늙어죽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완벽해!’
그러나 한등은 달콤한 야우의 환상을 와장창 깨뜨렸다.
“둘째 공자의 약혼녀네요.”
‘암, 약혼녀지, 전(前) 약혼녀지만 줄이면 그냥 약혼녀잖아.’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야우가 굳어버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는 야우의 얼굴은 이미 세상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한등아.”
“네?”
“너도 사공자님을 꽤 오래 모셨지? 공자님이 널 건드리신 적은 없고?”
한등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뭐라는 겁니까?”
야우가 한등을 위아래로 훑듯이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사공자님을 곁에서 모시지 않냐. 생긴 것도 너 정도면 잘 생겼고 호감형이고 말이야. 혹시 사공자님이 너한테 손을…….”
순간 한등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잘생겨? 호감형 같은 소리하네! 공자님은 사내라고, 사내!’
“헛소리 작작하십쇼! 공자님은 그런 분 아닙니다!”
* * *
위층으로 올라간 지온은 그제야 유모지가 왜 이리 당당하게 나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됐다.
유신지는 이미 발음이 꼬일 정도로 취한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루안과 어떤 시구(詩句)에서 사용한 글자 하나를 두고 논쟁을 하고 있었다.
루안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굴에 붉은 홍조가 있어 꼭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보이곤 했는데, 작은 술 단지 하나를 모두 비운 지금도 루안은 정신이 말짱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두 사람 모두 우두커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크크!”
유모지가 웃음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두 분 논쟁이 과열된 것 같던데, 마침 지온 소저를 만나게 됐으니 소저에게 판단을 내려달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
유신지는 지온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려 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 근육 때문에 그만 우는 듯한 표정을 내보이고 말았다.
한숨을 내쉰 지온이 유모지에게 말했다.
“형님께서 많이 취하신 듯합니다. 모시고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자 유신지가 얼른 부정하고 나섰다.
“저, 저 많이 안 마셨습니다. 겨우 한 병인데……!”
그러고는 자신이 멀쩡하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펼쳐 보였다.
“이것 보시지요. 이건 둘! 이건 넷! 맞지 않습니까?”
그를 본 유모지가 홀로 생각했다.
‘맞긴 뭐가 맞아, 이 형님아! 둘 할 때 셋 펴고, 넷 할 땐 아주 손바닥으로 내 뺨도 치겠네!’
쉽게 볼 수 없는 형님의 바보 같은 모습에 유모지는 속상하면서도 은근히 고소한 기분이었다.
지온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시면 제가 바로 사람을 불러 대공자님의 취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놓으라 하겠습니다.”
“…….”
유신지가 그래도 기재는 기재인지라 그 와중에도 머리는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취한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 소저의 말은 확실히 자신에게 불리했다. 잠시 고민을 한 그가 물었다.
“그런데 왜 저는 소저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이 느껴지나 모르겠습니다.”
지온이 눈썹을 훌쩍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유신지가 제 맞은편을 가리켰다.
“왜 루 형에겐 돌아가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제가 무서워서 그렇지요.”
지온이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루 대인의 명성이 어찌나 크신지, 저는 감히 그런 말도 꺼내지 못하겠습니다. 어디 대공자님처럼 편하고 가까이 대하기가 쉽겠는지요.”
‘저거 지금 내 칭찬을 하는 거잖아?’
이에 갑자기 유신지가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유모지는 더는 그 꼴을 두고 봐 줄 수가 없었다.
‘그리 총명하고 슬기롭던 형님은 어딜 간 거냐? 나처럼 눈치 없는 인간도 지온 소저가 아무 말이나 갖다붙였단 걸 알겠는데, 큰 형은 지금 그 소리에도 기분이 좋아 웃고 있으니……. 안 된다! 내, 이대로 형이 창피를 당하고 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자신이 늘 창피를 당할 때마다 큰 형이 나서서 도와주었으니, 이번엔 자신이 큰 형을 도와줘야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책임감으로 가슴이 빵빵하게 차오른 유모지가 유신지를 붙들었다.
“형, 어머니께서 우리더러 당장 돌아오라고 하셨어!”
“그래?”
유신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술에 취해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면 좀 더 기다리거라.”
“별일 이야! 집에 별일이 있어! 나더러 직접 나가 데려오라고 하셨어.”
유모지가 한껏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신지는 자주 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의 유모지를 보고 조금 믿음이 생겼는지 다소 곤혹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사겠다고 불러놓고 손님만 놔두고 가버릴 순 없지 않느냐?”
“루 대인께서도 이해하실거야. 두 분은 좋은 친우 사이잖아, 안 그래?”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유신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답을 한 유신지가 루안을 향해 공수했다.
“루 형, 집안에 일이 생겨 먼저 실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소?”
루안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연히 괜찮소.”
유신지가 미소를 짜냈다.
“다음, 다음번에 내 다시 사죄하겠소…….”
그 말과 함께 유신지는 유모지의 손에 아래로 질질 끌려 내려갔다.
유씨 가문의 형제들이 떠나자 별실엔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새로운 잔을 가져온 지온이 제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맛만 본 지온이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추로백(*秋露白: 술의 이름)이잖아요? 왜 이렇게 강한 술을 마셔요?”
루안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온은 그의 미소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에게 물었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같이 술을 마신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죠?”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일주일 쯤 됐지.”
지온이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말했다.
“매일 마셨다는 건가요?”
루안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이에 침묵하던 지온이 다시 물었다.
“두 사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루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지온의 질문에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뜬금없이 유신지와 기 싸움을 하다니…….
사실 스스로도 일을 벌이고 나서는 좀 유치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소년도 아닌데 좀 더 이성적이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린 음성이 자신에게 속삭였다.
더는 철이 든 어른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 해에 혹 자신이 그렇게 이성적이지도 않았고, 철 든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토록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애해각에서 그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
루안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자, 지온도 더는 묻지 않았다.
“술이 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마시는 건 몸에 좋지 않아요.”
루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괜찮소. 그 일에 관한 기억을 본래 술로 눌러두는지라…….”
‘그 일’을 언급하자 지온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온의 안색이 무거워지는 것을 본 루안이 화제를 전환했다.
“강왕부의 소식은 들었소?”
“네.”
사방을 경계하듯 살핀 지온이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 이야기하기 괜찮아요?”
루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온이 물었다.
“당신이 한 거예요?”
지온은 대장공주를 통해서, 황제가 요의를 불러들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의가 태후와 부딪히며 사고를 쳐, 황제의 명으로 도성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만 들었다.
지온의 물음에 루안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술잔만 빙글빙글 돌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렇다는 긍정의 신호였다.
지온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삼년 간 정말 적잖은 일을 한 모양이네요.”
궁 안까지 손이 닿을 정도라니, 그가 심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럭저럭…….”
루안의 긍정에 지온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그 세력을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쓴 건 낭비 아닌가요?”
“이게 어떻게 낭비지?”
루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 후로 태후는 궁의 심처로 은거해 들어가셨소. 이런 작은 돌 하나를 가지고 은거하던 태후의 분노를 일으켰으니, 아주 가치 있는 일이었지.”
“계산이 너무 절묘했어요.”
지온이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소왕이 강왕비의 죽고 못 사는 금지옥엽 막내아들이라더군요. 그런 아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으니, 강왕비는 분명 태후에게 원한을 가졌을 거예요. 만약 두 사람이 서로 싸우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거죠?”
루안이 대답했다.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지. 위 씨 가문이 아무리 세력이 커도, 태후 본인에게 권력욕이 전혀 없다면 무슨 방법이 있겠소. 강왕비가 마침 잘 돌아와 준 것이, 그녀 덕에 조정에 있는 오래된 신하들이 하나로 뭉칠 거요. 그럼 나중에 싸울 힘이 될 수 있겠지.”
그러고는 가만히 지온을 보던 루안이 순간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앞으로 며칠간 혹시 다른 일정이 있나?”
무슨 뜻으로 묻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지온이 되물었다.
“네?”
“없으면 나와 재미있는 걸 보러가지 않겠소?”
* * *
아래로 내려간 지온이 술값을 계산하려던 찰나, 그녀의 귀로 루안이 주인장에게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의 장부에 기록해 주시오.”
처음이 아닌 듯, 주인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공자님!”
지온이 물었다.
“그 많은 날은 전부 대공자님이 계산을 한 거예요?”
루안이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그가 산다 했으니, 그가 계산을 하는 게 당연하지 않소. 오품(五品) 낭중(郎中)의 봉록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된다고……. 함부로 쓸 수 없소.”
지온은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역시 재물을 제 목숨처럼 아낀다는 루 낭중답네.’
* * *
두 사람이 주루를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한등과 야우가 당장 달려왔다.
“공자님!”
고개를 끄덕인 루안이 지온을 향해 물었다.
“돌아갈 생각인가?”
“시녀들과 오늘 저녁은 양고기탕을 먹기로 해서 지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지온이 대답하자 루안이 제 시종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아직 안 먹었지? 양고기탕을 먹겠느냐?”
“먹죠!”
이어서 야우가 득달같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사공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