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5)화 (105/385)
  • 105화. 태후

    대화를 들을수록 강왕비의 기분은 좋아질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황제의 생모가 맞긴 맞는데, 그런데도 황제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단 듯 잊어버리고 뽀르르, 태후 앞으로 달려가 지극한 효자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 하나 봐주지도 않고 말이야!’

    “으읍! 으으읍…….”

    바닥에 짓눌린 요의는 관심을 받지 못하면 죽기라도 하는 듯 요란스레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속으로 외쳤다.

    ‘지금 둘이 오붓하게 대화나 나눌 때야? 나 좀 살려달라고!’

    화가 난 황제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지금 자신이 태후에게 효도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 안 보인단 말인가! 태후의 분노가 가라앉아야 사정을 부탁해도 할 것이 아닌가!

    요의의 작태에 태후의 미간이 다시 좁아지는 것을 본 황제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모후, 분노를 가라앉히시지요. 저 녀석이 모후의 분노를 샀다는 소식에 소자가 이리 바로 달려온 것입니다. 녀석이 무슨 우를 범한 것인지 소자에게 일러주시면, 제가 모후를 대신하여 단단히 훈계토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태후는 콧바람만 쌩하니 뿜었다. 

    태후 대신 입을 연 것은 옆에 있던 늙은 유모였다.

    “폐하, 진국공이 너무도 무도하였사옵니다! 이곳은 후궁이지요, 아무나 방자히 행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오늘 마마께서 기분이 좋으시어 바깥바람도 쐬실 겸, 망우초와 다른 꽃들을 따다 향낭을 만들고자 화원에 잠시 앉아 계실 때였지요. 그런데 천만뜻밖에 진국공이 나타나 꽃을 따고 있던 궁녀를 희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늙은 유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진국공은, 폐하께서 자신의 친형님이라며 저를 따르면 앞으로 끝없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단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듣고 계시던 마마께서 더는 방관할 수 없으시어 훈계를 하시니, 감히 진국공이 도리어 마마께 말대꾸를 하며 대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 이 늙은 것은 어차피 늙어 곧 죽을 몸, 마마를 대신하여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폐하, 폐하께 태후마마는 싫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신 것입니까? 그래서 청녕궁(淸寧宮)에 다른 분을 들여, 모시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말끝에 강왕비를 향해 원한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낸 늙은 유모가 다시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쳤다.

    “명(命)도 기구하신 우리 마마님……. 폐하께서 분명 선제폐하의 영전(靈前)에서 친어머니 대하듯이 태후마마를 대하겠다고 맹세하시었는데……. 이제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어찌…….”

    황제가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네! 짐이 저 녀석을 입궁하라 명한 것도 녀석을 야단치기 위해서였네. 모후, 저를 믿어 주셔야 합니다. 소자는 정녕, 녀석이 금족령을 받고도 이리 바로 일을 저지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늙은 유모가 읊조렸다.

    “입만 열면 폐하께서 자신의 친형님이란 말을 서슴지 않고 하던 진국공의 모습 어디에도, 폐하께 혼이 난 듯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폐하께선 혼을 내셨다하시지만 목소리만 높이셨을 뿐 실은 그리 강하게 혼내지 않았다는 말씀이겠지요.”

    “그것은…….”

    태후의 입이 그제야 열리며 덤덤히 목소리를 내었다.

    “나도 모르지 않습니다. 죽었어야 하는 목숨, 죽질 않으니, 궁에서도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하늘이 이 늙은 목숨을 질기게도 거둬가지 않는 것을…….”

    너무도 무거운 발언에 얼굴이 새파래진 황제가 어쩔 수 없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결단코 그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선제와 모후께서 베풀어 주신 크신 은혜, 소자는 결코 잊지도, 배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모후!”

    황제가 맹세하듯 대답하자 그제야 태후의 표정이 다소 밝게 돌아왔다.

    내심 안도한 황제가 그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모후, 그럴 가치도 없으니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짐이 이번엔 단단히 벌을 내려, 이번엔 기어코 버릇을 고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 말에 강왕비가 저도 모르게 벌컥 입을 열고 말았다.

    “폐하!”

    그러나 오직 태후를 다독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한 황제가 강왕비에게 신경이나 쓰겠는가?

    냉큼 고개를 돌린 황제가 노기가 등등한 눈으로 요의를 바라보았다.

    “천하에 쓸모없는 놈! 조금 전에 금족령을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야! 어찌 태후마마 곁에 있는 궁인에게까지 수작질을 하려 든단 말이냐! 대체, 후궁이 어떤 곳이라 생각하는 것이야!”

    그때 늙은 유모가 은근한 추임새를 덧붙였다.

    “후궁에 든 여자는 죽으나 사나 결국은 폐하의 여인인 것을. 감히 후궁에서 여인을 희롱한 진국공은 궁정을 문란케 한 것이지요.”

    흠칫한 황제는 순간 그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의, 저 녀석이 지금 날 우스운 꼴로 만든 것이 아닌가! 참으로 문제로다!’

    요의가 항변하려 입을 열었지만, 황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짐의 후궁에서도 수작을 벌이는데, 네가 또 못할 짓이 뭐가 있겠느냐? 짐은 도저히 널 이대로 도성에 남겨둘 수 없으니, 썩 봉지(封地)로 꺼지거라! 가서 강왕숙부께 제대로 교육을 받아라!”

    “예에?”

    어리둥절한 소리를 낸 요의가 미친 듯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소리쳤다.

    “폐하, 폐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진짜 안 그러겠습니다!”

    그러며 요의는 하고픈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제 막 도성에 들어와 충분히 놀지도 못했는데……. 돌아가면 재밌는 것도 하나 없단 말입니다! 안 돌아갈래요!’

    허둥지둥, 강왕비가 빌고 나섰다.

    “폐하! 신첩이 반드시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게 하겠으니 제발 벌을 거두어 주시면 아니 되겠는지요? 이리 가버리면 신첩은 여덟째를 다시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늙은 유모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애초에 강왕비께서 공자님을 관리할 수 있었더라면 오늘의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요.”

    차가운 태후의 차가운 눈빛을 확인한 황제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 할 필요 없다! 삼일 후 네놈은 도성에서 떠날 것이며, 짐이 사람을 보내 떠나는 것을 확인하겠다!”

    * * *

    요의는 하염없이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는 너무 억울했다.

    한 거라곤 궁녀 하나가 보이기에 다가가 몇 마디 던진 것이 전부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걸로 태후에게 욕을 들은 것이다.

    그래서 변명하려고 하니, 태후 옆에 있던 그 늙은이가 당장 튀어나와 태후께 대드느냐며 곧장 사람을 불러 흠씬 두들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 맞은 엉덩이의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모함까지 당하고 말았다.

    ‘나는 한 마디도 못하게 하고!’

    자신은 정말 그 궁녀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았다. 폐하께 혼이 난 뒤라 얼마나 조신하게 다녔는지 모른다.

    요의 자신은 정말 궁녀를 손으로 붙잡거나, 발로 못 가게 막지도 않았고, 그저 말로만, 정말 말로만, 강왕부로 갈 생각이 없는지, 네가 가고 싶어 한다면 내가 폐하게 널 달라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아주 제대로 순서를 지킨 게 아닌가? 어떻게 이게 궁정을 문란하게 한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미 황제의 입에서 어명이 떨어졌으니, 무조건 가야만 했다.

    * * *

    조방궁에도 요의의 소식이 전해지고 대장공주도 이에 매우 놀랐다.

    “정말 네 말이 맞았구나, 폐하가 진짜 녀석을 봉지로 돌려보냈어.”

    대장공주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진짜 운의 흐름을 본 것이냐, 아니면 다른 원인이라도 있었던 게야?”

    지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마, 신녀는 비밀을 지키고 싶사옵니다.”

    대장공주의 눈썹이 슬그머니 오르내렸다.

    “비밀도 있는 것이야?”

    지온이 찻잔에 차를 채우며 대답했다.

    “무릇 비밀이란 것은, 그저 이야기를 꺼낼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지요.”

    가만히 지온의 대답을 생각한 대장공주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게.”

    경 강의를 마친 지온은 난택산방 밖에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나가서 양고기탕이나 먹을까? 의운, 가서 저녁은 할 필요 없다고 알리거라.”

    “예!”

    신이 난 의운이 크게 대답을 하곤 깡총거리며 달려갔다.

    서아와 함께 조방궁을 나선 지온은 궁문 앞에 길게 늘어선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누군가를 발견한 서아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기 저분 유씨 가문 둘째 공자님 아닌가요?”

    지온이 고개를 돌려보자, 서아의 말대로 유모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는 길가에 있는 작은 노점에 앉아 녹두탕을 마시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녹두탕 한 모금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 한 움큼이 연이어 이어지자, 주인장의 눈썹이 사납게 치솟는 것이 아무래도 그를 무척 내쫓고 싶은 듯했다.

    지온의 짐작대로 주인은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다. 

    ‘여기서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 집 녹두탕이 맛이 없어 그러는 줄 알거 아니오!’

    유모지가 수심이 가득하여 울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둘째 공자님.”

    화들짝 놀란 유모지는 손을 휘젓다 그만 녹두탕을 소매에 쏟고 말았다.

    역시 놀란 서아도 잔뜩 미안한 얼굴이 되어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공자께서 놀라실 줄 몰랐습니다!”

    서아는 얼른 그를 도와 소매를 닦았다.

    유모지는 화가 치밀었다. 안 그래도 잔뜩 짜증이 난 상황이었는데 왜 또 찾아와 사람을 귀찮게 한단 말인가?

    치미는 화를 쏟아내려 고개를 들자 그의 시야에 지온의 얼굴이 쑥 들어왔다. 유모지는 뱃속에서 올라오던 말들을 도로 꿀꺽 삼켰다.

    ‘선녀의 외양에 악마의 속심을 가진 여인이다. 절대 화나게 해서는 안 돼!’

    “공자님, 왠지 다른 생각을 하시는 것 같네요?”

    지온이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고민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제게 말씀해보시지요!”

    말을 마친 지온은 유모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주인을 향해 녹두탕 한 그릇을 주문했다.

    지온의 외모가 뛰어난 것을 본 주인은, 장사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 탕을 가져다주는 김에 녹두떡도 함께 주었다.

    그것을 본 유모지가 눈치 없이 물었다.

    “녹두떡도 주는 것이었소? 난 왜 안 줬던 것이오?”

    그러자 주인이 냉정한 얼굴로 아무 이유나 갖다 붙였다.

    “낭자가 마침 딱 백 번째 손님이라 한 접시 드린 것이오.”

    “오, 그렇소?”

    유모지가 제 머리를 긁적였다.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지온이 천천히 녹두떡을 먹으며 물었다.

    “공자님께선 왜 그리 한숨을 쉬고 계셨습니까?”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모를까, 그녀가 입을 열자 유모지의 얼굴이 어쩐지 노랗게 뜨는 듯했다.

    유모지는 부주로부터 요즘 제 큰형이 매일 이 근방에 왔다가, 술에 거하게 취한 채로 집에 돌아온단 소식을 들었었다. 그래서 직접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따라 나섰었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또 루안 그자를 만나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꼭 뭐에 홀린 것 마냥,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으르렁거리며 도발을 해대더니 술집부터 찾아 나섰다.

    주량이 좋은 루안은 돌아갈 때도 멀쩡해 보였다.

    이 정도면 바보 같은 자신조차 루안이 일부러 형을 걸고 넘어져 강제로 취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알겠는데, 대체 그렇게 똑똑한 형이 왜 이 일만큼은 이리 바보처럼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니 유모지가 고민이 안 될 수가 있겠는가?

    하나뿐인 형님이 이러다 술독에 빠져 멍청이가 되면 어쩐단 말인가?

    ‘이게 다 저 전 약혼녀, 지온 소저 때문이야! 이 화근덩어리!’

    생각을 마친 유모지는, 이렇게 창피한 일까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되려 지온에게 물었다.

    “여긴 왜 왔소?”

    지온은 뒤쪽에 있는 조방궁을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아주 당연한 일 아닌가요?”

    유모지가 코를 긁적였다.

    ‘그렇지, 참.’

    녹두탕을 후룩, 마시던 유모지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정작 보려는 사람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그리 경쟁해대던 두 사람이, 보려던 사람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되려나?’

    차라리 승패가 결정이 나면 술도 안 마시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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