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4)화 (104/385)
  • 104화. 벌을 받는 요의

    깊고 심각한 표정의 황제가 아래에 있는 요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죄를 알고 있느냐?”

    흠칫한 요의가 고개를 들고 반박을 하려던 찰나 강왕비의 질책이 귓전을 때렸다.

    “형님께서 묻고 계시질 않느냐, 어서 제대로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느냐!”

    그에 요의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우가 과음하여 많은 이들 앞에서 보여서는 안 될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우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만나자마자 잘못한 것부터 들춰내다니, 여섯째 형이랑은 친해지지 못할 줄 알았다니까.’

    그 일이 있고 저 자신도 얼마나 충격이 컸던가!

    ‘나 자신이 돼지를 안고 있는 상황이 떠오를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인데 위로는 못해줄망정!’

    황제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것뿐이냐? 채씨 가문의 규수와는 어떻게 된 것이냐? 채 소저가 왜 너와 정국공부에서 따로 만나려 한 것이야?”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요의가 입을 열었다.

    “그건 이리된 것입니다! 제가 그 소저를 첩으로 들이고 싶으니,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도 볼 겸, 한 번 만나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보자 했던 겁니다.”

    요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제가 어안 위에 있던 문진(*文鎭: 책장이나 종이쪽이 바람에 날리지 아니하도록 눌러두는 물건)을 냅다 요의를 향해 던졌다.

    “으악!”

    상급의 수산석(壽山石)으로 만들어진 문진은 쌩하니 날아가 요의의 어깨를 정통으로 때려 맞추고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모습에 매우 놀란 강왕비가 당장에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여덟째가 잘못을 저지르긴 했다고는 하나 이미…….”

    그러나 황제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비록 채 소저의 아비인 채풍(蔡豊)의 관직이 높다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두 개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당당히 급제를 한 양방(*兩傍: 과거에서 향시의 거인과 회시의 진사에 모두 급제한 사람)출신이다. 그런 그가 어찌 제 적녀를 첩 자리에 보낼 수가 있단 말이냐! 

    그리하면 사림(*仕林: 벼슬아치들을 이름)들 틈에서 그의 명성은 어찌 된단 말이야! 조사를 통해 알아본 바, 짐은 네가 채씨 가문을 벼랑으로 몰아세운 것을 확인했고, 그에 채 소저가 어쩔 수 없이 정국공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미 확인했다!”

    요의가 소리쳤다.

    “그 여자네 집에서 제가 보낸 초청첩자도 받았고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까! 밀회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분명 그쪽도 동의를 한 것이죠!”

    “네놈이 아직도!”

    분노한 황제가 요의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채씨 가문에서 왜 널 만나겠다고 정국공부까지 간 것 같으냐? 그저 너와 대화를 하고자 했다면 어느 곳에서 만나도 상관이 없었겠지! 그들이 정국공부를 선택한 것은, 정국공부가 가진 세(勢)로 네놈의 마음에 거리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네놈이 도가 넘는 행동으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네 녀석은 그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였던 것이고!”

    황제의 신랄한 비판에 요의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그런 거였어? 채씨 가문이 신분 상승을 노렸던 게 아니고?’

    “채 소저가 네놈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라. 그렇지 않았다면 네놈이 벌인 파렴치한 수작에 자칫 채 소저가 그대로 호수로 뛰어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야! 만에 하나 인명 사건으로 번졌다면, 아무리 짐이 네 녀석을 도와 수습하려 나서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분기탱천한 황제의 화를 풀기 위해 다급히 강왕비가 끼어들었다.

    “폐하, 노를 거두시지요! 폐하의 아우가 성정이 단순하니 거기까지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앞으로 천천히 가르치면 될 것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생모의 체면은 챙겨줘야 했던지라 황제가 그나마 목소리를 낮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모님, 짐이 호은마저 나가 있으라 한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그나마 다른 이들에겐 이런 꼴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을 듣고 짐은 그나마 채 소저와 이 녀석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지금이야 그저 창피할 뿐이지만, 아니었다면 정국공부에게 큰 실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강왕비가 되물었다.

    “폐하, 일을 너무 심각하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십니까? 우리 여덟째가 채 소저를 그리 몰아가선 아니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정국공부에게 큰 실례가 된단 말입니까?”

    “일이 터지지 않았으니 그런 것이지요! 만일, 채 소저가 국공부에서 자진이라도 했다면 정국공이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정국공이 모친을 위해 준비한 생신연회에 뜬금없이 사람이 죽어 나갔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얼마나 듣기가 안 좋습니까? 다른 이들은 정국공이 저 녀석의 못된 짓을 도왔다고 생각할 텐데, 정국공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말을 듣고 보니 강왕비 역시 그의 말이 옳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요의는 여전히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채 소저가 왜 자진을 한답니까? 제게 시집을 오는 것이 뭐가 나쁘다고요? 첩 자리라곤 하지만, 황제의 친척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에 화가 난 황제는, 머리 뚜껑이 열려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황제가 요의를 손가락질하며 강왕비에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저 녀석이 뭐라는 지 들으셨습니까! 몰락한 집안이야 간혹 첩 자리에 딸을 보내는 경우가 있어도, 기개를 가장 중히 여기는 문인 가문인 채씨 가문에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녀석이 저리하는 것은 지금 짐의 평판을 망치는 짓입니다!”

    놀란 강왕비가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입궁할 때만 해도 황제에게 온갖 고자질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아주 심각하지 않은가!

    애지중지 키우는 막내아들이 그런 첩을 들이든 말든, 강왕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설사 아들이 겁탈을 했다 해도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일이 황제의 명성에 영향을 준다고? 그래선 안 되지!’

    황제의 황위가 공고해야만 강왕부 역시 상승일로를 걸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리되어야만 나 강왕비가 태후로 추앙 받으며 살 수 있단 말이다!’

    “요의, 어서 형님께 잘못했다 빌지 않고 뭐 하는 게야!”

    날카롭게 소리친 그녀가 다시 황제를 향해 간청했다.

    “이 숙모가 그리 깊이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제대로 교육을 시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폐하.”

    강왕비의 호통에 요의가 제 죄를 인정하자 그제야 황제의 얼굴이 풀어졌다.

    “금일부로 요의의 운신을 강왕부 부저(府邸) 내로 제한하는 부저금족령에 처하며, 석 달간 문밖 출입을 금한다. 금 이백 냥의 벌금을 채씨 가문에 사과의 말과 함께 전하라. 그리고 짐이 앞으로 요의 널 제대로 가르칠 선생을 찾아 보내주겠다. 만약 다시 한 번 문제를 일으킨다면 네 작위를 강등시킬 테니 그리 알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석 달이나 문밖 출입을 할 수 없다니, 요의가 견딜 수 있는 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반항을 해보려는 생각도 잠시, 강왕비의 서슬 퍼런 눈빛에 그는 잠자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폐하.”

    그 일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강왕비는 좀 더 남아 요의에게 화가 난 황제의 기분도 풀어 줄 겸, 황제와 좀 더 대화를 나누려했다.

    황제는 채씨 가문에 보내는 사과문이나 쓰라며 요의를 내보내고는 홀로 남아 강왕비와 차를 마셨다.

    그러나 차 한 잔을 모두 비우기도 전, 날벼락 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밖에 있던 호은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날벼락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큰일 났사옵니다! 진국공께서 태후마마의 분노를 샀습니다!”

    * * *

    태후는 당연히 선제의 황후를 말함이었다.

    태후는 선제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는 궁의 심처에 은거한 채 예불만 올리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 더는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연달아 아들과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니, 더는 상처받을 일도 남지 않게 된 태후는 권력을 향한 마음마저 모두 잃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요의가 대체 무슨 짓을 해서 태후의 분노를 산 것인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급히 청녕궁(*淸寧宮: 태후의 거처)에 당도하니, 분에 겨워 가슴을 들썩이는 태후가 정전(正殿)에 앉아 있었다.

    아래엔 건장한 체격의 내시 몇 사람이 요의를 붙들고 있었는데, 요의의 머리를 바닥으로 강하게 내리눌러 제압한 상황이었다.

    요의는 버둥거리며 반항을 하려고 했지만 상반신이 움직여지지 않는 모양인지 엉덩이만 바짝 위로 치켜든 채 쉼 없이 팔만 사방으로 휘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왕비는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여덟째야! 우리 여덟째가 어찌……!”

    금이야, 옥이야, 품으로 그렇게 싸고돌며 키운 막내가 아니던가! 평소 살짝 까진 상처만 나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아이를, 눈앞에서 닭 잡듯 잡고 누르고 있으니 견딜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강왕비가 미처 달려들기 전, 태후 곁에 있던 늙은 유모가 헛기침과 함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께서 계시는데 어찌 예를 표하지 않으십니까?”

    강왕비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태후는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다. 그러나 평상복을 입고 있는 태후에게서 희끗희끗한 은발이 비치는 것이, 그저 보기엔 자신보다 대여섯 살은 더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늙은이, 당신도 지난 3년이 꽤 지내기 힘들었겠지!’

    강왕비 역시 젊었을 적엔 도성에서 이름난 규수였기 때문에 태자비가 되기 위해 꽤나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위씨(衛氏) 집안의 소저에게 패하는 바람에 결국 두 번째 선택지인 강왕에게 시집을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위 소저’는 태자비가 되었고, 황후가 되었고, 지금은 태후가 되었다.

    강왕비는 비교할 수 없는 질투와 더불어, 은근한 시원함을 함께 느꼈다.

    제 아들이 황위의 자리에 올랐으나 태후가 된 것은 정작 저 여인이란 것에 대한 질투가 차올랐다.

    그러나 기쁘게도 저 여인에게 과거 태자비의 자리를 빼앗겼을지언정, 저 여자는 이십 년이 넘는 황후라는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 아들도, 남편도 모두 죽고 남은 반평생은 과부로 살아야 하는 인생이 되지 않았던가!

    “소자, 모후를 뵙습니다.”

    황제의 목소리가 강왕비를 상념에서 이끌어냈다. 아무리 가슴에 득의가 만만하더라도 지금은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미소를 쥐어짜낸 그녀가 예를 갖추며 느릿하게 무릎을 꿇으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신첩,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강왕비는 자신이 천천히 움직이면, 황제의 생모라는 것을 봐서라도 무릎까지 꿇게 하지 않고 일어나게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태후는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었고, 강왕비는 결국 이를 악물고 끝까지 예를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눈으로 황제와 강왕비를 보고 있던 태후는, 잠시 시간이 흐르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만 일어나게.”

    몸을 일으킨 황제가 자연스레 태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공손한 모습으로 그녀의 옆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며칠 뵙지 못한 사이에 모후의 얼굴색이 어찌 이리 좋지 못하신 것인지요? 요즘 잘 쉬지 못하신 것입니까? 소자가 황후에게 모후의 봉체에 그리 신경을 쓰라 일렀거늘, 어찌 이리 소홀히 했단 말입니까!”

    태후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후 때문이 아니에요. 내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 것이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닌 것을…….”

    황제가 얼른 말을 더했다.

    “그런 슬픈 말씀 마십시오, 모후. 아직 이리 젊지 않으십니까. 관리만 잘 하시면 분명 금방 회복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 북양에서 진상한 약재가 있습니다. 소자가 당장 모후의 몸을 보할 수 있도록 사람을 시켜 보내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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