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3)화 (103/385)
  • 103화. 재수 없는 일

    황제가 그 소식을 접한 것은 이미 수일이 지난 후였다.

    그는 이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덟째가 술에 취해 돼지우리로 달려들었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의 옆에 있던 총관태관, 호 공공이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신기한 것들에 백성들이 끌리다보니, 백성들 사이에서 소문이 좋지가 않사옵니다.”

    “소문이 어떻게 안 좋은지 말해 보거라.”

    “폐하, 그것이…….”

    “솔직하게 말하게. 자네를 탓하지 않을 것이야.”

    조심스레 단어를 선별한 호 공공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말하길, 팔공자께서 특별한 호기심이 있으시어 돼지와 함께 주무시길 좋아한다, 합니다.”

    황제의 얼굴이 순간 붉게 타올랐다가 다시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하길 반복했다.

    호 공공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당당한 황실의 종친이 돼지와 함께 자는 것을 좋아한단 소릴 듣다니, 대체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란 말인가!’

    “폐하.”

    그때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야 황제는 아직 루안이 이곳에 있단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루안을 부른 것은 그에게 글자 ‘복(福)’을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루안의 필체는 본래 힘이 있는데다, 루안은 서예도 열심히 하여 선생께서 살아계실 적엔 자주 그의 필체를 칭찬했었다.

    “다 썼는가?”

    황제가 온화하게 물었다.

    붓을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간 루안이 황제에게 예를 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사건이 있던 곳에 마침 신 또한 있었습니다.”

    매우 놀란 황제가 물었다.

    “자네가 정국공부에 갔었단 말인가?”

    지난 삼년간, 루안은 훈귀가의 문신들과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연회에는 당연히 가지 않았던 것이다.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신이 외출하려는데 마침 유씨 가문의 대공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신을 부득불 끌고 갔습니다.”

    “그리된 것이었군.”

    황제가 웃음을 지었다.

    “유신지는 성격이 쾌활하니, 자네는 그와 좀 더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자넨 늘 너무 심각하지 않은가. 쉬는 날엔 가서 좀 놀기도 하고 그러게. 정도껏 풀고, 조여 줘야 좋은 것이네.”

    “네, 폐하.”

    황제가 본론으로 돌아와 물었다.

    “자네는 그 장소에 있었으니 사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겠군?”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팔공자께선 다소 취기가 오르신 상태로 자리에서 벗어나 호숫가 주변을 걷고 계셨습니다. 과음하고 싶지 않았던 신과 대공자 역시 연회석을 벗어나 있었다가, 마침 그들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유신지와 채 소저가 부딪힌 것을 말하고, 자신이 다시 요의를 만난 것을 전했다.

    “그런데 신과 대공자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팔공자께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곧장 달려가 보니 어찌 된 영문인지 팔공자께서 뒷주방에 계셨고, 곧 도축 예정인 돼지를 붙들고 잠꼬대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표정이 안 좋아지던 황제는 급기야 분노하여 어안(*御案: 황제 전용 탁자)을 쾅, 내리쳤다.

    “참으로 주정뱅이가 따로 없구나! 짐이 강왕의 봉지에 가서 제대로 반성을 하라 그리 일렀거늘, 대체 무엇을 반성한 것이야!”

    덤덤한 기색의 루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공자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팔공자를 모해한 것을 의심한 강왕세자비께서 대공자를 불러 질문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팔공자 스스로 길을 잃으시고 하녀의 뒤를 따라가셨다가, 자신도 모르게 뒷주방까지 가게 되셨던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뭐라!?”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말도 잘 나오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술만 탐하는 것이 아니라, 여색까지 탐해! 호은, 당장 그 녀석에게 입궁하라 이르게!”

    “네, 폐하.”

    호 공공이 명을 받고 떠났다.

    루안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호 공공이 전(殿) 문을 나서자 보고를 이었다.

    “폐하, 이번에는 그저 팔공자의 명성에만 흠이 났을 뿐, 그에 따른 후폭풍까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팔공자를 관리하고 단속하지 않으신다면 공자는 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루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날 팔공자께선 어쩌면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으셨습니다. 채씨 가문의 소저 성정이 불같다고들 하는데, 만약 팔공자께서 채 소저를 끝까지 궁지로 몰아갔다면 결국 그녀가 자진을 기도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채 소저가 정국공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면, 정국공의 체면은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되었다면 강왕부와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채 소저 쪽은 무사하니 넘어가더라도, 하녀에게 일이 났더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아무리 신분이 낮은 자이지만 정국공부의 하녀입니다. 팔공자께서 하녀를 건드렸다면, 정국공께선 사건 후에 하녀를 팔공자께 보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 해도 마음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으시겠습니까?”

    황제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그나마 다행이야. 두 가지 일 모두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니었으면, 정국공 쪽이…….”

    정국공부는 결코 척을 지면 안 되는 곳이었다. 대장공주의 시댁인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두 번째는 대대로 훌륭한 장수들을 배출하여 군에서 그 명성이 무척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홀대했다간 노신(老臣)들이 어찌 생각하겠는가!’

    선제의 양아들인 자신은 이제 황위에 오른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은 터라 아직 대권을 완전하게 손에 쥐질 못한 상태가 아니던가?

    ‘내 황권이 흔들릴지도 모를 큰일이란 말이다!’

    그것을 이해한 황제가 따뜻한 눈빛으로 루안을 바라보았다.

    “아마 내게 이리 직언할 수 있는 사람도 자네뿐일거야. 다른 이들은 말이네, 짐이 강왕부 출신이란 이유로 그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것이라 생각해. 그래서 짐 앞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상황을 감추고 태평한 척하지. 흥! 선제폐하의 대은(大恩)을 입고 대통을 이은 짐이 어찌 한쪽 편으로 치우칠 수 있겠는가!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야!”

    담담한 웃음을 지은 루안이 허리를 활처럼 굽혔다.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그의 한마디에 황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사탕발림도 하는 사람마다 그 당도가 다른 법이다.

    루안이 누구던가? 아부 같은 것은 안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과거 태자 앞에서도 루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영명.

    이 간단한 단어 하나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인 것이다.

    글자 쓰기를 마친 루안은 그대로 물러났다.

    루안은 궁문을 나설 때 마침 입궁을 하는 강왕비 모자와 마주쳤다.

    황제가 제 뒷배가 되어 주리라 생각하는 요의는 루안을 보고 무시하며 콧방귀만을 뀌었고 루안은 그저 침묵 속에서 예를 올렸을 뿐이었다.

    그들이 궁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루안은 마차에 올라 돌아갔다.

    * * *

    강왕비 모자가 입궁하고 있을 때, 지온은 난택산방에서 대장공주와 경을 읽고 있었다.

    대차게 웃고 난 대장공주는 많이 밝아졌다.

    그 후로 대장공주는 계속 지온을 불러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때론 불평을 쏟고, 때론 웃음을 터트렸다.

    바람에도 일렁이지 않는 오래된 우물 같았던 대장공주에게서는, 이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지 않았다.

    “경(經) 강의를 제법 괜찮게 하는구나.”

    대장공주가 말했다.

    “능양진인보다 재밌다.”

    지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능양사숙께서는 정통성 있는 분이시지 않으십니까. 저처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주제와 이리 멀리 달아나지 않으시겠지요.”

    대장공주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교육은 즐거워야지. 그래야 쉽게 기억하지 않겠느냐.”

    그때 매고고가 들어와 대장공주에게 몇 마디 귀엣말을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대장공주가 해바라기씨를 까며 말했다.

    “황제가 요의, 그 녀석을 궁으로 부르셨다는구나. 강왕비도 함께 갔다는데, 네 생각엔 어찌 될 것 같으냐?”

    가만히 생각하던 지온이 입을 열었다.

    “진국공께선 질책을 받으시겠지만 강왕비께서 계시니 벌을 받진 않으실 것 같습니다.”

    대장공주 역시 지온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째, 그 멍청한 것은 분명 가서 고자질하려 할 게야. 그러나, 그것은 황제의 성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처사지. 황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가장 공을 들이는 사람이야. 다른 이들이 자신더러 한쪽 편만 든다고 할 것이 두려울 테니 꾸짖을 것은 반드시 꾸짖겠지. 그러나 강왕비는…….”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거만떨기를 좋아하고 멈춰야 할 때를 모르는 사람이지. 자신이 황제의 생모라 생각하고 있으니 분명 난리를 칠게야. 황제도 제 모친이 난리를 칠 것이 걱정될 테니 어쩔 수 없이 제 모친을 높이 대우하며 고이고이 모실 수밖에 없겠지.”

    말을 마친 대장공주가 아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지온은 문득 루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루안은 이번 기회에 요의, 그자의 싹을 도려내 버리겠다는 의미였어.’

    “공주마마,”

    지온이 돌연 대장공주를 불렀다.

    “소녀가 마마와 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웃음을 비춘 대장공주가 옆에 있는 매고고를 가리켰다.

    “갑자기 내기라니, 매에게 배운 것이야?”

    그러고는 얼른 덧붙였다.

    “무슨 내기인지 어서 말해 보거라.”

    지온이 배시시, 미소를 띄웠다.

    “제가 느끼기에 요즘 진국공께서 운수가 사나우신 것이, 재수 없는 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하여, 이번에 입궁하신 일이, 어쩌면 쉽게 넘어가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장공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것은 얼굴의 상을 보아 안 것이냐?”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지온의 확신에 찬 모습에 대장공주의 호승심이 발동했다.

    “오냐, 그깟 내기, 하면 하는 것이지!”

    * * *

    “폐하를 뵈면 다정하고 친근한 태도를 보여야한다. 알겠지?”

    강왕비의 조용한 당부에 요의가 재빨리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는 여섯째 형이 항상 어색했다. 함께 자라지도 않았을뿐더러 유별한 군신의 관계까지 겹치지 않던가.

    지난번 도성에서 쫓겨났던 상황을 떠올린 요의는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 형이 가식적으로 보였다.

    ‘어차피 피를 나눈 살붙이들인데 좀 편의를 봐줄 수도 있는 거 아냐? 그게 당연한 거지!’

    금세 나타난 호 공공, 호은이 말을 전했다.

    “왕비마마, 국공을 뵙습니다. 폐하께서 부르시옵니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강왕비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황제의 서재인 어서방(御書房)으로 들어갔다.

    “신첩, 폐하를 뵙습니다.”

    자신을 ‘신첩(臣妾)’이라 칭하긴 했으나 머리를 숙이진 않는 그녀였다.

    급히 다가온 황제는 이미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숙모께선 그리 예를 차리실 것 없습니다.”

    예법으로 따지면 강왕비가 고개를 숙여야 하나, 자신을 낳아준 생모에게 황제가 그런 예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봐라, 앉을 자리를 내오거라!”

    “네, 폐하!”

    강왕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그녀가 황제의 손을 붙들며 걱정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폐하, 이리 뵈니 또 마르신 것 같습니다. 요즘 잘 쉬고 계시는지요? 국사가 바쁘시겠지만 몸을 잘 챙겨셔야지요.”

    낯에 감동의 빛이 떠오른 황제가 대답했다.

    “짐은 괜찮습니다. 조금 마른 듯해야 오히려 더 정신이 맑은 법이지요.”

    그 후로 조금 더 서로의 안부를 묻는 말이 오가고 강왕비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폐하의 아우가 참으로 곤란하게 됐습니다. 나가서 술을 마셨다가 일이 났어요. 사람들이 어찌나 간악한지, 말들을 그리 험하게 하니 큰일입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이 숙모님과 아우를 입궁하라 한 이유도 그 일 때문입니다.”

    황제의 이리 대답하자 강왕비는 안심이 되었다.

    양자로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황제는 제 아들인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먼저 이리 우리를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다들 여덟째를 도와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주려는 게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한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요의가 앞으로 나서며 예를 표했다.

    “아우가 폐하를 뵙습니다.”

    요의는, 이번에야말로 공손하고 착실한 모습으로 형제의 우애를 다져보리라 생각하며 황제의 일어나란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란 말이 들려오질 않는 게 아닌가!

    꿇어앉은 다리에선 벌써 쥐가 날 지경이었다.

    “폐하?”

    영문 모르는 눈빛을 한 강왕비가 황제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이미 어안(*御案: 황제 전용 탁자)으로 다시 돌아가 앉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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