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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 (102)화 (102/385)
  • 102화. 묵은 체증이 드디어 내린 게야!

    마차가 다시 출발한 후, 유신지는 계속 제 어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감히 말 한 마디를 붙이지 못했다.

    그 모습이 통쾌하다 생각한 유 대부인은 아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미가 화도 나지 않았는데, 왜 그러는 게냐?”

    그저 마른 웃음만을 지은 유신지가 속으로 생각했다.

    ‘화가 안 나셨으니 무서운 것이지요!’

    화가 났다면 화를 터트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았다면 마음에 담아 둔 것이 아닌가!

    “어머니, 이 일은 제가 깊이 생각하고 한 일입니다. 팔공자가 일전에 지온 소저를 희롱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계속 지온 소저를 찾고 있었어요. 도성이라 봐야 겨우 손바닥만한데 언제가 되었든 지온 소저를 찾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채 소저도 저리 몰렸는데, 지온 소저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을 게 아닙니까!”

    “어미는 화가 난 게 아니라도? 그런데 뭘 그리 해명을 하고 그러는 게야?”

    그에게 눈을 흘긴 유 대부인이 마차 밖에다 대고 말했다.

    “견과 집에 앞에 잠깐 세우시게. 말린 과일 두 근(斤)만 사서 가야겠네.”

    “알겠습니다, 부인.”

    “어머니…….”

    유 대부인은 이미 말린 과일을 사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난 끝났어.’

    유신지는 아무래도 나중에 뭔가 무서운 일이 자신을 기다릴 것이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드디어 동생이 사고를 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

    * * *

    자신의 마차로 돌아온 지온은 안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탔어요?”

    루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정국공부에서 한 발 먼저 나왔소.”

    “…….”

    지온은 침묵하며 생각했다. 

    ‘심계가 깊기도 하지, 먼저 나와 마차에서 기다릴 생각을 하다니.’

    생각을 마친 지온이 물었다. 

    “그 하녀는 어떤 사람이죠? 설마 무슨 사달이 나진 않겠죠?”

    “그럴 리 없지. 내 사람이니까.”

    순간 멈칫한 지온이 물었다.

    “하녀로 분장을 한건가요, 아니면 이미 예전에 정국공부에 심어둔 사람인가요?”

    루안이 대답했다.

    “일이 벌어진 후에 그 하녀를 찾지 못한다면 금방 의심을 사게 되겠지.”

    ‘그 말은 정국공부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상황을 파악한 지온이 물었다. 

    “이러다 정체가 탄로 나면 어쩌려고요? 걱정도 안 돼요?”

    그가 이곳에서 이토록 깊은 치욕을 감내하면서도 일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북양왕부의 계획이 얼마나 깊고 원대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계획이 만약 이 일 때문에 망가진다면…….’

    루안은 평소와 다름없는 덤덤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겨우 이런 사소한 일도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할 정도면,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러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북양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저도 모르게 피식, 지온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온은 그에게 그 말은 비밀을 유출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 그 말은 그가 북양에서 도망을 친 것이 아니라, 애써 북양을 떠났단 말이 아닌가.

    지온이 묻기 위해 입을 떼기 전, 그의 음성이 먼저 들려왔다.

    “더구나 난 이미 한 번 후회했었소. 그러니 다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 말은…….’

    갑자기 눈물이 차오른 지온은 고개를 돌리고서야 간신히 눈물을 참아낼 수 있었다.

    * * *

    지난 삼년.

    루안은 늘 그날을 반복적으로 떠올렸다.

    해구가 무애해각을 공격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곧장 누군가 태자를 건드리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태자를 지켰다.

    해구들을 죽이고 태자를 지켜가며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그는 옥종화가 바다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선창에 도착했을 땐 이미 그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끝내, 그는 누구도 지켜내지 못했다.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태자는 승하했으며, 그녀는……. 살았다면 사라졌을 테고, 죽었다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루안은 목숨을 등한시하고 그녀를 찾았다.

    그때 북양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부왕이 적국의 첩자에게 암살을 당했다는 부고였다.

    큰형은 그에게 곧장 돌아오라 전하며, 지금 집안이 처한 위기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북양왕부는 과거 정해왕부와 같이 사라질 것이라 했다.

    그는 쉼 없이 말을 달려 북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왕의 영정 앞에서 형과 반목하여 크게 싸움을 벌인 뒤,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도성까지 천리 길을 달려 도망길에 올랐다.

    짧디짧은 몇 개월이 마치 반평생을 지나 온 듯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애통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을 때, 모든 세상이 무너졌다. 새로운 황제가 어디선가 여인을 데려와, 그녀를 옥종화라 부른 것이다.

    그날, 루안은 밤이 새도록 방에 처박혀 술을 마셨다.

    옥종화에 대한 의안왕의 집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루안, 자신이 아니던가.

    그랬던 의안왕, 아니 지금의 황제조차 이리 나온다면 그녀는…… 정말 죽은 것이었다.

    ‘죽음이 이리 쉬운 것이었나. 말 한 마디에 진짜 사라져 버린 건가?’

    그리고 몇 달 전.

    익숙한 향기를 맡고 따라갔던 루안은 조방궁 밖에서 며칠을 서 있었다.

    그는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너무도 간절하게 알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실망할까 두려워 감히 알아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옥종화에게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그것도 외모도 전혀 다르고…….’

    그리고 바로 그때, 나비 떼가 날아드는 것이 루안의 눈에 들어왔다.

    ‘하늘도 그녀를 가엽게 여긴 것이다. 그녀가 진짜 돌아온 거야.’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그녀가 절대 그런 결말을 맞지 않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처리할 것이오.”

    회상을 끝낸 루안이 말했다.

    “단번에 팔공자를 눌러 죽이긴 쉽지 않으니 한 번 더 불을 질러야 할 거요.”

    지온이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끝까지 해볼 생각인 거예요?”

    루안의 눈빛은 서리가 낀 듯 차가웠다.

    “그놈은 이미 당신의 신분을 알게 됐소. 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소.”

    잠시 침묵한 지온이 작게 속삭였다.

    “제가 불편을 끼쳤네요.”

    루안은 고개를 저었다.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거든 앞으로 일이 생기면, 내가 준비할 수 있게 말을 해주는 게 좋겠군.”

    지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유 대부인, 부인께서 틀리셨어요. 저도 뒤를 받쳐 줄 뒷배가 있습니다.’

    “그럴게요.”

    곧 조방궁에 도착할 터라 루안은 사람이 없는 장소를 골라 마차에서 내렸다.

    이에 마부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니, 아가씨의 마차에 어찌 사내가 타고 있단 말인가!’

    지온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그를 배웅했다.

    밖에 있던 서아가 마부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아무 것도 못 본 거예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마부가 힘겹게 대답했다.

    * * *

    조방궁으로 돌아온 지온은 소세를 하고 환복한 후, 곧장 대장공주를 알현하러 갔다.

    난택산방에 도착하자 궁인은 보고마저 생략한 채 그녀를 데리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예를 갖춘 지온이 바로 보고부터 올렸다.

    “노부인께선 건강하십니다. 그리고 공주마마에 관한 일들을 많이 여쭈시며 제게 서신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노부인께선 모두 평안하니, 공주마마께서도 스스로를 잘 챙겨 돌보라 전하셨습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본궁도 마음이 놓이는군.”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물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해보니, 자네는 어떻던가?”

    잠시 말이 없던 지온이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소녀가 공주마마께 한 가지 일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

    작게 미소를 지은 대장공주가 생각했다.

    ‘어린 것이 감이 빠르기도 하지. 정국공부에 다녀오고는 자신을 본궁과 남이라 생각지 않는 게야.’

    “강왕부의 팔공자와 관련된 일입니다.”

    지온이 차근차근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대장공주의 말이 떨어지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지온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대장공주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가만히 생각하다 물었다.

    “이 일, 뭔가 이상해 보이는구먼. 혹시……자네가 손을 쓴 것은 아닌가?”

    지온은 당연히 대장공주 앞에서도 정국공부에서 그랬던 것처럼 완전한 결백을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채씨 가문의 모녀와 약속을 잡고 함께 갔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대장공주는 이미 자신이 모종의 준비를 했다고 예상할 테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지온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처음부터 팔공자의 추문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을 이렇게 만들기까지는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

    “유씨 가문의 대공자입니다.”

    잠시 멈칫했던 대장공주가 돌연 하하하,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는데 어찌나 신나게 웃던지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다.

    옆에서 얘기를 들으며 화도 나고, 웃기기도 했던 매고고가, 심통이 난 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였는데 어찌 웃음이 나오십니까, 공주마마!”

    연신 배를 붙들고 웃던 대장공주가 말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재밌는 일이 생겼는데 웃지도 못하게 하는 겐가, 매!”

    “지온 소저가 있습니다, 공주마마!”

    매고고가 동동거리며 그리 말하자 대장공주가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게 무슨 상관있겠어?”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다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게.”

    여전히 눈가에 웃음이 가득한 것이 공주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지온은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마지막 걱정까지 내려놓았다.

    지온이 이리 간 크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대장공주가 강왕부를 싫어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왕부의 체면을 상하게 한다면, 대장공주를 기쁘게 할 수 있을 터였다.

    대장공주님의 기분만 좋다면, 자신이 친 사고가, 사고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강왕부와 대립하는 입장에 서야, 대장공주는 자신을 제 사람으로 생각할 터였다.

    자신이 ‘지온’이 된 후로 본 대장공주는 언제나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공주는 마치 슬픔도 기쁨도 없이, 생기가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랬던 공주가 지금, 이렇게 웃으니 공주에게서 예전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아주 일을 제대로 했어!”

    대장공주가 아낌없이 지온을 칭찬했다.

    “지난 수년간 쌓인 본궁의 묵은 체증이 드디어 내린 게야!”

    * * *

    “어이, 그 소식 들었나? 강왕부의 팔공자가 정국공부에서 술에 잔뜩 취해서는 돼지랑 그렇게 뜨거웠다네?”

    “뭐? 왕부의 공자가 뭔 놈의 비위가 그렇게 세데?”

    “전에 그 소왕이 그렇게 호색한이란 소문은 들었네만, 돼지도 안 가릴 줄은 몰랐구먼…….”

    “그건 좀 너무…….”

    “내 희귀하고 괴상망측한 것들을 좋아하는 괴벽이 있단 소린 들었네만, 돼지를 좋아하는 것은 또 다르지, 아무래도? 그건 좀…… 더럽잖은가…….”

    “아닐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 팔공자가 전에…….”

    단 며칠 만에 온갖 살이 붙은 소문은 풍문이 되어 도성 전체에 퍼졌다.

    강왕부는 그야말로 폭탄이 터진 듯 했다.

    분명 입단속을 그렇게 시켰는데 대체 소문이 어떻게 퍼진 것이란 말인가!

    정국공은 무척 미안해했다.

    “그날 본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소. 중간에 돌아간 사람도 있었던 지라, 그들은 우리도 도저히 방법이 없소.”

    말인즉슨, 강왕부는 이대로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수밖에는 없단 소리였다.

    이후, 소식은 궁까지 흘러들어갔고 황제는 명을 내려 요의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안 그래도 요즘 문밖을 나서기만 하면 사람들의 시선과 손가락질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요의는, 황제가 자신을 불러들였단 말에 괴성을 질렀다.

    “여섯째 형님이 이대로 날 내버려 두지 않으실 줄 알았다니까! 어머니, 우리 당장 입궁합시다! 형님께,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들은 당장 죽여 버리라고 하자고요!”

    강왕비가 버럭 소릴 질렀다.

    “형님이라니, 폐하라고 해야지!”

    요의가 떨떠름해서는 마지못해 호칭을 고쳤다.

    “우리 뒷배인 폐하가 있는데, 그깟 것들이 뭐가 무섭다고…….”

    표정을 조금 푼 강왕비가 그에게 말했다.

    “가서 죽이니 살리니 그런 소린 입에 올리지 말거라. 죽이고 싶다고 어찌 죄 없는 이를 그냥 죽이느냐?”

    “그럼 저들이 이대로 절 비웃게 놔두란 거예요!”

    요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안 되지.”

    강왕비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감히 내 아들을 비웃으면, 이 어미가 가만두지 않을게야!”

    강왕비의 말에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요의였다.

    그리고 모자 두 사람은 바삐 황제를 알현할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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