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방 (101)화 (101/385)

101화. 조언

상황을 지켜보던 유신지가 앞으로 나섰다.

“세자비께선 마음을 가라앉히시지요. 소왕께서 이제 막 깨어나신지라 아직 기억이 흐릿하실 것입니다. 마침 제가 대리시에서 공무를 보고 있어 자주 사건을 보는지라 이런 일에 다소 경험이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질문을 드려 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강왕세자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유신지의 얼굴을 보니 정말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보자니 또 그의 웃음이 너무 진심으로 보이지 않는가?

생각하니 유씨 집안도 황제의 심복 집안이라 강왕부를 함정에 빠뜨릴 이유가 없었다. 강왕세자비는 못이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공자, 부탁드리겠네.”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예를 갖춘 유신지가 휘릭 몸을 돌려 요의에게 물었다.

“소왕. 하관이 소왕께 몇 가지 질문을 여쭐 것입니다. 소왕께선 최대한 떠올려보시고 확실히 생각나지 않으시면 생각이 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 되십니다. 아시겠지요?”

“알겠네.”

요의는 따분하고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다들 몰려들어 자신을 귀찮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찌되었건 그 아리따운 선녀님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유신지가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소왕, 창문을 넘어 나가신 후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요의가 잠깐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

“사람을 쫓아갔네. 그런데 얼마 쫓아가지 못하고 금방 놓치고 말았어.”

“사람을 놓친 이후엔 무얼 하셨지요?”

“계속 찾았지, 뭘 했겠나? 헌데, 정국공부의 정원이 워낙 복잡해야 말이지. 여기저기 샛길을 돌아다니다보니 정신이 다 핑, 돌더구먼.”

“아마도 소왕의 술기운이 올라오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현기증을 느끼셨겠지요.”

고개를 돌린 유신지가 뒤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설명하고는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정원에서 뒷주방까지의 거리가 짧지 않은데, 소왕께선 혹시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잠시 생각을 하던 요의가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안 나네.”

“그럼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것은 무슨 일이신지요?”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그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기억이 나네! 내가 길을 잃고 있던 찰나에, 마침 지나가는 하녀 하나를 보게 됐네. 그런데 하녀가 생긴 것이 꽤나 곱상하여 내가 그 아이와 대화나 해볼까 싶었는데…….”

‘대화? 건드릴 생각이었겠지!’

정국공 노부인의 표정이 특히 좋지 않았다. 자신의 생일연회에 초대한 손님에게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잔치를 베풀었으면 됐지, 거기에 하녀까지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인가?

‘대체 정국공부를 어디라 생각하는 것이야!’

유신지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소왕께선 그녀와 얼마나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으셨지요?”

“아무 일도 없었네!”

요의는 진심으로 맥이 풀려버린 모습이었다.

“하녀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가야 된다고 해서 말이지! 그래서 내가 계속 쫓아갔는데, 그렇게 계속 따라가다 보니 졸음이 쏟아져 그냥 잠이 들었던 것 같네.”

“…….”

답이 나왔다.

‘여색을 밝히는 주정뱅이 놈이 술을 마시고 일을 친 것이로구먼!’

정국공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집 하녀가 실수를 한 것 같군. 집안에서 길을 잃은 소왕을 보고도 도와드리질 않았다니……. 돌아가 내가 상황을 알아보고, 하녀를 찾아 크게 벌하겠네.”

딱딱하게 굳어버린 강왕세자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요의가 한 대답들은 모두 제 발등을 찧는, 자승자박의 대답들뿐이지 않은가!

유 대부인이 말했다.

“소왕께서 과음하신 듯하나, 젊을 때야 다들 그렇지 않은가? 세자비는 너무 나무라지 마시게.”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지 소저와는 연관이 없으니, 내가 그만 데리고 가겠네.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유 대부인이 지온을 데리고 떠나려 하자 순간 요의가 침상에서 달려들 듯 내려서며 소리를 질렀다.

“어, 기다리시오! 소저, 이름이 무엇이오!”

강왕세자비는 저놈을 깊은 호수에 꼬르륵 빠트려 버리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 소저는 정말 그곳을 지나쳤을 뿐이었고, 그 후에 심지어 다른 하녀까지 하나 더 엮인 이상, 이젠 다른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강왕세자비의 한 서린 음성이 울려퍼졌다.

“팔공자와 함께 강왕부로 돌아가자!”

* * *

강왕세자비는 급히 돌아갔다.

한편, 유 대부인을 배웅하는 정국공 부인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큰아드님과 지 소저가 억울했겠습니다. 미안해요, 언니.”

유 대부인이 웃음을 지었다.

“우리 사이에 뭘 그런 말까지 하는가? 확실하게 묻고 넘어가지 않으면 어느 집안이 인정을 해. 하여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자네 집안이 입막음을 하는데 노력해야하겠구먼.”

“그러니까요.”

정국공 부인 또한 짜증스러웠다.

“이 일이 어디 입막음을 한다고 막힐 일입니까? 본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요. 객 중 하나가 친우나 친지 아무에게나 대충 한두 마디만 흘려도, 도성에 금방 파다하게 퍼질 텐데요.”

유 대부인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이야기 해주게. 돕겠네.”

감동한 정국공 부인은 유 대부인을 향해 어쩜 그리 친절하고 사람이 좋은지 모르겠다며 칭찬을 늘어놨다. 

이에 유 대부인은 속으로 말했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친절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말이다.

제 큰아들이 일을 벌였으니, 상대방이야 그것을 모른다고 해도 일을 수습하는 것을 돕긴 해야지 않겠는가!

* * *

먼저 일어선 유 대부인은 지온을 챙겨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지온은 안 그래도 마음이 불안하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유 대부인이 자신더러 그만 가보란 소리가 없자, 어쩔 수 없이 유씨 가문의 마차에 올랐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은 유신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이미 의심을 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전에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당장에 걸음아 나살려라하고 도망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손에 인질이 있지 않은가…….

“안 타려고?”

유 대부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반쯤 어머니에게 목을 잡힌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 유신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마차에 올랐다.

* * *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손을 닦던 유 대부인은 눈 끝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둘 다 고개를 숙인 채 어찌나 착하게 앉아 있는지, 조신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아이고야.’

그녀는 순간 후회가 되었다.

이미 상대하기 벅찬 큰아들이 아닌가? 거기에 이런 아이를 며느리로 데려오기까지 하면 집안이 남아날까 싶었던 것이다.

‘어휴, 포기하자, 포기해! 벌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참한 처자 데려올 낌새 하나 없는 것을……. 내가 저 녀석에게 바랄 걸 바라야지! 쯧쯧, 저리 바짝 쫀 것 좀 보세나! 그러니 부인 하나 못 얻지!’

어차피 집안엔 둘째가 있지 않은가?

그 순진한 것은 시키는 대로 혼례를 할 녀석이라 손주 못 볼 걱정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 설명을 해봐야 할 것 같지 않느냐?”

마차가 달린 지 꽤나 지났을 때쯤, 유 대부인의 입이 열렸다.

이미 그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유신지가 지온을 슬쩍 보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리 하자고 했습니다. 저희는 강왕부의 그 호색마 팔공자녀석이 채 소저를 괴롭히는 것이 싫었어요, 어머니. 그래서 놈을 혼쭐 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유 대부인은 예상했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럼 그 하녀는 또 어떻게 된 일이냐?”

유 대부인의 질문에 유신지는 멈칫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유 대부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희들은 걸릴 것이 두렵지도 않았던 것이야? 강왕비가 얼마나 제 막내아들을 애지중지 아끼는데, 그 아들이 이런 큰 망신을 당했다는 것을 알면 분명 매우 화를 낼 것이다. 만일 그들이 개미 뒷다리만한 단서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그 후에 있을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 너희들은 알고나 이런 일을 벌인 게야!”

유신지가 자신 있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냐?”

“그것이……. 그것은, 다른 이가 관련이 되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 아들과 지온을 번갈아 보던 유 대부인은 다시 한번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 일에 또 다른 자가 더 끼어 있단 말이냐?!”

“……네.”

유 대부인은 이마를 짚었다.

이젠 정말 하늘이 뱅글뱅글 도는 느낌이었다.

비록 뱃속에 능구렁이가 가득하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이 친 사고는 본인이 수습을 해왔던 터라, 어려서부터 걱정 한 번 해본 적이 없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 게야? 혼자 나선 것도 모자라, 다른 이까지 불러들이다니!’

그녀는 더 이상 제 아들과 말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 제 아비 손에 처리를 맡겨야겠구나.’

태사는 성품이 대쪽 같아 아들의 언변에 휘둘릴 이가 아니었다.

다시 기운을 낸 유 대부인이 지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돌아가서 웬만하면 대장공주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네. 공주마마께서 일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이 좋아. 마마께서 자네를 정국공부로 보내신걸 보면 이미 자네를 바깥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니, 앞으로 자네 역시 공주마마를 집안 어른이라 생각하고 공경하며 모셔야 할 것이네. 사고를 치면 어른이 알아야지, 알겠는가?”

지온이 감동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인…….”

그녀는 유 대부인이 두 사람이 겁도 없이 과하게 나서서 행동했다며 호되게 질책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유 대부인은 걱정과 당부의 말을 해왔다.

유 대부인이 지온의 손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지온 소저는 우리 집 큰아이와 참 똑같아. 소저는 넘치게 똑똑한 사람이라 다른 이들이 모두 바보로 보일 것이네. 그래서 자신감이 넘치기도 하고, 때론 자만할 때도 있을 것이네. 내,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뭐라 더 해줄 말이 없네. 도리를 말 하자니, 두 사람의 이해력이 뛰어나 두 사람은 분명 하나하나 이유를 갖다대며 날 설득하려고 들겠지. 결국 이야기 한 나만 더 혼란스러워질 테고…….”

맞잡은 유 대부인의 손이 따뜻했다.

“하지만 지온 소저, 기억하게. 우리 큰아들은 조금 길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태사부 전체가 저 아이의 뒷배가 되어 뒤를 받쳐줄 것이네. 그러나, 자네는 어쩐단 말인가! 지금의 지씨 집안엔 기댈 곳이 없고, 자네는 부모님도 계시지 않으니, 앞으로 이런 일이 있거들랑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행동 하시게, 하시겠는가!”

진심이 가득 담긴 조언은 지온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네, 부인…….”

이야기를 마친 유 대부인이 물었다.

“우선 우리 집으로 가겠는가? 아니면 지금 헤어지는 게 좋겠나?”

“돌아가 대장공주님께 말씀을 전해 드려야 할 것 같아 태사부에는 들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온의 대답에 유 대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에게 마차를 세우게 했다.

지온의 마차는 유씨 가문의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었던 지라, 지온이 제 마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유 대부인은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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